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7화
어차피 내가 잘 보이지도 않았 을 텐데 언제부터 시선을 고정하 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예뻐.]
내 생각을 어떻게 읽었는지 손가락이 또 빠르게 움직였다.
[잘 안 보여도.]
다정하면서도 한결같은 시선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살짝 몸이 굳었다.
[어디에 있어도.]
세상에 촉각이라고는 내 손바닥 에만 존재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느릿하지만 분명한 손가락의 움 직임을 해석하는 내 숨이 살짝 떨렸다.
아무리 연인이 됐어도 예전에 줄기차게 유혹해 대던 가닥은 변하지 않은 듯했다.
[사랑한다는 말이야.]
거기에 또 내가 넘어가는 것까지.
내 손바닥에 간질거리는 그의 손가락이 좋아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살짝 웃었다.
[네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해도 결혼하지 못하면 어쩌지.]
에르안은 꼼지락대며 손바닥 위 로 글씨를 적었다.
하긴, 내 친부가 밝혀지기 전만 해도 결혼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자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 럼 기뻐했었다.
그 행복이 현실이 되기 바로 직 전에 자신의 업보로 인해 깨져 버렸지만.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와 쉽게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는 처 지였다.
[그럼 정말 죽을 것 같은데.]
끈질기게 아빠에게 거부당하면 서 쌓아 온 불안감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아빠가 견고하자 내심 초조한 것 같았다.
[나도 나를 어쩔 줄 모를 정도 로 너를 사랑해.]
뒤에서 우리의 필담이 이어지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고모는 팔짱을 끼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 다.
“딸이면 유리…… 유리아? 유리안느?”
충분히 행복한 오후였다.
나는 그날 저녁부로 당당히 페 렐르만 자작가의 호적에 올랐고, 황후의 인장이 찍힌 황실 재판 기소장이 날아온 것은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
디엘이 열심히 수집해 온 정보 에 따르면, 조사관들이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온갖 증거를 들고 돌아가 일단 하엘던 황자 내외를 각각 구금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산발적으로 일어난 반란 군 때문에 제이드 황태자가 딱히 처리를 하지 못하고 급히 출정하 게 되었다.
하엘던 황자는 ‘모두 다 이시더남작이 세르이어스 공작령을 차지하려다 실패하니 엄한 사람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라며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했다.
자세히 증언해 줄 케인즈 경조차 제이드 황태자를 따라 출정했다.
그러다보니 친국은 계속해서 연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황제는 여름 사냥 대회 이후 몸 져누워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하엘던 황자가 모든 정무를 맡아 보아야 할 테지만 구금된 상태라 어쩔 수 없이 황후가 정무 대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젠시 공비와 제이드 황태자의 친모인 황후는 착하고 온화한 데다 정사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 요즈음 매우 힘들어한다고 했다.
“역시 황실 재판의 결정권자는 황후 폐하라는 뜻이군요.”
기소장에 황후의 인장이 찍혀 왔을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다.
황후의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 자기 하엘던 황자의 체포 명령을 알게 되었을 터다.
이 사건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중간에 일이 복잡해지자 밸론이 설명한 절차대로 날 일단 기소한 게 틀림없었다.
황실 재판 날짜는 3일 후로 잡혔다.
황족이 귀족을 기소하는 것 자 체가 아주 오랜만의 일이라 수도 에 소문이 순식간에 돌았다.
나는 재판이 잡히자마자 나를 변호하기 위해 공식 기록을 살펴야겠다며 황실 의료 연구진에 자 료 열람 신청서를 제출했다.
당연히 황실 의료 연구진 측에 서는 절차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빠, 같이 가요.”
“그래야지.”
지난 밤, 내가 내 계획을 설명 하자 아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하엘던이 자기 무덤 을 팠구나.’라고 중얼거렸다.
“괜찮으시죠? 나쁜 기억만 있어서 가기 싫으시다거나, 그런 건 아니시죠?”
“글쎄. 하엘던 황자와 반목하는 건 좀 힘들었지. 그래도 나보다 는 부족하지만 어쨌든 유능한 인 재들과 의학 연구를 하는 건 즐 거웠어.”
아빠는 회한에 젖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워낙에 박애주의자라, 인류를 위해 연구한다는 사명 의식 도 있었고 말이야.”
아빠는 조금이라도 싫은 일이라면 할 성격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도 엄마의 죽음 직전까지 연구진에 있었던 것을 보면 분명 히 적성에 맞았던 것이 틀림없었다.
19년 만에 처음으로, 아빠는 나 와 함께 황궁 안에 위치한 황실 의료 연구진의 실험실에 당당하 게 걸어 들어갔다.
물론 재판에 참여하는 조사관 한 명과 늘 상태를 지켜봐야 하는 에르안도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리체 시오니 페렐르만입니다.”
나는 넓고 화려한 실험실에 들 어갔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 라보는 연구진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소식 들으셨죠? 제가 황자비 전하에게 유해한 약물을 처방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황족 약물 처방 기록 좀 볼게요.”
[황실의 모든 이들은 복용한 모든 약물을 기록하는 것이 원칙입 니다. 황실 의료 연구진에서 처 방한 것을 포함해서요. ]
사냥 대회 때, 황실 의료 연구 진의 대표로 나선 나탈리를 이겼던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불편한 시선 속에서 나는 산뜻 하게 말을 이었다.
“슬프게도 제 처방은 비공식적인 거라서 기록이 남지 않았거든 요. 혹시라도 연구진에서 처방한 것이 문제를 일으켰을 수도 있잖아요?”
“지금 저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저도 의심받고 있는 걸요. 억울해하지 마세요.”
그들이 어이없다는 둣 혀를 찼 지만 대놓고 짜증을 내지는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 뒤에 서 서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에르안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 다.
“어쨌든 기록 열람은 제 권리잖아요. 맞죠?”
연구진의 책임자인 하엘던 황자가 구금 중이었으므로 연구진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우리와 함께 온 조사관 역시 절 차가 그게 맞는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눈치만 보며 머뭇거리다가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필요한 기록올 말씀해 주시면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그럴 필요 없어. 알아서 볼 수 있으니까.”
그때 아빠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원래 이 캐비닛에 보관해 두었는데……”
아빠는 거침없이 가장 왼쪽의 커다란 캐비닛을 열었다.
그 안에는 문서철들이 연도별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역시 변하지 않았군.”
“잘됐네요. 아주 옛날의 처방도 지금 영향을 끼쳤을 수 있으니까, 옛날 것도 다 볼게요.”
나는 아빠가 연구진을 나간 이 후의 문서철부터 빼냈다.
과연 모든 황족에게 처방한 약 물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20년 전의 처방이 이제 와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 하며 우리 앞을 막아선 연구진에 게 한숨을 쉬어 보이며 말했다.
“연구진이 저희 부녀의 의학 실력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는 건 사냥 대회 때 중명한 것으로 압니다만.”
“.............”
“재수 없는 건 아는데, 저도 좀 절실해서요. 미안해요.”
간단히 입을 다물게 한 나는 아빠와 함께 아주 옛날 자료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황족이 약물을 처방받은 기록은 관계자 외에는 당연히 열람이 금지되는 자료였다.
하지만 황실이 기소한 재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공식적인 자료를 모두 열람할 수 있었다.
그만큼 황실이 귀족을 기소할 때에는 커다란 위험 부담을 안기 때문에 정말로 중요한 사안에 대 해서만 해야 했다.
황후는 딱히 걸릴 게 없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허가해 줬을터다.
하지만 만일 하엘던 황자가 이 일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황실 재판에 나를 기소하지 않았을 게 뻔했다.
‘내가 귀족이라는 걸 생각도 못 했겠지.’
그저 사냥 대회 때의 화풀이용 으로 나를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예상도 못 했을 것이다.
에르안을 경고용 병풍처럼 세워 두고 찬찬히 기록을 살피던 아빠 와 나는 어느 순간부터 기록을 넘기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기 시 작했다.
나는 재빠르게 문서철 몇 권을 분류하여 조사관에게 참고 자료로 넘겼다.
그리고 아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또 거침없이 한 캐비닛을 열었다.
그리고 보고서 하나를 찾아 조 사관에게 넘겼다.
“이것도 부탁하네.”
곧 있을 재판에서 증거 자료로 모두의 앞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결국 이렇게 내 손으로 끝내고 마는구나.’
제이드 황태자가 처형할 것이라 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깔 끔하게 처리해야 할 운명인 듯했다.
다소 서글폈지만, 어쨌든 일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모든 것이 신탁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