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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41화 (141/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1 화

“……건방지군, 페렐르만 영애.”

하엘던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그대가 피고로 있는 이 법정에서 대체 무슨 권리로 다른 안건을 운운하는 거지?”

“난 페렐르만 영애의 다른 안건을 듣고 싶은데.”

그때 젠시 공비가 일어나서 하엘던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후 폐하, 개인적으로 저는 리체 양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그 능력과 인격을 믿고 있습니다. 페렐르만 영애가 이 자리에 서 논해야 할 얘기라고 판단했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 을 것입니다. 페렐르만 영애의 발언을 허가해 주세요.”

이게 바로 내가 젠시 공비를 멀리서 부른 이유였다.

내가 발언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고 편을 들어 준 그녀에게 나는 눈을 한 번 찡긋 해 보였다.

“그래, 허가하도록 하겠다.”

황후는 하엘던 황자보다 제 배로 낳은 젠시 공비의 의견을 더 들어주고 싶었는지 냉큼 대답했다.

“그럼, 19년 전 황실 의료 연구진 소속이었던 제 아버지를 참고인으로 불러도 될까요? 이 기록에 대해 더 잘 설명하실 것 같아서요.”

“허가한다. 아르가 에이트 페렐르만 자작은 앞으로 나오도록.”

“감사합니다.”

아빠는 나를 바라보며 외알 안 경을 한 번 치켜올린 뒤, 당당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숨죽인 방청인들을 향해 말을 시작했다.

19년 전에 배가 아프거나 머리가 아플 때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약물을 연구 중이었다는 것 부터 그 연구 결과를 모두 다 의료진에게 넘기고 딸을 찾아 떠나 게 된 것까지.

“그 보고서가 여기 있습니다.”

조사관에게 넘겼던 보고서를 들어올리며 아빠는 약의 구성을 하나하나 옮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정말 운명과도 같이 제 딸 리체가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제 조수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리체는 어린 에르안 소공자님께 지속적으로 투약되고 있던 독을 찾아냈죠.”

여기서 세르이어스에 투입했던 과자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하엘던 황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런데 갑자기 재판정의 문이 열리고 모두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들어왔다.

바로 피에 젖은 옷을 아직 갈아 입지도 않은 제이드 황태자와 헐레벌떡 그를 뒤쫓아 온 케인즈 경이었다.

나 역시 전장을 뛰어다니고 있을 제이드 황태자가 지금 나타날 줄은 몰라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리체 양이 재판 중이라며? 말 도 안 돼! 분명히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이다!”

제이드 황태자는 황족들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외쳤다.

“나는 더 이상 리체 양에게 미안하고 싶지 않아! 속죄하는 기분으로 나는 반드시 리체 양을 지켜 줄 거야!”

재판정이 그가 버럭버럭 외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젠시 공비가 제이드 황태자의 팔을 잡고 난입하려는 그를 자신의 옆자리에 억지로 앉혀 진정시켰다.

“그 음모 지금 밝히는 중이다. 내 동생이지만 넌 참 타이밍도 더럽게 못 맞추는구나.”

나는 혈연의 객관적인 판단에 속으로 감탄했다.

“지키긴 뭘 지켜. 속죄하는 기 분으로 조용히 네 입이나 지켜.”

내 재판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이드 황태자가 미친 속도로 황궁으로 말을 달렸다는 케인즈 경의 설명이 이어졌다.

분명히 케인즈 경이 거절 의사를 전달했을텐데. 어쨌든 순정이 있는 남자였다.

나는 살짝 한숨을 쉬어 보인 뒤, 또박또박 말을 시작했다.

그 과자의 성분이 아빠가 연구하고 있던 약을 바꾼 독이라는 것, 그래서 어릴 때의 에르안이 밥을 먹으면 배가 아프고, 책을 보면 머리가 아픈 증상을 보였으며 장기가 점차 독으로 물들어 갔다는 것까지 전부 설명했다.

“그런데요.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와 아빠는 정말 뛰어난 의사거든요.”

저 멀리서 에르안과 고모, 디엘의 시선이 느껴졌다.

“약을 독으로 바꾸는 것은 쉽지만 시행착오가 몇 번 있을 수밖 에 없어요.”

“공작님께 주입한 독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개량한 거야. 그때까지 시간 좀 걸렸을 거다. ”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거침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세르이어스 공작님께 이런 완벽한 독이 주입되기 시작한 건 소공자님이 과자를 드실 수 있는 다섯 살 때부터였어요. 독이 개발되고 완벽한 개량을 위한 실험 이 진행됐었다는 가설을 세우면, 비슷한 피해자가 있음을 유추할 수가 있죠.”

처음에 황족 약물 투입 기록을 보려고 한 이유는 분명히 하엘던 황자가 제이드 황태자에게 암살 시도를 했을 것 같다는 심증 때 문이었다.

관람탑 테러까지 기획한 사람이 독살을 시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렇게 멀쩡하고 건강하게 살아 있으니 실패한 것이겠지만,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해로운 물질 을 몰래 투약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록을 열람하고 나니 분명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조합, 나조차도 몇 년이 걸린 그 엄청난 조합을 하엘던 황자가 이시더 남작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을 리 없었던 것이다.

아까 아빠가 읊었던 그 약물들 이 다른 곳에 섞여서 순차적으로 제이드 황태자에게 들어가고 있었다.

황족이기 때문에 먹는 것에 엄격하여, 에르안에계처럼 한 번에 과자로 섭취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감기약이나 영양제 둥에 하나하나 섞었다.

그 조합을 한 번에 다 봐도 눈치채기 힘든데,  그렇게 섞여서 산발적으로 들어 갔으니 아무도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가 증거로 제시한 황족 약물 투약 기록을 보면, 며칠에 걸쳐서 아까 아빠가 말했던 약물들의 성분이 한 인물의 식단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제이드 황태자님께요.”

투입이 시작된 시기는 에르안이 다섯 살 때부터, 즉 제이드 황태자가 열 살 때부터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린 시절부터 책만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되셨습니다.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제이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후와 케인즈 경이 정신없이 달려가 아빠가 들고있던 보고서 와 내가 짚은 약물 기록을 대조 하기 시작했다.

이미 세르이어스 공작령에서 그 과자 성분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 케인즈 경이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황후 폐하! 비록 따로 분리되어 들어갔지만, 제가 보았던 독과 성분이 같습니다! 이거 원…… 이런 식으로 투입이 되었다면 아무도 몰랐겠는데요.”

그리고 황후는 이마를 짚으며 하엘던을 노려보았다.

“감히…… 감히 내 아들을!”

“잠시만요.”

제이드 황태자는 일어나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건강한 걸?”

“일부만 효과가 있거나, 어느 한쪽으꼬 쏠려서 이상한 효과를 일으키거나 하는 수많은 아류가 있었겠지. ”

분명 ‘책을 보면 머리가 아픈 증상’만 발현되어 이상한 효과를 일으킨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 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차마 ‘황태자님은 머리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런 류의 모든 독은 어릴수록 잘 먹히니까.]

제이드 황태자는 그 당시 이미 열 살이었기 때문에 에르안보다 독의 효과가 낮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살짝, 아주아주 살짝 미묘하게 이상해진 것 같은데…….

의학적으로는 유의미한 이상증 세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떠한 경계선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어쩌지 못한 채로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이미 황태자님은 그때 나이가 꽤 많으셨고, 공작님처럼 한 번에 독극물을 섭취하지 않고 산발적으로 들이켜셨습니다. 심지어는 개량되기 전의 약물이라…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거나, 나타나더라도 미약했을 수 있죠. 어 쨌든 의도는 명확합니다. 아마 이번에 궐기한 반란군의 배후 역시 황자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장내는 쥐 죽은 둣이 고요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장 비밀스럽고도 오래된 실패가 적나라하게 밝혀질 줄 몰랐던 하엘던 황자가 차마 곧바로 받아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저 멀리서 디엘이 소리 나지 않게 박수를 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에르안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내가 잘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둣이 웃고 있었다.

젠시 공비가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듣고 있을 필요가 있나요? 당장 체포하세요!”

제이드 황태자도 목소리를 떨면서 명령했다.

“심문을 바로 진행하도록 한다.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다녀왔던 조사관들을 모두 부르도록 해. 혐의가 한두 개가 아니니까.”

황후가 벌벌 떨며 내게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고맙네, 페렐르만 영애. 정말 고맙네…. 내 아들이 음독했다는 사실도 몰랐다니.... 사냥대회 때도 알았지만 정말로 똑똑 하군. 정말로 고마워.”

“감사합니다. 저희 부녀가 환상 적으로 호흡이 잘 맞았던 거죠.”

“혹시 원하는 것이 있나? 뭐든지 말하게, 영애.”

물론 나는 이미 답을 다 생각해 두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 아빠가 예전에 못 받았던 백작 위는 어떻게 안 될까요?”

작위야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거니까 재빨리 대답하고 있는데, 갑자기 웅성거리던 장내에 고모의 비명이 들렸다.

“뭐야? 뛰지 말라고 며칠 전부터 아르가가 그랬잖아! 야! 야!”

모든 일은 예상치도 못하게 너무나 갑작스럽계 일어났다.

아빠 역시 아연실색하여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능에 부작용이 있지는 않을텐데? 왜 미쳐서 뛰어 오고 그래? 아니, 뭐야!”

에르안이 저 멀리 뒤쪽에서 아빠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흡사 짐승처럼 뛰어오던 그는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가파른 계단에 다다라서는 아예 몸을 던져 데굴데굴 구른 뒤 아빠를 향해 몸을 날렸다.

“피하십시오!”

순식간에 굴러서 아빠에게 도착한 에르안이 함께 넘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하엘던 황자가 들고있던 단검이 아빠가 서 있던 자리를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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