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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32화 (132/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2화

“심지어 우리 리체를 고통스럽 게 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가만둘 수가 없지요. 맡겨 주시면 최선 을 다해 악독한 방도를 생각해 내겠습니다.”

에르안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하엘던 황자는 자식조차 없는 걸요. 뭐, 물론 이스엘라 황자비가 제게 몰래 와서 임신이 잘 되 는 약을 처방해 달라고 할 만큼 간절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런 약이 있어? 처방해 줬어?”

“뭐, 도움이 되는 시약을 제조해 주긴 했지만 가능성을 조금 높일 뿐이지 크게 도움은 안 될 걸요.”

“……그래? 그 사실, 누가 알고 있어?”

“글쎄요.”

나는 생각에 잠겨 대답했다.

“일단 제이드 황태자님이요. 황자비가 꼭 비밀로 해 달라 부탁 했지만, 황태자님 성격상 잘 지키실 수 있으실지……. 황태자님 께서 분명히 한두 번 정도는 실수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 생각도 그래. 황궁은 소식 이 빠른 곳이니 거의 다 알음알음 안다고 봐야겠군.”

“크홈.”

에르안과 내 대화를 들으며 아 빠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사관에게 진실을 알렸더라도 아직 끝을 본 건 아니니 불안해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리체는 지나치게 착하고 선량 합니다. 거짓말도 못하고 너무나 정상이에요. 그러니 옆에 저처럼 약간 이상한 개차반이 있어야 험한 세상 더 잘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르안에게 딱히 나쁜 기억이 없는 할아버지와 고모는 그의 맞는 말에 반박도 하지 못하고 한 숨을 쉬며 그의 눈을 피했다.

다만 아빠는 팔짱을 낀 채로 절대 안 된다는 눈빛만 쏘아 대고 있을 뿐이었다.

“아빠, 공작님도 자작저에 당분간 머무르는 건 어떠세요? 환절기라 계속 중상을 봐야 하고, 아빠가 공작성에 가신다고 해도 저희가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내 합리적인 말에 아빠가 한숨을 쉬어 보였다.

에르안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으려다가 아빠의 눈치를 보며 살살 거둔 뒤, 애처로운 눈빛으로 다정하게 말했다.

“만일 내가 자작저에 머물더라도, 가족들과 실컷 좋은 시간 보내.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언제나 내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던 그는 온순하게 말하고는 마치 칭찬해 달라는 둣 빙긋 웃었다.

내가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아빠가 소리쳤다.

“그렇게 웃지 마시죠! 리체 눈 흐려지지 않습니까! 한창때 시오니가 날 보던 표정이잖아!”

“아…… 눈이 흐려져서 죄송해요. 보기 싫으시구나.”

내 시무룩한 대답에 아빠와 에르안이 동시에 말했다.

“아니다, 아냐. 저놈이 웃은 게 잘못이지!”

“맞아, 리체. 내 잘못이야. 자작님이 싫으시다니 앞으로는 얼굴을 주의할게.”

한번 꽂히면 앞도 뒤도 보지 않는 에르안이 아빠 앞에서 단단히 구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걸 보고 있는 것도 좀 환장스러워서 나는 웬만하면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 있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가주님! 황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갑자기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 며 하인이 하나 뛰어 들어왔다.

아빠는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났다.

“벌써 하엘던 황자의 심문이 시작됐나? 날 중인으로 부르는 거 겠지?”

그러나 황실근위대의 제복을 입 은 권위적인 표정의 남자가 제대 로 된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응접실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하인은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침입과도 비슷한 무례한 언행에 아빠가 화를 내려던 찰나였다.

“황실근위대 소속 벨론 카이더 입니다. 리체 에스텔이 여기 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에르안이 내 앞을 가로막고 나 섰지만 이미 벨론의 눈은 응접실에 유일한 젊은 여자였던 내게 꽂혀 있었다.

“이스엘라 황자비 전하께 부적 절한 약물을 처방한 죄로 즉시 체포하겠습니다.”

“뭐?”

아빠가 벨론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 뭐라고 했어? 체포?”

할아버지 역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일어나 소리쳤다.

“무슨 속셈들이냐, 이것들! 우리 리체는 절대로 내줄 수 없다!”

고모는 이미 검을 빼 들고 있었고, 내 앞을 막고 있던 에르안마저 ‘드디어 독립 공국…….’이라고 중얼거리며 손을 검 쪽으로 음직였다.

나는 재빨리 그의 팔을 잡고 앞으로 나섰다.

황실근위대 사람들은 그저 명령 에 따를 뿐이지 잘못한 건 없었다.

누군가의 아래에서 시키는 일 잘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본 나는 그들이 에르안의 손에 죽는 것을 진심으로 원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리체 에스텔이 아니라, 리체 시오니 페렐르만입니다.”

만일 계속 평민이었다면 즉시 체포된 후 황실근위대 재량으로 아무 절차 없이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귀족 여식이라면 얘기가 좀 달랐다.

벨론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서류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음…… 호적상으로는 세르이어스 영지의 평민이라고……”

“어차피 그 호적 변경하러 아빠가 황궁에 가려고 했어요.”

침착하게 대꾸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공식적인 처방이 아니라 건국제 부스에서의 가벼운 진단이라 제대로 된 증인도 없었다.

증거를 조작하려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었다.

이건 나에 대한 완벽한 악의였다.

“다 같이 가면 되겠네요. 그런 데 제가 황자비 전하께 약물을 처방한 근거가 있나요?”

“황실의 모든 이들은 복용한 모든 약물을 기록하는 것이 원칙입 니다. 황실 의료 연구진에서 처방한 것을 포함해서요.”

일단 시간을 벌고 상황이 돌아 가는 것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턱을 치켜들고 최대한 도도하 게 말했다.

“어쨌든 제가 호적에 오른 뒤에 제대로 된 절차를 밟도록 하세요”

평민으로 오래 살았지만 귀족처럼 행동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아한 손짓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나를 보며 벨론은 어찌해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음....황실의 안위와 연관된 사건이라....”

에전에 승전 연회에 갈 때, 이사벨 마님이 온갖 교사들을 붙여 귀족들의 예법이나 화법을 가르 친 것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도 가겠다.”

여전히 벨론이 망설이고 있자 에르안이 이를 갈며 말했다.

“아직도 호적이 세르이어스 영 지의 평민이라면 나도 관계자일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딱히 관계는 없 었지만 나를 따라오려는 핑계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페렐르만 영애는 내 태중 약혼녀이기도 하지.”

아빠의 눈이 불꽃이 튀었지만,  벨론의 입을 다물게 하기엔 충분 했다.

아무리 황실근위대라고 해도 자 작가의 여식을 연행하는 것도 찝찝한데, 심지어 대귀족인 공작가 의 약혼녀를 함부로 체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한번 다 모시고 가 보도록 해. 내 약혼녀 혼자만은 절대 보내지 않겠다.”

에르안까지 동행해야 한다는 끔찍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벨론의 표정에 절망이 덧씌 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가겠다! 우리 리체를 감히!”

“아버지는 가주시잖아요. 지금 침략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집을 지키셔야죠. 아버지마저 자작저를 떠나시면 호아킨 단장의 기사단은 누가 받아 주나요?”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말하자 고모가 즉시 말린 뒤 덧 붙였다.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고모가 검을 집어넣지 않은 채로 벨론을 쏘아보았다.

벨론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힘없 이 물었다.

“네? 세이린 경은 왜……”

“리체의 호위. 내가 방을 같이 쓰면서 24시간 내내 붙어 있을 거야.”

밸론은 한숨을 쉬었고, 에르안 마저 약간 좌절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겁먹지 마세요.”

나는 신경 안정제를 벨론에게 하나 건네며 태연하게 말했다.

벨론이 땀을 닦으며 신경 안정제를 받아 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금 황궁으로 나를 연행 하는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길에 예상치 못했던 동행인 에르안와 아빠 그리고 고모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빠 른 속도로 늙어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체포하러 온 단호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점차 이 끔찍한 사람들의 경계를 받다 보니 결국 나를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벨론을 따라온 황실근위대 사람 들은 에르안의 눈빛만 보고도 우리로부터 아예 멀찍이 떨어져 따 라오는 형상이었다.

“고맙습니다, 영애. 사실 정말 섬뜩하고 잔혹한 분들 같다고 생 각 중이었거든요. 역시 소문과 외양만 무시무시하지 사실은 따뜻하고 자비로운 분들이시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벨론이 다소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사람 잘 보시네요. 딱 보 이는 것만큼 괴팍하세요.”

나는 그 희망을 객관적인 사실 로 밟아 주었다.

“다만 제가 너무 착하고, 사회 체계를 존중하는 편이라 괜찮을 거예요. 다들 저를 너무 사랑하 셔서 제 뜻은 잘 따라 주시니까

“그럼 만일 영애가 절 따라오기 싫다고 하셨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렇다면 반란 세력이 둘이 되 었을 거라고 대답하려는데, 갑자 기 에르안이 다가와 벨론의 손에서 신경 안정제를 빼앗아 갔다.

“리체, 다른 남자에게 이런 배려를 하다니 너무한 것 아냐? 19 년차 약혼자로서 마음이 너무 아 파.”

“저마저 배려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근위대에 사표 쓰시고 실직자 되실 것 같은 얼굴이라. 그리고 공작님과 제가 언제부터 19년 째 약혼 중이었죠?”

“내게 유리하면 다 갖다 쓰는 성격인 거 몰랐어? 그리고 공작 님이 뭐야.”

에르안은 짙게 웃어 보였다.

“에르안이라고 불러 줘, 응? 이 제 둘 다 성년도 지났잖아. 말도 놓고.”

“어…… 좀 천천히요.”

아무리 잘생겼어도 인상도 더러운 데다가 덩치가 너무 커서 위 압감마저 느껴지는 남자에게 이 름을 막 부르는 건 아직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동안 상하 관계로 너무 오랜 시간 지내기도 했고.

“단번에 이름을 부르는 계 어려 우면 어릴 때처럼 에르안 님도 좋아.”

“지금은 안 귀엽고 안 어리니까요.”

“네가 어린 시절에 에르안 님,  이렇게 부를 때마다 얼마나 안심이 되고 좋았는데.”

그가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려는데 갑자기 아빠의 매서 운 손길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새 리체에게 수작이십니까? 학습 능력이 떨어지시는군요. 제 가 절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 했는데.”

“아니, 제가 좀 아파서.”

“저 역시 공작가의 주치의 신분 입니다. 제게 말씀하시지요.”

아빠가 나를 완전히 가리고 짜증을 내는 바람에 에르안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중얼거 렸다.

“장모님께서는 분명 저를 예뻐 해 주셨을 텐데요.”

“누가 누구보고 장모님이래! 헛 소리 하지 마시…… 응?”

그래도 아프다는 말을 모른 척 하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에르안의 손을 잡아 마력 흐름을 확인하던 아빠는 미간을 찌푸렸다.

“……요즈음 호홉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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