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6화
아빠와 고모, 에르안까지 한 번 씩 바라본 디엘은 왜 자신을 이 사람들 속에 불렀냐는 듯한 원망 의 눈빛을 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듣더니 재빠르게 여관을 나가 버렸다.
아빠는 호적 신고를 하러 가면서도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을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에르안의 상태를 계속 봐야 하므로 아빠를 대신해 내가 곁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슨 계획인지는 다녀와서 들으마. 하지만 황실 재판이라 니…. 리체, 네가 위험한 건 싫 은데.”
“저는 페렐르만의 유일한 후계 자잖아요.”
나는 당당하계 말했다.
“제가 위험한 일은 안 해요. 걱 정 마세요.”
유일한 후계자가 사라졌을 때 영지가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는 지 잘 알고 있는 나는 무조건 나 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참 이었다.
‘생각해 보니 언제나 그렇긴 했 지만.’
게다가 페렐르만 가문이 가진 돈이 얼만데. 절대로 위험해질 수 없었다.
“아직 제대로 된 복수도 못했다 고요. 엄마는 어느 농가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셨는데, 아직 하엘던 황자의 끝도 못 봤어요. 저 그 꼴 볼 때까지는 무조건 무사 히 있을 거예요.”
“하긴…… 리체는 자기 몸 하나 는 기가 막히게 잘 사리긴 해.”
고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 다.
아마 승전 연회 때 에이비크 자작에게 달려들려던 고모에게 날 끌어들이지 말라고 했던 말을 기 억하는 듯했다.
“그래, 리체. 그리고 아직 제대 로 된, 마음 편한 데이트도 못했는데”
에르안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에르안이 회복하고 나서 친자 검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연인답게 함께 있었던 적 이 없었다.
우리가 건국제 밤에 올랐던 수 도 언덕이 마지막 데이트였다.
새삼 수도에 오니 그때의 기억 이 생각나 볼을 붉힐 때였다.
“평생 못할 줄 아십시오. 내 딸 옆엔 항상 내가 있을 테니까.”
에르안의 말에 아빠가 즉시 도끼눈을 뜨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에르안이 아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누그러트릴 때까 지는 마음 편한 데이트가 힘들 것 같았다.
“몸이 완전히 추위에 적응할 때 까지는 공작님도 무리하지 마세 요. 특히 호흡. 주의하세요.”
나는 백 번은 더 한 말을 걱정스럽게 반복했다.
“내가 전력을 다해 뛰거나 해서 호흡이 흐트러지면 어떻게 되는데?”
“바로 환각 상태에 들어가셔서 깨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빠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옆에 붙어 있던 고모가 놀라며 반문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혹시라도 환각 상태에 넘어가면 다시 깨기 어려워. 아예 그 전에 1급 독극물로 모든 걸 봉인 한 다음 해독하는 게 나아.”
“1급 독 해독은 쉬워?”
“쉽겠냐? 1급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 귀에 저주 걸렸어?”
“그러는 네놈은 입에 저주 걸렸냐?”
에르안도 나도 외동이라, 아빠 와 고모의 시도 때도 없는 시비가 낯설었다.
1급 독 해독이야 아빠 말대로 쉬운 건 아니었지만, 나와 아빠의 실력이라면 며칠 고생한 후 결국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디엘보고 1급 독을 가져오라고 해야겠군. 혹시 모르니 지니고 있는 게 좋겠다.”
“네. 그래도 공작님이 주의하시 는 게 제일 좋죠. 물론 저는 더 한 독도 해독했지만 말이에요.”
나는 드디어 완벽히 성분을 알게 된 문제의 과자를 떠올리며 생색을 냈다.
“그런데 아빠, 약을 독으로 만드는 게 아무리 어렵지 않다고 해도 완벽한 효과를 내기 위해서 는 상당히 많은 시행착오가 있지 않았을까요?”
“당연하지. 공작님께 주입한 독 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개량한 거야. 그때까지 시간 좀 걸렸을 거 다. 일부만 효과가 있거나, 어느 한쪽으로 쏠려서 이상한 효과를 일으키거나 하는 수많은 아류가 있었겠지. 게다가 그때 공작님 나이가 어렸잖아.”
아빠는 눈앞에서 자신의 연구가 악용되었다는 것에 분노를 느끼 는 듯했다.
“그런 류의 모든 독은 어릴수록 잘 먹히니까. 하여간 미성숙한 어린애들한테 나쁜 짓하는 어른들이 제일 혐오스럽지.”
“그건 그래요.”
“그래서 어린 시절, 주치의한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 공작님도 문제 삼지 않는 겁니다.”
웨데릭이 몰래 과자를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빠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그 외에 증상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아빠는 딱히 비난하지 않았다.
아빠가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것 은 성인이 된 에르안뿐인 것 같았다.
“어쨌든 제가 다녀올 동안 리체 곁에 있되 옆에 있지 마십시오. 세이린, 네가 잘 지켜라.”
“알았으니 꺼져.”
“얼른 호적에 올리고 싶어서 가 는 거다. 이번에도 딱히 네가 꺼 지라고 해서 꺼지는 계 아니야.”
아빠는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나서 몇 번올 연신 에르안올 노려보더니 여관을 나섰다.
바람을 쐬고 싶다는 내 의견을 받아들여, 고모는 정원 밴치에 나와 나란히 앉았다.
곁에 있되 옆에 있으면 안 되는 에르안은 어쩔 수 없이 고모의 옆에 앉게 되었다.
그래서 나, 고모, 에르안 셋이 나란히 앉아 있게 되었고, 나는 그나마 공략이 제일 쉬운 것 같 은 고모에게 살살 말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고모, 공작님께서 새사람이 된 다는데……. 이번 일로 도움도 많이 받았고 영지도 덕분에 안전 히 지킬 수 있었는데……”
“흥, 껍데기 때문이잖아. 안 그 래?”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대꾸했 다.
“물론 외모도 맘에 들긴 하는 데, 어릴 때 쌓았던 정도 있고…… 둘이 있으면 심장이 막 두근거려요. 좀 이상한 건 사실 이지만 믿음직스럽기도 하고요. 제가 힘들 때 위안이 되어 주기 도 한 사람이에요.”
에르안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이 마를 짚었다.
고모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런 말을 듣고도 리체에게 다 가갈 수 없는 현실이 좌절스러워 서요.”
“그 어떤 남자도 리체에게 다가 갈 수 없을 테니 억울해하지는 마시죠.”
고모의 말에 내가 새침하계 대 답했다.
“싫어요. 전 결혼은 할 거라고요”
“아니, 우리에게는 사위 같은 건 필요 없어. 너 하나면……”
“그리고 자식도 낳을 거예요. 딸 하나, 아들 하나.”
그 말에 고모가 입을 딱 다물었 다.
그러더니 고뇌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기 시작했다.
“아…… 젠장……. 너무 귀여울 것 같아……. 어떡하지?”
“장난 아니게 귀여워요.”
“넌 왜 본 것 같이 말하냐?”
“저랑 공작님의 아이라고 생각 하고, 외관만 떠올려 보세요.”
“아아아아악! 너무 보고 싶어! 이럴 수가!”
괴로워하는 것은 고모뿐만이 아니었다.
에르안 역시 참담한 표 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고문을 받는 것 같은 에르 안을 달래기 위해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고모, 죄송한데…… 아니, 죄송 한 건 아니고…. 공작님 손 좀 잡고 있어도 돼요? 제가 불안해서 아빠 올 때까지는 계속 마력을 확인하고 싶어요.”
“내 눈앞에서는 절대 안 돼.”
고모는 내 초조한 듯한 목소리에 잠시 동요되는 것 같았지만, 결국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저 었다.
“아르가 놈한테 시달리는 건 싫 으니까.”
그 말에 냉큼 대답한 사람은 에르안이었다.
“네, 고모님. 그럼 뒤로 잡겠습니다.”
고모의 둥 뒤로, 에르안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고모는 질색을 하며 짜증을 내 려다 혼자서 ‘조카 손녀…… 조카 손자…… 리체 꼬마 버전 ……’같은 말들을 중얼거리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손을 잡으려는 핑계이기도 했지 만 어쨌든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평상시와는 다른 마력의 흐름을 살피고 있는데, 에르안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내 손등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함께 행복해 보여서]
그러고 보니 지난번 그가 여관 방에 찾아온 이후 둘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때도 한가로이 말을 나누기에 는 그가 너무 급해 보여서 별다 른 대화도 하지 못했다.
[다행이야.]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함이 울 렁거리기 시작했다.
비록 서로서로는 아직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가 사랑 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음…… 아들이면 아드리안? 아, 안 돼. 아르가의 ‘아’ 자가 들어가니까. 그럼 니드리안? 세드리안? 내 ‘세’ 자가 들어간다고 아르가 놈이 싫어하겠지?”
고모가 예쁜 아기들의 이름을 혼자 옮고 있는 동안, 에르안은 조용히 뒤에서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번에는 나랑]
멀리 보이는 번영한 수도의 전 경은 여전히 화려하고, 낯선 정원은 아름다웠다.
[행복해야 돼.]
싸늘한 가을바람이 청량하게 느 껴지는 오후였다.
분명 큰일을 앞둔 심각한 상황 인데, 한가롭게 구름이 지나가는 짙푸른 하늘마저 꿈결 같았다.
[데이트하자는 말이야.]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 것까지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둣이 고모가 절묘하게 각도를 가리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움직여 바라본 그 의 눈이 곱게 접혀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