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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39화 (13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9화

독방에 갇힌 하엘던은 가만히 생각 중이었다.

이스엘라와 프릴리트 후작까지 잡혔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는 황족 전용 감옥에 홀로 구금되어 있어서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된 상태였다.

이시더 남작이 뭘 불긴 불어도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이 토록 빠르게 체포될 줄 몰랐던 그들은 모두 속수무책으로 황실 감옥에 격리되었다.

‘반란군을 급하게 궐기시킨 것이 다행이군.’

본디 계획은 산발적으로 반란군들이 일어나 제이드가 출정하면, 지병으로 병석에 누워 있는 황제 를 하엘던이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어떻게든 제이드를 황궁 밖에서 전사하게 만든 뒤 하엘던이 유일한 계승자가 되어 황위에 오를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른 시기에 의심받게 될 줄이야.

이시더 남작이 자신의 이름을 바로 댔을 리는 없는데.

세트이어스 공작령에서 언제 그렇게 많은 정보를 가지고 이토록 빠르게 심문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제이드가 출정했을 테니 시간을 좀 벌 수 있을 것이다.

제이드가 오랫동안 황궁에 돌아 오지 못하면 정무를 잘 보살피지 못하는 황후는 힘에 부쳐 자신을 일단 석방하라고 할지도 몰랐다.

조사관들은 아직 친국이 시작되지 않은 탓에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가져왔다는 증거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황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하엘던이 되니 황실 조사관 몇 명 정도야 금방 없앨 수 있었다.

혐의를 받고 있는 황족들이 머무는 황실 전용 감옥이므로 식사도 괜찮았고 호신용 단검 같은 소지품도 모두 허용이 되었다.

조금 갑갑한 것 빼고는 딱히 불편하지도 않았다.

해적 소탕에 5년이 걸린 제이드가 전투에 막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하엘던은 열심히 계략을 짜고 있었다.

“저기, 황자님.”

그래서 어느 날 밤 조사관이 왔을 때, 하엘던은 느긋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또 물을 것이 있나? 나는 아주 억울하다니까.”

그는 일관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며 주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시더 남작이 넘긴 그깟 쪽지야 조작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그럴 리 없잖아. 나는 의 료 연구진 수장 자리에 너무나도 만족하고 있어. 분명 모함이야. 나와 황태자 전하는 꽤나 사이가 좋은 형제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었나?

조사관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그 사안이 아니고……”

“그럼?”

“내일 황실 재판에 참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엘던은 미간을 찌푸렸다.

황실 재판이라면 황족이 귀족을 기소하는 것인데, 그런 일은 어지간하면 잘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대체 누가 그런 재판을 열었는데?”

“황자님이요.”

하엘던의 황당한 표정을 보며,  조사관이 물 흐르듯 말을 이었 다.

“황자님께서 며칠 전, 리체 에스텔 양을 체포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리체 양이 알고 보니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었더군요. 그래서 황후 폐하께서 황실 재판으로 절차를 변경하셨습니 다.”

“……뭐라고? 귀족?”

사냥 대회에서 자신을 단단히 망신주었던 평민 여자애가 관람탑 테러 사건에서마저 제이드를 구하자 얄미워서 이스엘라의 처방 건을 알자마자 화풀이를 한 것뿐이었다.

평민 하나 대충 혐의를 씌워 벌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뜻밖에 너무 빠르게 구금이 되는 바람에 아예 잊고 있을 정도로 별것 아닌 지시였는데…….

황실 재판?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하엘던은 기가 막혀서 입을 벌 리고 말았다.

“예, 아르가 에이트 페렐르만 자작이 찾고 있었던 딸이었다고 합니다.”

“뭐?”

제이드가 태어났올 때, 하엘던은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차기 황제 자리가 그에게 넘어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실 의료 연구진이라도 성공적으로 이끌어 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어떤 연구를 진행하든 희대의 천재인 아르가에게 번번이 밀릴 뿐이었다.

그는 그냥 그의 앞길을 막는 번거로운 것들을 치우고 싶었다.

특히 비슷한 또래였던 아르가는 수려한 외모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 무엇보다 그 나이대의 남자들이라면 모두 다 마음에 한 번씩 담았던 시오니를 아내로 두고 있었다.

2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아르가가 얼마나 싱글벙글하며 다니던지 속에서 질투심이 차 올랐다.

그 와중에 그 딸이 자신의 앞길을 방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래서 없애기로 한 것이다.

세트이어스 공작령을 미끼로 꾀어낸 로만은 워낙에 겁이 많았다.

그래서 페렐르만 자작의 딸만 없애라고 하긴 했지만, 비밀리에 시오니 역시 출산하다 죽은 것처럼 꾸밀 예정이었다.

아르가가 그토록 기뻐했던 시오니의 임신으로 모든 것이 망가져서 폐인이 되는 것을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시오니가 눈치채고 도망가는 바람에 딸이 행방불명 되었다.

어쨌든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딸을 찾아다니는 꼴로 일단 만족 했는데…….

“하, 하…… 그 애가…… 그 애 가 그 딸이라고?”

하엘던은 시야가 아찔해져서 벽 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 애 때문에 관람탑에서 제이 드가 살아남았다.

결국 그 망할 신탁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

이 모든 게 마법을 잘한다던 사기꾼 집시에게 홀려 신탁의 내용을 말해서 재수가 없어진 결과인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그래서 내일 아침이 황실 재판입니다. 기소장은 황후 페하께서 내리셨지만 실질적으로 기소하신 분은 황자님이시므로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때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하엘던이 생각한 방향과 전혀 다르게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

“리체 양!”

재판정으로 향하는 길은 북적이고 있었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반갑게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젠시 공비였다.

“안 그래도 직접 만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너무 잘 됐지 뭐야. 소식 듣고 바로 달려 왔어.”

내가 여관에서 비둘기를 날려 디엘에게 부탁한 내용은 바로 젠시 공비를 황궁으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빚이 있었던 그녀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때 그 피부병 치료제를 무료로 만들어 주다니, 생각도 못했어.”

“뭐, 이 정도야 보통이죠.”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시더 남작에게 150만 골드나 받았으니 무료로 배포해도 훨씬 남는 장사긴 했다.

“그 이후에 똑같은 치료제를 엄청난 가격에 파는 사기꾼이 나타났지 뭐야. 리체 양이 아니었더 라면 다들 재산 좀 거덜 날 뻔했어.”

“그랬군요.”

나는 그 사기꾼은 이제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면서 소식 들었어. 친부모를 찾았다며?”

젠시 공비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네. 어쩌다보니.”

“사표 쓰고 메일리스 공국에 올 줄 알았는데 아쉽네. 공작가의 주치의를 하기엔 너무 아까운 실력이잖아. 그리고 나쁜 남자한테 걸리면 도망이 답이라니까?”

“어……”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뒤에 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르안의 얼굴이 굳는 게 보였다.

“……아까운 실력은 맞죠.”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근데 그 나쁜 남자가 순정이 있기에 받아 주기로 했어요.”

“흠, 그렇구나.”

에르안의 얼굴이 다시 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나서야 나는 살짝 마음을 놓았다.

‘나쁜 남자’라고 칭한 것에 대해 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 했다.

어제 저녁에 에르안과 디엘의 대화를 우연히 들은 뒤로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하긴 끊임없이 아빠에게 거부당 했으니 당연히 불안할 것이다.

내게는 그보다 가족이 소중하다 며 담담히 말하던 그의 어조가 생각나 조금 미안했다.

재판만 끝나고 나면, 아무리 아빠가 길길이 날뛰더라도 내가 더 적극적으로 중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우리 제이드는 조금 불쌍하네. 리체 양의 신분이 바뀌었으니 황태자비로 맞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젠시 공비가 아쉽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음, 황태자비가 되면 제가 불쌍하지 않을까요?”

나는 그 말을 얼른 정정해주었다.

“그것도 그렇지. 그나저나 재판이 열린다고 해서 급하게 오긴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리체 양이 처방을 잘못할 리가 없는데, 하엘던과 이스엘라가 뭘 잘 못 안 거지?”

“아, 그래서 말인데…… 공비님. 부탁이 있어요.”

“뭔데?”

젠시 공비는 눈을 반짝이며 물 었다.

“이따가 제가 오늘 재판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은 발언을 할 거예요. 그때 한 번만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 당연하지. 있는 죄를 묻어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발언을 하겠다는데 왜 막아? 걱정 말고 하고 싶은 말 다 해. 그나 저나 정말 사람이 많네. 오랜만 의 재판이라 그런가 봐.”

다행히 젠시 공비는 흔쾌히 내 청을 수락했다.

“감사합니다.”

내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디엘 에게 부탁한 것은 황실 재판 때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디엘은 성실하계도 페렐르만 상단의 각종 인맥을 동원하여 수도의 귀족들과 종친들을 거의 다 불러 모았다.

그렇게 북적이는 와중에, 아주 오랜만에 황궁 재판이 열린 것이다.

“그럼, 이따 봐! 내가 도와주더라도 뭔가 제국이 마음에 안 드는 처사를 내린다면 언제든 메일 리스 공국으로 망명해.”

젠시 공비는 황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로 들어가며 발랄 하게 손을 흔들었다.

“네. 이따 뵐게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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