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3 화
에르안의 눈이 스르록 감겼다.
몸의 이상을 감지했을 때부터 아르가에게 오랫동안 충분히 설명을 들었던 터라, 이번엔 오랫 동안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괜찮아.”
하지만 어린 시절처럼 눈을 뜨지 못하게 되는 그 긴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네가 보이거든.”
리체의 초록색 눈에 조용히 눈물이 고였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어둠이 무섭지 않더라고.”
아르가는 에르안의 다른 쪽 손 을 붙잡고 정신없이 마력 흐름을 확인하고 있었다. 벌게진 뺨의 에르안이 완전히 의식을 잃은 후에야 리체는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원인을 잘 아니까 당연히 잘 고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쓰러져 있는 에르안을 보니 가슴 이 미어졌다.
그리고 그 표정을 바라보며 아르가는 깊은 한숨을 삼켰다.
리체의 짝으로 에르안은 절대 싫다고 생각했지만, 리체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더 싫었기 때문 이다.
아까 사색이 되었던 딸의 얼굴 을 본 순간 그는 결국 딸이 원한 다면 에르안 같은 놈도 허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 았다.
“울지 마라.”
아르가는 에르안의 호흡을 확인 하며 리체에게 말했다.
“이 인간을 미지의 독에서도 구해 낸 게 너다. E형 피 하나 더 해졌다고 그걸 해독 못할까.”
“맞아요……”
리체는 소리 내어 울지도 않고 눈물만 뚝뚝 홀리면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든 살릴 거예요. 전 더 어려운 해독도 해낸 걸요.”
아르가는 짜증스럽게 에르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이런 소리를 하게 만드는구나. 역시 집념의 세르이어스야. 아주 지긋지긋한 집안이 지. 내가 애초부터 이래서 얽히 기 싫었다니까.”
케일런도 이사벨도 결국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얻어 내는 데에는 도가 트인 사람들이었다.
오죽하면 아쉬울 것 없는 자신 이 계속 그 집안의 주치의로 있었을까.
그는 이를 갈며 덧붙였다.
“진짜 싫어 죽겠지만, 데이트 한 번 정도는 눈감아 줄 테니까 일어나. 딱히 네가 날 구해 줘서 이러는 건 아니고.”
***
오랜만에 열린 황실 재판은 그 렇게 원래 무엇때문에 재판이 열렸는지도 잊을 만큼 아주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끝났다.
수도의 모든 귀족들은 반란군의 배후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페렐르만 자작가 부녀의 활약과 세르이어스 공작이 몸을 날려 페렐르만 자작을 구한 뒤 쓰러져 버렸다는 이야기까지 한참 동안을 떠들었다.
물론 제이드의 뇌 건강에 대해 서만큼은 공식석상에서는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내가 계획한대로 잘 끝났지만 정신을 잃은 에르안을 보고 있자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환자를 이송하는 것은 최대한 지양하는 편이 좋았기 때문에, 아빠는 그 자리에서 수도에 작은 저택을 하나 샀다.
“수도에 자작저 하나 있으면 좋지, 뭐. 딱히 공작의 치료에 꽤 많은 시간이 들 것 같아서 산 건 아냐”
그래서 나와 고모, 아빠와 디엘 까지 정신을 잃은 에르안과 함께 당분간 수도에서 지내기로 했다.
최대한 빠르게 아빠의 E형 피를 받았기 때문에 영영 환각에서 못 깨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최악의 상황인 뇌사는 피 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차근차근 잘 치료하면 곧 회복될 것 같았다.
다만 발병부터 응급 처치까지 모두 다 새로웠기 때문에 하나부 터 열까지 직접 연구하여 처치해야 했다.
나는 이사벨 마님에게 상황 설 명을 하며, 환자를 이송하는 것은 최대한 지양하는 편이 좋으니 당분간 수도에서 그를 보살피겠 다는 편지를 디엘 편에 보냈다.
내가 천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에르안의 몸에 서 요동치고 있던 마력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세심하게 곁에 붙어서 치료하면 머지않아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기온이 변했을 때 한번 제대로 앓았으므로, 한 번 앓은 병에 대 해 면역력이 높아지는 것처럼 앞 으로는 더욱 더 튼튼해질 것이다.
아는 중상에 아는 독이니 잘 치 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에르안이 쓰러질 때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중한 사람이 다친 기분을 알았으므로 앞으로는 더 사명감 있게 의학을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도와 공작령은 멀지 않았기 때문에 편지를 보내고 난 뒤 빠르게 이사벨 마님의 방문이 이루어졌다.
“아가씨,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손님이 오셨어요. 이사벨 마님이세요.”
에르안에게 수액을 주사하고 있는데, 하녀가 들어와서 말했다.
“네, 준비하고 있을게요.”
당연히 이사벨 마님은 아들인 에르안을 보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에, 응접실에서 아빠와 잠시 대화를 나눈 뒤 바로 이곳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살살이풀 해독 효과와 E형 피가 만나니 에르안의 신체가 그대로 멈추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는 눈을 감았던 그 순간 그대 로 모든 대사가 멈춰서 딱히 씻 기지 않아도 더러워지지 않고 있었다.
수액을 모두 주사하고 그의 머 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빠와 인사말을 하고 있을 이 사벨 마님이 벌써 을 리는 없어 서 고개를 갸웃하는 와중에 조심 스럽게 들어온 사람은 디엘이었다.
이사벨 마님을 모시고 공작성에 서 함께 온 듯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짐을 좀 챙겨 왔는데……”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짐은 내 방에 다 가져다 줘. 아직 연구실이 없거든. 그리고 나중에 자작저에도 내 연구실 하고 온실을 만들 예정인데 견적 좀 내 주고. 부탁할게.”
내 말에 디엘은 신나서 눈을 굴렸다.
“공작성 연구실 인테리어는 벌 써 유행이 좀 지났는데, 이번에는 요즘에 유행하고 있는 파스텔 톤으로 꾸며 보는 게……. 아, 그리고.”
디엘은 내 짐 속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내서 내게 건넸다.
“꼭 가져오라는 것도 챙겨 왔는데……”
나는 디엘에게서 작은 상자 하 나를 받아 들었다.
잠시 신변잡기적인 대화를 나눈 뒤, 디엘이 연구실에 어울리는 온갖 색깔을 읊으며 나간 이후 들어온 사람은 이사벨 마님이었 다.
간단히 나와 인사를 나눈 뒤, 이사벨 마님은 그림같이 누워 있는 에르안을 보며 잠시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그녀는 에르안의 팔을 잠깐 쓸 고 중얼거렸다.
“자식이 아픈 모습을 보는 건 이 나이에도 힘들구나. 저렇게 덩치가 산만 해도 말이야.”
“곧 멀쩡히 다 나을 거예요.”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빠르게 말했다.
“마력 흐름도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고, 다른 신체 변화 도 좋아요. 며칠 안에 의식이 돌 아올 것 같아요.”
“리체, 네가 보고 있는데 어련 하겠니. 그건 믿는단다.”
“제가 무조건 쾌차시킬게요. 그 래도 저희 아빠를 구하기 위해 다친 거라… 제가 마님 얼굴 을 뵐 면목이 없네요.”
“그럼 당연히 마음의 부담을 가져야 하지 않겠니.”
이사벨 마님은 천천히 나를 향 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마치 에르안처럼 나를 꽉 얽어매는 것 같았다.
“이 녀석을 평생 책임지고……”
“……네?”
“앞으로 나를 어머님이라고 부르면 된단다.”
그녀가 힘주어 말해서 나는 나 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무래도 아빠가 계속해서 세르이어스 성의 주치의로 남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아빠 말마따나 이 집안의 눈에 한 번 들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이 틀림없었다.
“당장 결혼은 힘들 것 같아요. 아빠의 허락도 있어야 하고, 저 도 가족들과 시간올 더 보내고 싶고요.”
“영원히 기다리마. 다만 어머님 이라고는 지금부터 불러 주면 안 되겠니?”
“아…… 네, 어머님.”
나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대답 했다.
에르안이 저렇게 쓰러져 있으 니, 이사벨 마님이 원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다 저당 잡힐 생각은 없었기 때 문에 나는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런데 저는…… 만일 결혼한 다고 해도 어머님처럼 공작성의 내조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 러기엔 재능 낭비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요.”
“당연하지. 에르안은 쓸데없이 능력이 좋아서 혼자 다 할 수 있단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하 렴. 그리고 원래부터 네 내조를 에르안이 해야 하는 것 아니니? 또, 지금 네 입으로 ‘결혼’이라고 했단다. 절대 잊지 마.”
이사벨 마님은 쐐기를 박듯 말 하며 아들의 팔을 잡고 해사하게 웃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이참에 모든 걸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덧붙였다.
“그리고 공작님께서 만일 아무 이상 없이 일어나시면 저나 아빠 같은 주치의는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이유 없이 늘 아프셨던 어린 날과는 상황이 다르고, 더 튼 튼해지실 거라 제가 붙어 있는다고 해도 별로 할 일이 없을 테니 까요.”
“응, 그럼. 네 뜻대로 해. 하지 만 주치의보다 더 끈끈한 관계로 우리 모자와 붙어 있을 거지? 가족 같은 것 말이다. 맞지?”
이사벨 마님의 까만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마치 에르안과 대 화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 네, 뭐.”
내가 페렐르만 자작저에서 평생 살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사벨 마 님께서 에르안과 함께 짐을 옮길 듯한 태세라서,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까 자작과도 얘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시오니는 분명 리체가 자기를 닮을 줄 알고 그런 계약 서를 썼을 것이라고 하더구나. 우리 부부를 닮은 아들이라면 분 명히 껍데기가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장난이어도 계약서를 썼을 것이라면서 말이야.”
“물론 외모는 우리 부부의 엄청 난 조합이지만 알맹이 역시 그 둘의 끔찍한 혼종이라 절대 결혼 같은 건 못 시킨다고 어깃장을 놓더구나. 그래도 그 계약서 얘 \기를 꺼내는 걸 보니 평생 반대 할 생각은 아닌가 봐.”
여유가 넘치는 것 같은 이사벨 마님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아 무래도 세르이어스가 페렐르만보 다는 한 수 위 같다는 생각을 했 다.
그렇게 아들을 내게 완전히 맡 긴 이사벨 마님이 공작성으로 다시 돌아간 이후로도 에르안은 일 어나지 못했다.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건 그라 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 생각 보다 참 외로운 일이어서, 나는 하염없이 그의 얼굴을 쓸어 주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