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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33화 (133/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3화

“어제부터 숨 쉴 때 살짝 걸리 는 계 있는데 불편할 정도는 아 니고.”

“환절기가 다가오며 공작님 몸이 적응하고 있는 겁니다. 5년간 회복하면서 이런 추운 날씨에 있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번만 잘 넘기면 이제 평생 괜찮을 테지만, 이 적응기에 절대로 무리 하시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아빠가 그 자리에서 쫓아낼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에르안은 슬금슬금 옆으로 피하고 있는 벨론올 불러 화제를 옮겼다.

“하엘던 황자님은 체포되었나?”

“예?”

벨론은 어안이 벙벙해서 되물었다.

“글쎄요……. 황궁에서 나와 자 작령까지 오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려서 황궁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혹 시 하엘던 황자님께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근위대에 명령을 내리신 분이 하엘던 황자님이신데...”

나는 재빨리 시간 순서대로 사 건을 정리해 보았다.

하엘던 황자가 나를 체포하라고 근위대를 파견한 뒤에 조사관이 일의 전말을 알아보러 온 것이다.

따라서 내가 황궁에 도착할 때 쯤엔 하엘던 황자가 이미 체포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치밀한 인간이니 무조건 발뺌 하겠지. 회귀 전에도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언제라도 꼬리를 자를 준비가 되어 있을 거야.’

그렇다면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적진에 직접 들어가는 이 상황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역시 제이드 황태자에게 모든 걸 맡기는 건 아무래도 미덤지가 않았으니까.

“당연히 최고급 여관에서 묵어 야 할 거야.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이 근방에서 가장 좋은 여관을 물색해 와.”

내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에르안은 검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특히 디저트를 잘하는 곳이어 야 해. 리체가 디저트 접시를 남기거나 하는 불상사가 생기면 세르이어스 공작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

벨론은 한숨을 쉬며 여관을 알아보기 위해 근위대 소속 병사들을 여기저기로 보냈다.

고작 평민 하나 잡아오는 손쉬 운 임무일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왔을 텐데, 속으로 된통 걸 렸다고 생각하고 있올 게 뻔했다.

***

얼마나 고급 여관을 구했는지,  내가 비둘기를 날리고 싶다고 하자 여관 직원이 지금은 없지만 최대한 빨리 구해 준다고까지 했다.

전서용 비둘기가 상당히 구하기 힘든 것임을 감안할 때 서비스가 엄청나다고 볼 수 있었다.

고모는 나와 함께 자야 한다고 우겼지만 안타깝게도 고급 여관 은 모두 1인실이었다.

벨론은 누군가를 체포하러 온 길이 아니라 귀족의 여행길 같다며 한숨을 푹 쉬었지만 한참 높 은 작위를 가진 에르안 때문에 별다른 불만도 표시하지 못했다.

아무리 황실 근위대라고 해도 귀족을 체포할 때에는 더 높은 계급이 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평민을 잡으러 온 벨론은 근위대 내에서도 신입에 속했 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곳에서 가장 권위가 없었다.

그래서 체포 대상인 나는 가장 좋은 방에서 자고, 체포하러 온 그는 가장 저렴한 방에서 자는 상황이 벌어졌다.

아빠는 다른 건 몰라도 에르안 과 내 방은 멀리 떨어져야 한다 며 가장 꼭대기 층의 구석방을 내게 배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맞은편 방을 에르안에게 쓰라고 하면서, 밤중에 몰래 빠져나갔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하지만 호흡이 자꾸 불안정해 서 주치의가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저도 주치의입니다, 공작님. 제 가 곁에 있도록 하죠.”

아빠는 도끼눈을 뜨며 짜증을 낸 후, 내 방에 올라와 이것저것 살피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온갖 옵션을 추가해 서 내 방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리체, 잠자리는 괜찮은 것 같니? 수면 향을 종류별로 가져왔 는데.”

“전 불면중 없는데요. 아주 건강해요.”

“그래도 혹시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을까 봐.”

아빠는 한숨을 쉬며 내 손을 도 닥였다.

“잠자리가 바뀌어 불편할까 봐 자작저에도 온갖 준비를 다 해 두었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이야.”

“무슨 준비요?”

“편안한 수면을 위한 음악을 연 주하라고 음악단도 불러들였고…”

“돈 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잘 뻔했군요. 아무리 부유한 영지라 고 해도, 이제 제가 상속인이니 아껴 쓰도록 하세요.”

나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앞으로 누가 용의 발톱 같은 것 사겠다고 하면 절대 들어주지 마시고요.”

지금까지야 내 돈 아니라고 생 각해서 팍팍 썼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역시 사람은 남의 돈이라고 쉽게 여기지 말고 심보를 곱게 써야 한다는 것을 나 역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아빠에게 경제 관념을 교육시키고 있는데 내 옆방을 쓰기로 한 고모가 잠시 들어왔다.

“자, 이제 꺼져. 리체 피곤할 테니 재워야 해.”

“안 그래도 세르이어스 공작에 게 가 봐야 해. 환절기라 오랫동 안 눈을 뗄 수가 없어. 딱히 네가 꺼지라고 해서 꺼지는 게 아 니야.”

아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고모에게 단단히 주입시켰다.

“공작을 조심해. 그 집념의 눈동자를 봐. 어떻게 해서든 기어 들어올 것 같으니까.”

“이 복도에 누군가 발 디디는 소리만 내면 내가 나가 볼 테니 걱정 마.”

아빠와 고모가 얼마나 하루 종 일 내 옆에 붙어 있었던지, 그동 안 에르안은 나와 다섯 마디 이상 대화조차 하지 못했다.

문득 눈을 마주치면 굉장히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 마저도 어디 리체에게 요망한 표 정을 지어 보이냐며 아빠에게 가로막힌 채 혼나기 일쑤였다.

나는 물론 에르안이 좋았지만,  19년간 나를 찾아 헤맨 아빠의 말을 당분간 들어줘야 한다는 생 각이 었다.

그렇게 아빠와 고모가 나간 후 내가 씻고 나오자 밖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아빠를 따돌렸는지 모를 에르안과 기어코 그의 출입을 알 아낸 고모의 목소리였다.

“난 리체가 오래도록 우리와 함 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찾았는데, 바로 결혼시킬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아버지 와 오라버니 모두 똑같은 생각일 테고.”

“리체도 그럴 겁니다. 존중해야죠”

예상보다 순한 그의 대답에 고 모는 상당히 당황한 듯했다.

“우리는 솔직히…… 공작님이 억지로 리체를 끌고 가거나 강짜 를 부릴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잘할 수 있습니다. 하극상으로 뻗대는 거야 숨 쉬는 것보다 쉽죠.”

나는 잠옷을 입으며 저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리체가 난감해 할 테니까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난감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세르이어스의 미친놈은 안 된다고 소리쳤던 고모는 에르안의 말에 흠칫하는 것 같았다.

“저는 리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거든요. 물론 다른 남자에게 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은 자신이 없지만.”

“……크홈.”

“리체가 다시 찾은 가족들 사이 에서 훨씬 더 행복한 표정을 짓 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으 니까요.”

에르안이 작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평소에 좀 잘하지 그랬어요. 오라버니한테도 잘 보이시고.”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가족 간의 시간을 방해할 생각이 없다는 에르안의 말에 고모의 목소리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나름 평화로운 대화인 것 같아 나는 나가서 중재할 생각을 버리 고 그냥 침대로 들어갔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세상이 리체와 리체가 아닌 사 람들로 나눠져 있었으니까요. 어 머니께서 인성이 엉망으로 자랐 다고 그 대가를 치를 것 같다고 하셨을 때 귓등으로도 안 들었는 데, 그 말이 사실이 될 줄은 몰랐군요.”

“뭐…… 아르가 놈도 그건 마찬 가지일 겁니다. 제 잘난 맛에 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까칠하게 대할 때, 제 딸이 그 사람 중에 있다는 걸 몰랐을 테니까. 뭐, 나 도 똑같고.”

무심코 중얼거리던 고모는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 기분 나빠 졌는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진짜 새사람이 되실 건가 요? 그게 가능한가?”

“리체가 원한다면 다 가능합니 다.”

“그래도 아르가 놈은 허락하지 않을 텐데.”

“마음 풀리실 때까지 어떻게든 굴러 야죠.”

“장난 아니게 굴러야 할 텐데.”

“죽을 때까지 구르죠, 뭐.”

에르안이라면 정말 열심히 구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눈 을 감았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피곤했다.

***

[이, 이런 단단히 미친놈이! 야! 야!]

배경은 흐릿했다.

다만 아빠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에르안 님!]

나는 아빠가 에르안을 ‘야’라고 부르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어릴 때 부르던 호칭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내 옆에서 그 대화를 모조리 듣 고 있던 고모가 경악에 물든 얼굴로 중얼거렸다.

[X발, 무슨 인간이 저렇게 일관적이야? 저거 진짜 상또라이 아냐?]

그리고 아빠는 펄쩍펄쩍 뛰며 화를 냈다.

[에르안 세르이어스! 네가 결국 나를 끝까지 엿 먹여? 야! 야!]

그리고 톡, 톡, 톡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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