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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34화 (134/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4화

꿈의 내용이 빠르게 휘발되고 있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잊히는 꿈이라면 예지몽이 분명했다.

얼른 기억해 내야 하는데, 에르안이 무슨 미친 짓을 해서 아빠가 잔뜩 화가 났다는 것밖에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실 그런 상황은 너무 많이 일 어나므로 별달리 기억할 가치가 없기도 했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공작님?”

화들짝 놀란 나는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작은 등불을 밝힌 뒤 창문을 열었다.

에르안이 발코니에서 훌쩍 뛰어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에르 안이라고 불러 줘. 반말도 써 주 면 더 좋겠는데.”

그가 눈꼬리를 접어 보이며 내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어, 어, 어떻게 오셨어요?”

“맨 꼭대기 충이잖아. 지붕에서 내려왔지.”

“그래도 높이가 상당할 텐데……”

“네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더 한 짓도 할 수 있어.”

“아니, 그럼 아까 왜 복도에서 고모랑 실랑이를 한 거예요?”

“한번 일을 쳐야 경계심이 흐트 러지지.”

역시 예지동을 기억할 가치가 없었다.

에르안은 어쨌든 아빠가 알면 펄펄 될 일만 하고 있었으니까.

가족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에르안 과 어떻게 해서든 연인 사이를 이어 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은 것 같다고 의기소침해 하고 있을 때, 에르안이 정말로 나쁜 마음을 먹었 다면 그대로 세르이어스 공작성 에 늘러앉게 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안 그래도 서로 삽질 만 하던 가족 사이에 오해가 더 쌓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빠의 냉담한 태도로 이 사태 를 예상했을 텐데도 내 행복을 위해 함께 비를 맞아 주고 등을 떠밀어 준 그가 고마워서, 나는 그를 밀어낼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내가 가장 심적으로 힘들어할 때 곁에서 가장 필요한 역할을 해 준 사람이었다.

아빠가 나중에 딸자식 다 소용없다며 한숨을 쉬어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아빠와 고모, 할아버지의 거센 반대 때문에 결혼이 하염없 이 미뤄질 수는 있겠지만…….

“혹시 아프신 거 아니에요? 조 심하셔야 할 텐데.”

나는 혹시 몰라 그의 손을 잡아 마력 흐름부터 확인했다.

아빠의 말대로라면 지금 살살이 풀 부작용이 슬슬 나타나는 것으 로 보이는데.

과연 호흡기 쪽으로 이상한 마력 흐름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급격히 숨이 차거나 하면 환각 상태에 들어갈 수도 있거든요. 뛰지 마시고, 늘 호흡을 정갈히……”

“알았어.”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는 내 두 볼을 감싸 쥐고 아주 느릿하게 다가왔다.

“그럼 천천히 입 맞추면 되지?”

어째서 말이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눈을 내리깐 채로 그의 입술이 닿을 때까지 간질거리는 기분으로 기다려야 했다.

숨결이 섞이고 가끔씩 마주치는 눈빛 사이로 열기가 오르기 시작 했다.

“20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데.”

침대 머리맡의 작은 등불이 깜 빡거려 시야가 흐릿한 만큼 마주 한 살결의 감촉이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그가 느릿하게 나를 침대로 밀 며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뒷걸음질 치던 몸에 익숙한 무 게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체격 차이가 워낙에 커서 나는 순식간에 그의 품에 폭 안기게 되었다.

“이래서야 20분도 함께하기 힘 들어……”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부 드럽게 붙들었다.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도저 히 걷잡을 수 없어서 무서울 정도야”

옷자락이 쓸려 올라갔지만 찬바 람이 닿기 전에 따뜻한 체온이 감겨서 발끝에 잔뜩 힘이 들어갔 다.

“그래서 이젠 눈에만 담는 걸로는 부족한데.”

느릿한 손길에 비해 열기가 일 렁이는 눈이 너무나 간절해서, 나는 잠시 의사의 본분을 잊고 호흡을 정갈히 하라고 했던 것을 후회했다.

“물지 마요……. 아파.”

“조금만…… 너무 달아서 그래, 미안.”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오히려 보채는 목소리로 그가 나를 어르며 연신 입을 맞췄다.

“눈앞에 있는데 머리카락 한 올 손대지 못하는 기분 알아?”

뒤척이는 나를 달래 가며 그는 더운 숨을 섞어 속삭였다.

“환절기 부작용으로 호흡이 살 짝 가쁜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고통스러워.”

만약 아빠가 에르안을 괴롭히고 싶었다면, 아빠의 행동은 그 어떤 것보다도 성공적인 셈이었다.

“그럼……”

나는 그의 달뜬 새까만 눈을 바 라보며 숨을 몰아쉬고 속삭였다.

“얼른 채워야겠네요.”

“그래도 천천히 해야지.”

잔뜩 잠긴 목소리가 내 볼과 목덜미, 어깻죽지에 내려앉았다.

“난 네 말이라면 다 잘 들으니까.”

몸을 파고드는 느린 손길은 부드러웠고,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았다.

흐릿한 불빛 아래 그의 안달 난 눈이 나를 뚫을 둣이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에 그의 체온이 스며들고,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과 침대 시트를 붙잡은 채 열은 한숨을 쉴 때였다.

"리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우리는 깜짝 놀라 숨마저 멈췄다.

고모의 목소리였다.

“혹시 자니?”

나는 황급히 창문을 열고 절망 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에르안을 내보낸 뒤, 옷차림을 추스르고 겨우 문을 열었다.

“……아, 고모.”

에르안의 눈에 눈물까지 살짝 고인 것 같았는데.

무사히 잘 갔는지에 대한 걱정 을 뒤로 하고 나는 숨을 고른 후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열었어?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갛고.”

“어, 음…… 더워서 음, 창문을 열다 보니 늦었어요.”

표정 연기는 자신이 없는데, 불 이 어두운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밖이 좀 소란스러운데, 괜찮아?”

“예? 아…… 뭐, 그런 것도 같네요.”

그제야 에르안 외의 감각이 선명해져 저 멀리서 말이 달리는 소리 등이 들려왔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지금 여기 저기서 알 수 없는 습격이 일어나는 중이래. 반란군인 것 같다 며 제이드 황태자가 출정했다던데.”

“……네?”

반란군은 원래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보아하니 지금은 막 궐기하여, 옆의 영지를 갑자기 장악하고 반 란군의 영토로 편입하는 단계였다.

그런데 무언가 중간에 변수가 생겼는지, 내가 회귀하기 전보다 훨씬 더 시기가 빨랐다.

물론 제이드 황태자가 다 이겨 먹긴 하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황궁에 제이드 황태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병상에 누워 정무를 보살피기 어려우니,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고 처벌을 내리는 건 제이 드 황태자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가 황궁에 없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하엘던 황자가 무슨 수를 써서 자기만 잘 빠져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회귀 전에도 황태자가 반란군을 발본할 때 하엘던 황자 는 끝까지 숨어 있지 않았던가.

물론 제이드 황태자가 ‘모조리 사형’을 외치는 바람에 배후가 들통나지 않은 덕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하엘던 황자가 일단은 체포되었을 테니 뭔가 손 을 쓸 수 없는 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내가 나서야 하는군.’

역시 제이드 황태자에게 다 맡 겨 둔 채 합당한 처벌을 기다리 기만 할 운명이 아닌 듯했다.

자의든 타의든 적진에 직접 들 어가게 된 이상, 아무래도 내가 내 손으로 끝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세르이어스 공작이 기사단을 보내 주지 않았다면 페렐르만 영지도 위험할 뻔했어. 다행이지.”

“그럼 고모는 이제 저희 교제를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아니.”

고모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막 너를 만났고, 절대로 공작성에 보낼 수 없어. 내가 독신이라 하는 말인데, 가족과 함께 꽁냥대며 살아가는 게 나쁘지는 않아. 진짜 야.”

나는 고모와 아빠의 대화를 상기하며 그것이 ‘가족과 함께 꽁냥댐’인가 잠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여하튼 아직은 말을 꺼낼 단계가 아닌 듯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깨우신 거 예요? 다른 일은 없고요?”

“진짜 용건은 따로 있어. 주인이 비둘기를 구했대. 급한 것 같아서 깨웠어.”

“아.”

나는 반색을 하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책상에서 얼른 깃펜을 집어 들었다.

“쪽지는 나한테 줘. 내가 1층에서 보내 줄 테니까.”

“예, 고마워요.”

재빠르게 작성한 짧은 쪽지를 고모에게 내밀며 나는 씩 웃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 디엘에게 보내 주세요.”

황궁에 도착하면 이제 내 부탁을 들어주고 온 디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하엘던 황자가 이렇게 나온 이상, 아무래도 내 명석함을 수도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여 줘 야 될 것 같았다.

나를 직접적으로 건드린 이시더 남작은 지금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갇혀있었다.

황자라고 해서 못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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