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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38화 (138/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8화

황실 재판 전날 밤, 리체와 디 엘은 여관 뒤에 있는 정원에서 대화 중이었다.

부탁한 일을 다 하고 왔다는 디 엘의 보고가 끝난 후에, 리체가 반말을 쓰라고 몇 번 권하자 디 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말했잖아요. 저는 자존심, 우정, 추억 뭐 이런 것보다 하루하루의 평온한 안위가 중요한 사람이랍니다.”

리체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여도 그는 전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정 그렇게 옛 우정이 그리우시 다면 돈으로 표현하시라니까요. 페렐르만 자작가의 외동딸이시잖 아요?”

“내가 불편해서 그래. 그럼 단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반말을 쓰 면 안 될까? 우리는 신분 여부를 떠나……”

“아, 신분에 그렇게 자유로우신 분이 아직도 연인에게 ‘공작님’이 라고 부르면서 꼬박꼬박 존대하 세요?”

디엘의 일침에 리체는 흠칫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한때 같은 소심한 평민이었던 처지에,  서로 이해해 줍시다. 네?”

“……친구의 부탁인데.”

리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자 디엘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 진정한 친구 덕분에 가족도 찾았는데.”

“.............”

“함께 친구로 지내면서 해결한 사건들이 얼만데……”

리체의 천연덕스러운 혼잣말에,  결국 그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단둘이 있 는 걸 알면 난 자작님과 공작님 께 경을 칠걸.”

“공작님은 그렇다 치고, 아빠는 왜?”

“아무리 나라고 해도 딸이 남자 와 단둘이 있는 꼴을 못 보실 것 같아. 그러니까 단둘이 있을 일 도 없다고.”

“그럼 이렇게 하자.”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기에,  리체는 어깨를 으쏙하며 결국 최 종적인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냥 말꼬리를 흐려. 그럼 되 지?”

디엘이 잠시 생각하는 눈빛을 해 보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 였다.

“뭐,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 고……”

“훨씬 낫다. 네가 존대하니까 이상하게 너무 불편하더라. 거리 감 느껴져.”

“사실 나도 뭐, 그렇다고 생각 하긴 했지만...”

“그래. 어쨌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내일 재판 때 너도 올 거지?”

“당연히 구경 가고 싶어서, 페 렐르만 자작님의 하인 신분으로 갈 생각이긴 한데……”

디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화 를 나누다가 홈칫 놀라 말을 이 었다.

“시간이 꽤 됐는데 이제 들어가 는 게 좋지 않을까……. 자작님 이 찾으실지도 모르고……”

“알았어, 알았어. 난 이쪽으로 갈 테니까 넌 반대쪽으로 돌아 가.”

리체는 킬킬거리며 웃더니 미련 없이 돌아서서 사라졌다.

그녀의 긴 갈색 머리가 사라지 는 것을 보고 나서 디엘이 휘파람을 불며 반대편 모퉁이를 돌 때였다.

그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을 느 끼며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있는 서늘한 인상의 남자를 발견한 탓이었다.

“고, 고, 공작님……. 어, 어, 언 제부터 여기에……”

리체와 단둘이 있었다는 것 때 문에 디엘은 지레 겁을 먹었다.

에르안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그 는 횡설수설하며 공손하게 두 손 을 모았다.

“저는 그러니까…… 아가씨가 불러서, 그러니까……”

“디엘 몰레킨,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돼.”

“……네?”

“난 새사람이 되기로 했으니까.”

“왜죠?”

디엘은 명하니 물었다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죄송합니다. 질문이 멍청했습니 다.”

“페렐르만 자작이 나를 리체의 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서. 나 같은 개차반에게는 딸을 줄 수 없다더군.”

에르안이 예상외로 성실하게 대답하자 디엘은 새사람이 되겠다는 그의 말을 조금은 믿어 보기 로 했다.

“그래서 앞으로 모든 사람들에 게 리체를 대하는 것의 반의반의 반만큼은 대하기로 했어.”

“세상에……”

디엘은 숨을 들이결 정도로 놀 랐다.

“정말 과분한 대우입니다, 공작님.”

그동안 에르안은 그를 상대로 이렇게 정상적으로 말을 걸어 준 적이 없었다.

디엘은 지금까지 그저 말없이 그를 쏘아보는 에르안밖에 기억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말인데.”

“예, 말씀하십시오.”

“페렐르만 자작이 좋아하는 게 뭐지? 지금까지 계속 말도 잘 듣 고 암전히 굴었는데 여전히 나를 보는 눈빛이 좋지 않아. 혐오하 는 눈빛을 받을 때마다 아주 심 장이 철렁철렁 떨어져. 영원히 그럴까 봐.”

“아…… 자작님은 좋아하는 게 별로 없으십니다. 싫어하는 건 엄청나게 많지만.”

예를 들어 딸에게 집적대는 남 자라든가.

이런 말을 가까스로 삼킨 디엘이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모르긴 몰라도 자작님의 환심 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실 듯합니 다. 아마 그 눈빛은 영원하실 거 예요.”

디엘은 무서워서라도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주고 싶었지만 아무 리 생각해도 방법을 찾을 수 없 었다.

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답을 내 놓았다.

“공작님께서는 사실상 자작님과 계급 차이가 많이 나십니다. 리체 아가씨도 공작님올 좋아하시 는 이상, 조금만 강압적으로 구 신다면 아가씨를 요구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고 생각하는데……”

“리체는 가족들을 더 소중히 생 각해.”

에르안의 단호한 말에 디엘은 잠시 멈칫했다.

대답은 짧았지만 그의 어조에 이상한 체념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닙니다. 리체 아가씨는 분명……”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디엘은 문득, 에르안이 그와 리체의 대화를 다 들었음을 알아챘 다.

[내가 불편해서 그래. 그럼 단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반말을 스 면 안 될까? 우리는 신분 여부를 떠나……]

[아, 신분에 그렇게 자유로우신 분이 아직도 연인에게 ‘공작님’이 라고 부르면서 꼬박꼬박 존대하세요?]

리체는 거짓말이나 마음에 없는 빈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 으면 아르가에게도 ‘아빠’라고 부 르지 못하고 ‘페렐르만 자작님’이 라고 부르던 리체였다.

새로 찾은 가족들은 그녀에게 할아버지, 고모, 아빠인데 그는 여전히 리체에게 ‘공작님’이었다.

편한 상대인 디엘에게조차 신분 여부를 떠나 상호 반말이 편하다

고 했으면서 정작 연인인 에르안 에게는 명확한 선올 긋고 있었 다.

리체가 그를 좋아하고, 남자로 서 짙은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 은 분명했다.

그러나 감정의 크기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건 옆에서만 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에르안은 꽤나 멋지고 잘생긴 남자, 어릴 때의 다정한 추억이 있는 고용인, 다정하고 의지가 되는 든든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똑 부러지는 그녀가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정말로 간절한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에르안은 이미 자신이 그녀의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디엘은 이어지는 침묵에서 에르 안의 깊은 씁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 혼자만 사랑해도 괜찮아. 곁에 둬 준 것만 해도 황송하지.”

디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에르안은 자신이 아직 리체에게 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는 것, 고백할 때 준 다이 아몬드 반지가 여전히 그녀의 손 가락이 아닌 연구실 책상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까지는 디엘 에게 말하지 않았다.

“페렐르만 자작의 태도가 며칠 이 지나도 한결같으니 걱정이야. 리체에게 받는 건 호감이어도 충 분해. 나머지는 내가 다 채워도 되니까.”

“하지만........”

디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통스럽지 않으세요? 사랑의 확신이 없는 미적지근한 상대를 위해 끊임없이 모욕을 참아 내고 매달려야 하는 게.”

평소에 볼 수 없는 에르안의 쓸 쓸함에 그새 동화되었기 때문에, 디엘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오죽 답답하면 평민인 자신에게 아르가가 좋아하는 걸 물었을까.

“이 상태라면 아무리 곁에 둬도 외로우실 것 같은데요. 사랑이라는 게 당연히 보답을 바랄 수밖 에 없는 감정이잖아요.”

디엘의 감성적인 말에도 에르안은 많은 감정을 숨긴 채로 낮게 읊조릴 뿐이었다.

“……내가 더 잘하면 돼.”

아르가의 반대에 대한 해결책을 알아내지 못했으니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가 없었다.

그는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뗐다.

에르안은 깜짝 놀랄 만큼 멋진 외모와 위압감을 자랑하는 커다란 풍채를 가지고 세상 모든 것 에 무심한 것 같은 표정올 지었다.

그러면서도 리체 앞에서는 어린 짐승같이 굴었다.

디엘은 그 모습을 항상 신기하 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짙은 눈썹 밑에 자리 잡은 서늘한 눈매에서 나름의 괴로움을 읽었다.

“뭐, 조금만 더 다가와 준다면 좋아서 미쳐 날뛸지도 모르겠지만.”

던지듯이 중얼거려 놓고 에르안은 휘적휘적 걸어 자리를 떴다.

디엘은 저 덩치에 미쳐 날뛰는 것도 큰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두 남자는 눈치채지 못 했지만, 머리끈을 놓고 온 것 같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리체가 모퉁이 뒤에서 못 박힌 채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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