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2화
하엘던은 황족이기 때문에 소지품 검사를 받지 않고 재판정에 따로 들어갔다.
아직 심문을 받지 않았던 그는 아주 옛날에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투입했던 과자 형태의 독이 이제 와서 밝혀질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고, 그때 안 들키도록 이시더 남작을 단단히 관리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변 명의 여지없이 모든 것이 밝혀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어떻게든 빠져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사라진 셈이었다.
그는 뿌듯한 얼굴로 딸을 바라 보고 있는 아르가를 쳐다보았다.
결국 그가 가지고 싶었던 모든 것을 가져 버린, 평생의 방해꾼….
반쯤 미쳐서 대륙을 헤집고 다닐 때 내심 기분이 좋아 미칠 것 같았는데, 이제 아르가가 자신을 보며 그렇게 좋아할 생각을 하니 속이 뒤집혔다.
헤아릴 수 없는 질투가 몰려오고, 혼자만 불행해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항상 품고 다니던 호신용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 부녀의 행복을 깨부수고 싶었다.
리체는 황후 쪽에 있어서 너무 멀었고, 단검을 꺼내 그나마 가 까이에 있는 아르가의 심장을 향 해 찔렀을 때였다.
갑자기 저 멀리 위쪽의 방청석 에서 커다란 검은 짐승 같은 남 자가 몸을 날려 아르가를 구해 냈다.
단검을 꺼내는 그 찰나의 순간 을 발견하고 달려든 것이 틀림없 었다.
재판정을 지키던 황실 근위대가 재빠르게 하엘던을 포박하고, 황 후의 명령에 따라 즉시 그를 고 문 기구가 마련되어 있는 황궁 감옥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간발의 차로 살아난 아르가는 그다지 마음을 놓은 내색이 아니었다.
아르가와 함께 쓰러진 에르안이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계속해서 경고했던 부 작용이 나타나고 있었다.
“제기랄! 공작님! 눈 감지 마십시오! 긴급 처치 때까지 눈 감으면 안 됩니다!”
아르가는 에르안을 받아들고 소리쳤다.
에르안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부작용을 무릅쓰고 저 멀리서 뛰어온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그 역시 눈치챘던 것이다.
“1급 독! 1급 독 어디 있어? 당장 가져와!”
하지만 원래도 보기 힘든 1급 독을 이 재판정에서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케인즈 경이 급히 시종에게 뭐라고 일렀지만 시간이 꽤 걸릴 것이 분명했다.
자꾸 몽롱해지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아르가가 그의 뺨을 마구 때렸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정신 잃으면 바로 환각 상태고 치료법 발견할 때까지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고! 야! 정신 차려! 1급 독도 없는데!”
에르안은 그의 말을 들으며 눈을 부릅뜨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르가가 미친 듯이 그의 뺨을 때리고 있는데 어느새 세이린이 숨을 헐떡대며 뛰어왔다.
“뭐야? 이 자식, 뛰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뛰어서 이렇게 됐잖아!”
“이, 이런 단단히 미친놈이!”
황후와 함께 서 있던 리체 역시 즉시 달려와 에르안의 팔을 붙들었다.
풀려 가던 에르안의 동공이 리체의 실루엣을 보았는지 잠시 또렷해졌다.
리체가 에르안의 곁에 서서 눈물을 꾹 참은 채 가론 숨을 헐떡 이며 말했다.
“에르안 님!”
리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에르 안의 눈이 살짝 휘었다.
“진짜 미쳤어요? 뛰지 말라고 했잖아요!”
에르안은 잠긴 목소리로 가쁜 숨 속에서 대답했다.
“어떻게 찾은 가족인데, 리체.”
“응급 처치 들어갈 동안 계속 정신 차리고 있으세요. 말하는 게 도움되면 계속 말하시고요. 대체 왜 그러셨어요?”
“네가 슬퍼하는 모습을 또 보고 싶지 않았어.”
리체는 울먹거리는 입술을 꼭 깨물고 아르가에게 물었다.
“아까 가져오신 1급 독은 폐기 됐죠? 그런데 주사기는 안 뺏기지 않았어요?”
“아! 있어! 그건 안 뺏겼지!”
1급 독을 그냥 주입할 수는 없 으니 당연히 주사기도 함께 소지하고 있었다.
아르가는 미친 듯이 에르안의 뺨을 때리던 손을 멈추고, 팔 걷어붙이기 시작하며 화를 냈다.
“에르안 세르이어스! 네가 결국 나를 끝까지 엿 먹여? 야! 야! 정신 차려! 계속 말해!”
저렇게 그냥 환각 상태로 빠져 드는 것보다 1급 독으로 누른 뒤 그것을 해독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게 본디 아르가와 리체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의료 지원을 위한 후방 막사에는 1급 독극물을 갖고 있지 않았다.
리체는 떨리는 손으로 아르가의 재킷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어릴 때 널 살린 걸 후회한다 고 한 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 데……”
아르가는 리체에게 소매를 걷어 올린 오른쪽 팔을 내밀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이 다급한 상황에서 주사기의 유무를 물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 피를 집어넣어도 멀쩡 하겠군. 참고로 나는 E형이야. ]
[그…… 히리카 마력 치료를 안 했는데 E형의 피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쇼크 증상이 나타나, 최악의 경우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되지. ]
아르가의 E형 피는 1급 독극물 에 가까울 정도로 독성이 강했다.
“제기랄, 직접 또 살리게 되네. 정신 차리면 내 딸한테 또 들러 붙을 텐데……”
리체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아르가가 내민 팔에서 직접 피를 뽑아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왜 리체가 아르가의 피를 뽑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상황에 서 그 이유를 즉시 물을 만큼 바 보는 아니었다.
곁에서 그 꼴을 보던 세이린은 질렸다는 둣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x 발, 무슨 인간이 저렇게 일관적이야? 저거 진짜 상또라이 아냐?”
한때 여관에서 나누던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는 이마를 짚었다.
“죽을 만큼 구르겠다더니, 진짜 말 그대로 죽을 각오를 하고 굴러 버리면 어떻게 해?”
실제로 계단을 구른 에르안의 모습을 상기하며 세이린은 한숨을 쉬었다.
에르안이 뛰쳐나가기 전까지 세이린은 그와 대화 중이었다.
[저 황자는 어떤 식으로 고통스 럽게 만들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이대로 제이드 황태자가 사형 선고 내리고 끝내는 건 너무 허 무합니다. 시오니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죽었고. 우리 가족은 오랜 시간 죄책감에 힘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렇죠]
[심지어 하엘던 황자는 자식도 없어서 아르가 놈의 심정을 알 리가 없잖습니까. ]
[아, 그런 거야 별로 문제가 안 됩니다. 제가 생각한 방법은.....]
에르안의 말을 들으며 세이린은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은 악독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 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자신과 대화하던 그 사악한 사람이 아르가를 위해서 몸을 던지고 저렇게 축 늘어져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괜히 조용히 미친 사람이 아니 었어……”
세이린이 뭐라고 말하든 말든, 아르가가 펄쩍 뛰든 말든, 주변이 얼마나 소란스럽든 혼들리는 에르안의 동공은 차분하게 움직이는 리체만 향하고 있었다.
“가족들과 소중한 시간 보내고 있어, 리체.”
이 피를 주입하면 그는 다른 의미로 꽤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독성이 강하긴 하지만 1급 독극 물과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처 음부터 끝까지 연구하여 해독해 야 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바라 오던 거잖아.”
당연하겠지만, 에르안은 아르가 를 위해 그를 구한 것이 아니라 리체를 위해 구한 것이었다.
가족들 사이에서 난생처음 보는 충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본 뒤 에르안은 쉽게 리체의 우 선순위에서 자신을 내렸다.
아르가를 공격하려는 하엘던의 음직임을 본 순간, 자신이 환각 상태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 는 것이 아르가가 죽는 것보다 리체에게는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네가 원하는 거라면 다 해 주고 싶어.”
에르안이 살짝 웃으며 말하는 동안, 리체는 그의 팔에 주사기 를 찔러 넣고 아르가의 E형 피를 주입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그에게 가족들과 시간을 실컷 보내고 싶다고는 했으면서, 그의 데이트 신청에는 대답조차 해 주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는 것은 언제나 당 연했고 그녀는 거기에 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그가 어려서 자주 아플 때에는 안정된 숨소리조차 간절 했었는데 어느새 건강한 그를 당 연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어제, 디엘과 그가 나누던 대화 를 듣고 나서도 나중에 더 잘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로 이제는 신경 써 주려고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리체에게는 가 족이 자신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던 담담한 목소리가 떠올라서 그 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서 자신의 우선순위가 당연 히 아래라고 생각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 내려왔나.
‘나…… 또 똑같은 실수를 했나 봐, 이번에도.’
예전엔 감옥에 갇혀 죽기직전까지 가족이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이번엔 에르안이 정말로 자신에게 중요하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 고 있었다. 언제나 곁에 있올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품 안에서 그가 다시 위 태로워지자 어린 시절 그를 간병 하며 보냈던 많은 밤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갔다.
리체는 주사기의 바늘을 빼내 고, 알코올 솜으로 꾹 누르며 자 신의 감정까지 누르고 조용히 속 삭였다.
“믿으세요, 에르안 님. 제가 어떻게든 다시 눈 뜨게 해 드릴 테니까요. 제 말 들으시면 돼요. 알잖아요.”
어린 날 아파하는 그를 다독이 던 그 확신에 찬 어조였다.
에르안은 살짝 웃으며 아르가에게 맞은 볼이 벌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리체 말이라면 믿지.”
리체는 주변이 소란스럽든 말 든, 어린 날 그의 잠든 모습을 바라봐 줄 때처럼 에르안의 손을 잡아 주며 그의 흐려져 가는 눈 동자를 끝까지 바라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