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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40화 (140/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40화

에르안과 나는 귀족들이 들어가는 곳에 줄을 섰다.

워낙에 사람이 많아서 꽤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황족과 귀족 이 뒤섞인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자리니만큼 소지품 검사가 철저 했기 때문이다.

“리체, 사표 쓰고 어딜 갈 건가 했더니 메일리스 공국에 가려고 했어?”

에르안이 불쑥 물어서 나는 눈 을 가늘게 떴다.

“음....”

그랬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성년이 되던 날 밤, 술에 취해서 사표를 쓴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사표를 썼다는 사실을 에르안이 알고 있는 걸 봐서 아주 합당한 추론이 떠올랐다.

“혹시…… 제 사표……”

“어차피 그땐 내도 받아 주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먼저 폐기한 거지.”

에르안은 내 말을 가로채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가 내 사표를 없앴다는 것을 알아챈 나는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그럼 언제 받아 줬을 건데요?”

“내 마음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때까지는 어떻게든 옆에 두지 않았을까? 나는 사실 그 전에도……”

에르안과 내 대화가 좀 길어지 는 것 같자 아빠가 끼어들었다.

“혹시 여기에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공작님의 연애 감정을 물어본 사람 있나?”

아빠가 내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결국 대화는 거기서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 아 우리의 소지품 검사 차례가 되었다.

고모조차도 늘 차고 있던 검을 갖고 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아무 걸림 없이 통과될 줄 알았다.

그런데 시종이 갑자기 아빠를 붙들었다.

“아, 페렐르만 자작님. 이건 뭐죠? 1급 독인 것 같은데요.”

“이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치료용입니다.”

에르안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환각 상태에 들어가기 전에 투입해야 해서 디엘이 구해 온 것이었다.

시종은 반입 불가 물품 목록을 보여 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1급 독은 반입 불가능 합니다.”

“아니, 그래도 이건 특수 상황 인데……”

“어쨌든 반입 불가 물품이니 폐기하겠습니다.”

아빠가 항의를 해도 시종의 태도는 강경했다.

“지금까지 멀쩡했는데 별일 있겠습니까.”

뒤에 사람이 밀리는 것을 흘끗 본 에르안이 끼어들었다.

“게다가 가만히 앉아 있는 재판 정에서 호흡이 흐트러질 일이 어디 있다고요.”

“……그럼 어쨌든 주의하십시 오. 뛰거나 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아빠는 찝찝하다는 얼굴로 1급 독이 든 약병을 시종에게 건넸다.

재판정의 방청석은 이미 너무 꽉꽉 사람들이 들어차 있어서,  우리는 할 수 없이 가장 뒤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다행히 재판정 자체가 경사진 구조라 방청석의 뒷자리가 가장 높았고 재판부가 아래에 있는 형태였다.

재판 자체는 한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어……. 그러면 시간이 되었으니.”

하필이면 자신이 국정올 맡고 있을 때에 이렇게 복잡한 사안이 생겨서 난감하다는 얼굴로 황후가 일어섰다.

제이드 황태자와 젠시 공비의 친모인 그녀는 동그란 푸른 눈에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황실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관계자들부터 앞으로 나와 주길 바란다.”

그녀는 재판정 한가운데에 서서 재판 시작을 알렸다.

“하엘던 메베스 아르하이먼 황자 그리고 리체 시오니 페렐르만 영애.”

황족 좌석의 맨 앞자리에서 하엘던 황자가 일어나 원고석에 앉았다.

나 역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페렐르만 자작이 딸을 찾았다는 소문은 어느새 수도에 퍼져서, 내가 꽤 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다들 수군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사냥 대회 때 나를 본 적 있는 사람들은 ‘역시 그때 아르가 페렐르만을 닮아서……같은 말을 옆 사람과 나누곤 했다.

“사건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페렐르만 영애가 건국제 때, 이 스엘라 황자비에게 유해한 처방을 했다지?”

황후는 이 모든 일을 빨리 끝내 고 싶은지 성의없게 질문했다.

황실 재판은 그야말로 황족들이 진행하는 것이므로 딱히 정해진 형식은 없었다.

다만 원하는 귀족들이 모두 방청할 수 있었으므로 그 시선을 의식하여 적당히 진행을 하기는 해야 했다.

이스엘라 황자비는 젠시 공비의 옆에서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하엘던 황자와 분리된 채 격리 되어 있었을테니 이 모든 상황에 현실감이 없을 게 뻔했다.

“아뇨, 저는 정말 임신에 유리한 처방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유해한 처방을 했다는 증거가 있 나요?”

당연히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하엘던 황자는 당연히 평민인 내게 아무 혐의나 뒤집어씌워 센 처벌이나 내릴 의도였을 것이다.

“그 당시 제 처방 내역을 조사관님께 이미 제출하였으나, 조작의 가능성이 있어 정식 증거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모든 걸 준비해 와서 말이 청산유수였다.

하지만 하엘던 황자 측은 이제 상황을 파악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상당히 당황했을 것이다.

“그럼 하엘던 황자가 직접 소를 제기한 이유를 말해보게.”

황후의 말에, 하엘던 황자가 굳 은 얼굴로 말했다.

“황자비가 음용하던 시약에 포포리꽃이 함유된 것 같았습니 다.”

“같았다라…….증거가 있나요?”

포포리꽃은 임신을 방해하는 약초 중 하나였다.

“그런 소문이 있었고, 황자비가 먹고 있는 시약을 얼핏 보았올 때 포포리꽃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 시약을 얼핏 보고 포포리 꽃의 성분을 알아내시다니 참신한 연구 주제 감이군요. 황실 의 료 연구진의 미래가 밝아요.”

계속 그 자리에 있다면 말이지 만 말이다.

나는 살짝 비꼰 다음 재빨리 주제로 돌아갔다.

“소문이 맞는지 아닌지, 그 추론이 맞는지 아닌지는 시약을 조사하면 되겠죠. 혹시 제가 처방한 시약이 남아 있나요?”

나는 이스엘라 황자비를 향해 물었다.

둘이 감금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도 시약을 조작하여 내밀었을 텐데, 구금 중에 끌려 나왔으니 내 밀 수 있는 시약이 있을 리 없었 다.

“다 먹었지. 그래서 없어.”

이스엘라 황자비는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었지만, 어쨌든 남편의 편을 들기로 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네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속이 좋지 않았어.”

“어머.”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한 건 젠시 공비였다.

“임신 아닐까? 내가 릴리를 가졌을 때 딱 그 증상이었는데! 리체 양의 실력은 엄청나게 뛰어나니 가능성이 있어!”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속이 좋지 않다는 건 너무나 포괄적인 개념이라 딱히 임신 중상 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이스엘라 황자비는 정말로 임신이 힘든 몸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지금 알 려 줄 필요는 없었다.

“이스엘라가 착각한 것 아닐까? 리체가 좋지 않은 처방을 할 리 가 없는데.”

젠시 공비가 내 편을 들고 나섰다.

결국 이 모든 일이 피곤했던 황후가 끼어들었다.

“어쨌든 증거도 없이 소문만으로 소를 제기한 건가?”

하엘던 황자는 황후의 어조에 섞인 성가심을 읽고 재빨리 대답 했다.

“인정합니다. 제가 경솔했군요. 서로의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이쯤에서 합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자신이 계산하지 않은 상황을 얼른 덮고 싶어 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뭐, 실제로 포포리꽃을 섭취한다고 해도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니....”

하엘던 황자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관용을 베풀어, 간단한 견책 후 더 이상 일을 키우지 않고 이 재판을 마무리 짓고 싶군요.”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지 않은 채, 황후만 바라보았다.

“저도 황자비의 일에 예민해져 소문만 듣고 일을 크게 키운 점,  사과하겠습니다.”

이토록 성의 없는 사과에도 그는 모욕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페렐르만 영애에게서도 황족에게 증거가 남지 않은 약물 을 처방한 일에 대해 반성하겠다 는 간단한 사과만 들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끝까지 자존심은 지킨다고 나한 테 사과를 요구하는 꼴이 기가 찼다.

황후는 이 부담스러운 자리를 어서 끝내고 싶은지 냉큼 대답했다.

“양측에 별다른 증거가 없으니, 그것도 좋을 것 같군.”

방청석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재 판이 너무 허술하고 금방 끝났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황자 전하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이렇게 치사하게 하지도 않은 처방을 덮어씌울 줄 모르고 증거를 제대로 남기지 않은 점, 깊이 반 성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처방할때 꼭 처방 목록에 본인 서명을 받아 보관해야겠어요.”

하엘던 황자가 아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이렇게 모인 김에 다른 안건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다른 안건이라니?”

“예. 제가 혹시라도 억울한 누명을 쓸까 봐 황실 의료 연구진 에게 요청하여 황족 약물 투입 기록을 열람했는데요. 아, 저기 조사관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황족 약물 투입 기록’이라는 말 에 하엘던의 핏기 없는 얼굴이 조금씩 굳는 것을 본 나는 생긋 웃었다.

“보다 보니 조금 이상한 것이 있어서 이 자리에서 논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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