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5화
제이드는 반란군이 장악한 영지 마다 단숨에 함락시키며 ‘수전에만 강할지도 모른다.’는 반란군들 의 희망을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그가 전술이고 뭐고 없이 무심 한 표정으로 혼자 달려들어 적진을 초토화시키면 나머지 황실 기 사단이 뒷정리를 했다.
해적 소탕에 5년이나 걸린 것은 해적들이 자꾸 숨어서라는 사실이 밝혀졌올 정도로 그는 전투에 있어서는 가히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다 질 텐데 왜 덤비지?’ 라며 산뜻하게 웃어 보여야 할 그는 측근들이 놀랄 정도로 고통 스러운 표정이었다.
“으아아아아아!”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시체들이 쌓여 갔지만, 그는 뿌듯한 내색 한 번 보이지 않고 내면의 고통 에 몸부림을 치는 것 같은 괴성만 질러 댔다.
“으흐으윽!
[아, 케인즈 경 왔어? 조사관들은 잘 돌아왔고? 리체 양의 대답은 가지고 왔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일단 리체 양은 전하가 아닌 세르이어스 공작이 좋다고 하십니다]
[...........뭐?]
[그리고......전하께서 다섯 살 때 반출 시키신 마법의 돌로 인해 리체 양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같습니다. 드릴 말씀이 너무 많 습니다. 일단 조사관부터 만나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당장 하엘던 황자 내외분과 프릴리트 후작을 감금하십시오. 세르이어스 공작가의 제보와 증거가 있었으 니까요. ]
그 이후 더 자세한 사정을 알아 보기 전에 반란군이 산발적으로 궐기하면서, 제이드는 일단 모든 것을 보류한 채 전장으로 나온 상태였다.
물론 그의 예상대로 반란군들은 단박에 몰살당했지만, 다섯 살 때의 자신 때문에 리체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나는 이제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떳떳하지 못하게 되었어.”
미친 사람처럼 날뛴 뒤 초토화 된 전장을 숙 훌어보고, 다음 반란군의 영지로 떠나며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리체 양이 이 모든 것을 밝혀 주었는데! 나는…… 바보같 이……”
제이드를 만났다 하면 죄다 박 살나서 모조리 교수형을 당하는 꼴을 봐서 그런지 반란군들이 일 어나는 영지들은 순식간에 줄어 들고 있었다.
심지어 하엘던마저 예상치 못하게 감금되었으니 몸을 사리는 영주들이 많았다.
한참 동안 준비했던 반란은 전투의 귀재인 제이드 앞에서 너무 나 쉽게 무너졌다.
아무리 오랫동안 기반을 다져 왔어도 모든 싸옴에서 족족 지면 답이 없었다.
여러모로 반란의 싹을 쉽게 밟으며 간단히 진압하고 있는 상황 이지만, 제이드는 비련의 주인공 처럼 흐느끼고 말았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야! 내가 무슨 자격으로 리체 양을! 아아…… 왜 우리는 사랑할 수가 없는 건데! 왜!”
매번 전투에서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오지만, 거칠한 얼굴로 괴로 워하고 있는 제이드를 바라보며 케인즈는 딱히 그것 때문에 리체가 그의 마음을 거절한 건 아니
라고 말했지만 그의 어두운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어쨌든 상황은 변하지 않아, 케인즈 경.”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한 숨을 쉬었다.
“그래도 위로 고마워.”
위로가 아니라 사실 적시라고 말하려다가, 케인즈는 그의 슬픈 푸른 눈을 바라보며 입올 다물었다.
“정말로…… 정말로 형님의 짓일까. 나는 믿기가 어렵군. 얼른 다 정리하고 돌아가서 보고를 제 대로 받아야 생각이 정리가 될 것 같아.”
호의로 가득 찼던 제이드의 아름다운 세상이 깨지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음직인다. 얼른 황궁으로 돌아가 직접 심문을 해야겠어.”
“여, 여기서 더 빨리요?”
바로 말을 달리기 시작한 제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황실 기사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그래서 앞으로는 어떡할 예정 이지?”
수도에 도착하고 나서 에르안이 비뚜름하게 웃으며 묻자, 벨론은 그의 눈을 슬슬 피하며 대답했다.
“원래는…… 음, 즉시 체포인 데다가 평민이니 일단 감옥에 구 금하고……”
“음, 문제 하나 내지.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 벨론 경은……”
에르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비 웃듯이 말했다.
“계속 지껄여야 할까, 아니면 일단 정숙을 지키는 게 좋을까?”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어조에 벨론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수도에는 하엘던 황자 내외와 프릴리트 후작이 관람탑 테러 사건으로 구금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테러의 증거는 조작할 여지가 충분한 쪽지 한 장뿐이고, 본인들이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대다수는 모함이라고 생각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관람탑 사건에서 하엘던 황자도 다리를 크게 다쳤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제이드 황태자는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도 멀쩡하여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있구나.’
다른 여러 가지 증거를 세르이어스 공작령에서 보냈으나, 지금 심문을 진행할 당사자인 제이드 황태자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반란군 진압에 나섰으니 심문은 모두 다 정지된 상태였다.
‘어차피 쉽게 다 이기고 금방 오겠지, 뭐.’
상당한 전력과 영토를 가진 세 르이어스 공작령도 단숨에 함락 해 버리던 남자였다.
별다른 전략도 없이도 익숙하지 않은 지형에서 수전을 5년 만에 끝낸 사람이니 익숙한 지역에서 의 지상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반란군이 정말로 성공하려면 전쟁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제이드 황태자를 어떻게든 없애야 했었다.
물론 그 시도를 안 한 건 아니 었겠지만.
“그래, 잘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지. 아주 말이 잘 통하겠군.”
에르안이 씩 웃어 보이며 오만 하게 말했다.
벨론의 입장에서는 평민을 잡아 오라고 시킨 황족이 구금되어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명령을 내린 황자는 연락조차 할 수 없이 멀리 있었고,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인상의 세로이어스 공작은 너무 가까웠다.
“수도의 가장 좋은 여관을 통째 로 빌려서, 우리 모두 거기 머물도록 하지. 일단 리체의 호적 둥 록부터 하고 다시 정식 절차를 밟아.”
힘 있고 돈 있고 그걸 또 잘 이 용할 줄 아는 사람이 내 편이라 는 것은 참 든든한 일이었다.
아빠 역시 에르안을 잡아먹을둣이 노려보면서도 발언 하나하나가 마음에 드는지 가만히 고개 만 끄덕이고 있었다.
“정식 절차라면……”
“황자도 구금 중이고…… 중간 에 증거 불충분으로 흐지부지될 수도 있겠지. 넌 어쨌든 수도까 지 데리고 왔으니 할 일은 다 한 셈 아닌가?”
물론 나는 아주 결백했지만, 마 치 권력으로 범죄를 은폐하는 현 장에 있는 것 같아 아득해졌다.
“황자비 몸에 이상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 멍청한 황실 의료진이 고쳐 내지 못하는 증상 도 해결해 줄 테니. 리체에게 이 상한 혐의 씌우지 말고.”
“여하튼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 리체를 잡아가려는 놈은 내가 다 묻어 버릴 줄 알아.”
아빠와 고모도 이를 갈며 한마디씩 보탰다.
나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벨론을 보며 이상하게 디엘이 떠올랐다.
“아녜요, 밸론 경.”
그래서 조금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명명백백히 밝혀야지요. 저는 정의로운 성격이라.”
“아……”
감동받았다는 밸론의 얼굴을 보 며 나는 싱긋 웃었다.
“다만 저는 당연하게도 제가 잘 못했다는 생각을 안 하거든요. 그래서 얌전히 체포당해 줄 생각 은 없고요. 이 모든 사실을 이참 에 잘 밝혀 보자고요. 제 호적이 등록되면 바로 황실 재판에 회부 시켜 주세요. 합리적인 절차, 맞죠?”
평민이라면 황실 재판에 서는 일 없이 그저 약식으로 처형당해도 할 말 없었지만, 내가 귀족인 이상 황실에서 내 잘못을 물으려면 정식으로 기소하는 수밖에 없 었다.
황실 재판은 직계 황족들은 물 론 종친과 대귀족, 열람을 원하 는 다른 귀족들까지 참석할 수 있었다.
꽤 큰일이었기 때문에 황실 재판은 자주 있는 사건이 아니었 다.
하엘던 황자도 나를 체포하라고 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저는 변호권을 사용할 수 있고요. 그에 따라 정식적인 절 차를 밟아 자료 열람을 요청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예전에 황실 연회에 초청을 받 아 참석할 때, 이사벨 마님이 열 심히 귀족 교육을 시켜서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이사벨 마님은 내가 황태 자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온갖 제도 및 교양을 열심히 가 르쳤다.
물론 그 가르침을 모두 다 흡수한 내 역량이 대단했지만.
“그, 그건 그렇죠.”
벨론은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 몰랐는지 얼굴이 흙빛이 되었 다.
하지만 내 말에 틀린 건 없었다. ‘평민을 체포하라’는 기존의 명령을 ‘귀족을 기소하라’고 치환하는 데에는 딱히 모순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일처리를 그렇게 해 주세요. 오늘 아빠가 호적 등록을 해 주실 테니, 내일이면 제가 기소 장을 받아 볼 수 있겠죠?”
밸론이 한숨을 쉬며 알겠다고 대답하고 돌아설 때, 말을 타고 달려와 우리 앞에 선 사람이 있 었다.
헐떡거리며 달려온 그는 재빠르 게 말 위에서 내려 에르안과 아빠에게 예를 표하고 멋쩍게 뒤통 수를 긁었다.
“때맞춰 잘 도착했어, 디엘.”
나는 환히 웃으며 흐트러진 머 리카락을 가다듬는 디엘의 앞에 서려다가, 에르안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하고 난 뒤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도 내 가까이 못 오는데, 다른 남자와 더 가까이 있는 꼴 은 보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그대 로 읽혔다.
디엘 역시 내가 가까이 오는 것 을 바라지 않는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저, 저는…… 음, 아가씨가 불 러서요.”
“아가씨라니, 그냥 반말 써도 되는데. 그동안 계속 친구로 지냈잖아!”
“저는…… 가늘고 오래 살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우정을 증명하 고 싶으실 때 돈으로만 표현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음. 보통 이럴 땐 내 마음은 다 알고 있으니 우정을 굳이 표 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나?”
“지난번 월급의 500% 보너스를 받으니 제 자신이 얼마나 자본에 나약한지 알 것 같더라고요. 처음엔 우정으로 시작했지만 결론적으로 돈맛을 보니 보람이 더 넘칩니다.”
내가 딸인 것이 완전히 밝혀지 고 나서, 아빠는 디엘에게 더 큰 돈을 지급했다고 들었다.
어쨌든 이 화제에 대해서는 나 중에 아빠와 에르안이 없을 때 다시 합의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내가 비둘기로 보낸...........”
“당연히 부탁하신 대로 다 처리 하고 왔죠.”
“그리고 또 부탁할 것이 있는 데, 일단 여관에 자리 잡고 얘기 하자.”
“네?”
“아무래도 수도에 이름 좀 날려야 할 것 같아.”
지난번에 수도에서 건국제에 참 여할 때에도 ‘리체 에스텔’의 부스가 가장 유명했다.
이번에도 ‘리체 시오니 페렐르만’의 이름이 여기저기 회자될 예정이니, 굳이 내 존재를 알리 기 위해서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 아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