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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31화 (131/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1 화

아빠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소 리쳤다.

“너! 어릴 때 내가 기를 써 놓고 살려 놨더니, 감히 내 딸을 노려? 이럴 줄 알았으면……”

찻잔을 쥔 아빠의 손이 바들바 들 떨리는 게 곧이어 찻잔이 날 아올 것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빠! 안 돼요!”

저택에서 가장 비싼 걸 꺼냈는 데 그걸 던진다고?

게다가 아직 차가 식지도 않았다.

아빠는 나와 같은 공작성의 주치의 신분이었으며, 에르안이 화상이라도 입으면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해진다.

“나가십시오, 공작님.”

가까스로 냉정을 찾은 아빠는 씩씩거리며 냉담하게 문을 손가락질했다.

“다시는 내 딸 얼굴을 보지 못 할 줄 아세요. 리체의 주치의 계약은 파기할 거고, 의사의 양심이 있으니 환절기까지는 제가 곁 에 있어 드리기로 하지요.”

“허락하실 때까지 자작저 앞에 서 무릎을 꿇고 있어도 안 되겠 습니까?”

“평생 꿇어도 안 됩니다.”

“아빠, 나는 공작님이 좋은 데……”

“그 마음 없어질 때까지 온갖 좋은 것들을 다 해 주마. 일단 만나지 말고 3년만 더 있어 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질 거야.”

“3 년이요?”

“아빠는 19년을 널 찾아 헤맸단다…. 3년 동안 공작님 얼굴 안 보는 게 그렇게 어렵니?”

아빠의 19년이 나오면 나는 정 말로 할 말이 없어졌다.

내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에르안이 절망적인 얼굴을 해 보였다.

이제 막 연인이 되어 하루에 20 시간씩 붙어 있을 생각에 설레하던 에르안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정말로 아빠가 나를 지금 이 순간부터 그에게서 격리할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위험한 것에서 자식을 보호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입니다.”

“하……”

졸지에 위험한 것이 된 에르안은 머리를 한 번 넘기더니,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이것까지는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씩씩거리는 아빠 앞으로 에르안이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로 아빠에게 건넸다.

“저희 어머니가 인성 쓰레기같은 저 하나로 안 될 것이 불 보둣 뻔하니 이것이라도 꼭 보여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분위기 환기가 될 것이라고요.”

내가 떠나려고 할 때, 이사벨 마님이 필사적으로 달려와 에르안에게 건네주었던 것이 저 봉투 인 듯했다.

“행, 뭐가 들었든 내 대답은 변 하지 않……”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성의 없이 봉투를 열어본 아빠의 얼굴이 굳었다.

어깨너머로 그게 뭔지 살짝 엿본 나와 고모 역시 놀라서 살짝 입을 벌렸다.

“시, 시오니가…… 대체 언제……”

엄마와 이사벨 마님이 장난으로 썼다는 계약서였다.

이사벨 마님의 아들과 엄마의 딸을 결혼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의 아이가 딸인 걸 알았을 때… 페렐르만 자작은 펄펄 뛰었지만, 함께 임신 중 이던 나와 시오니는 페렐르만 자작 몰래 사돈을 맺자고 깔깔거리 며 장난으로 계약서까지 만들었단다]

나는 이사벨 마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녀의 치밀함에 새삼 감탄했다.

이걸 보고 에르안이 이사벨 마님에게 거듭 새사람 되겠다며 연신 고맙다고 했구나…….

당연히 공중 효과는 없고, 형식 역시 누가 봐도 친구들 간에 작성한 추억 만들기 용도의 문서였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엄마의 흔적이기 도 했다.

“내가 장난이라고 해도 절대 싫다고 했는데……”

아빠가 숨을 몰아쉬자 에르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오니 님은 세르이어스가 좋으셨나 봅니다. 사돈으로 삼고 싶으실 만큼요.”

“시오니는…… 하…… 껍데기만 보는지라……”

“역시 통찰력이 훌륭하신 분입니다.”

고모가 계약서를 보며 좌절스럽다는 둣이 중얼거렸다.

“결국 시오니의 유일한 단점이 여러 모로 대를 이어 가는구나……”

에르안은 깍듯하게 덧붙였다.

“리체와 제가 배 속에 있을 때의 인연을 생각하여 한 번이라도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노력 하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에르안 하나로는 안 될 것이지 만 이사벨 마님의 혜안은 맞아떨 어졌다.

그 계약서 하나로 확실히 당장 쫓아낼 것 같은 기세는 누그러졌 다.

어차피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 는 아닌 것 같고, 아빠와 둘이

있을 때 다시 한번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아까부 터 마음에 걸리던 화제를 꺼냈 다.

“그런데 공작님.”

“응?”

“저희 기사단 현황은 왜 질문하 신 건가요?”

“아……”

에르안의 축 처져서 불쌍해 보 이던 눈빛이 한순간에 날카롭계 빛났다.

“오는 길에 치피아 영지를 지나쳤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

“심상치 않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왠지 전투를 준비하는 것 같아서.”

“네?”

“그때 꽃밭 황태자가 말하기를 반란군은 산발적으로 일어난다며. 그래서 뭔가 불안해.”

나는 재빠르게 기억을 뒤졌다.

치피아 영지라면 역시 반란군에 꽤 늦게 합류한 곳이었다.

아직 반란군이 대거 궐기할 때가 아니고, 황실 조사관이 돌아 가자마자 하엘던 황자는 체포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반란에 대해서 는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문득 이미 과거와는 사건의 양상들이 많이 변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 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무언가 내가 바꾼 것들 중 하나 가 변수가 되어 반란군의 궐기가 예상보다 빨라진 거라면…….

그리고 맨 처음 궐기하는 영지 또한 바뀐 거라면…….

치피아 영지는 페렐르만 영지와 굉장히 가까웠다.

자금 문제가 생긴 반란군에게 부유한 페렐르만은 좋은 먹잇감 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일이 꼬이고 있 는 것을 눈치챈 하엘던 황자가 가장 거슬렸던 사람을 먼저 없애 려고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가 나락으로 떨어트리려고 했던 사람은 바로 우리 아빠였다.

내 사색이 된 표정을 보고 고모가 재빨리 내 손을 잡아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페렐르만 영지에 있는 기사단은 고모가 직접 이끌고 있으며 그 수가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규모를 들은 에르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치피아 영지는 백작령이고 무기 제작에 유리한 철광산을 끼고 있습니다. 기습을 해 온다면 수월하게 막을 수 있는 규모가 아 닙니다. 아무리 페렐르만에 돈이 많아도 용병을 지금 당장 대규모 로 구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럼 어쩌죠?”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상하다 생각해서 호아킨 단장님에게 비둘기를 보내긴 했어. 혹시 모르니 정예 멤버를 출발시 키라고.”

에르안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중얼거리고는 할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주님, 제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조금이라도 위험이 닥치는 게 싫어서요. 공작성의 병력이 자작 저보다 우세한 것이 사실이니, 상황이 확실히 정리될 때까지만 자작령에 세르이어스 기사단 몇 명이 주둔해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히 이 모든 일이 그냥 흐지부지되어 별일 없이 지나가는 것이 가장 좋지만, 아무래도 대비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아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냐?”

“호아킨 단장이라면 뭐 믿을 수야 있지만, 예전엔 이시더 남작도 믿었으니…”

그 말에는 내가 대답했다.

“호아킨 단장님은 제게 충성 맹세까지 하셨어요. 믿어도 좋아요.”

“그래도 세르이어스의 사람인데……”

아빠는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죽도록 반대하고 있는 상대의 도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아빠는 영지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데 자존심 때문에 거절할 사람은 아니었다.

“리체가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 했어요.”

에르안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맞는 얘기였기 때문에 나 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작님. 드디어 찾은 가족 인걸요. 가족들을 찾으면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만큼,  좋은 추억 많이 만드시길 바람니다. 저는 절대로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만, 조금만 곁에 있으면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됩니다. 내 딸을 뺏길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뺏는다뇨. 저는 리체의 의사를 언제나 존중합니다.”

“네, 마음껏 존중하십시오. 저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리체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을 테니까.”

에르안은 깍둣하게 말했지만 아빠는 아주 단호했다.

“그동안 제가 자작님께 아주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말의 여지라도……”

“딱히 공작님이 제게 개차반같이 굴었던 데다가 인성의 싹수가 노랗다 못해 썩어 버려서 그런 건 아닙니다.”

대신녀도 못 바꾼다는 그의 미래가 아빠로 인해 바뀔 수도 있다는 위기에 봉착하자 에르안의 표정이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아빠, 그리고 공작님하고 의논 할 것도 있어요.”

“뭔데?”

‘아빠’라는 소리만 해도 아빠의 얼굴에서 스멀스멀 웃음이 번졌다.

“저희 페렐르만 가문은 선량해서 하엘던 황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속만 답답해하고 있잖아요. 지금 저희에게는 이런 간악한 캐릭터도 하나 필요하다

고 생각해요.”

“그런 거라면 제게 맡겨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에르안은 눈을 반짝이며 재빠르 게 말했다.

아빠는 미심쩍으면서도 신뢰가 간다는 둣한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이시더 남작은 어쩔 겁니까.”

물론 이시더 남작에게 더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은 이사벨 마님과 에르안일 것이다.

직접적으로 독살을 시도했고 세르이어스 영지를 차지하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우리를 죽이지 않 았다고 하더라도, 나를 없애려고 시도하고 아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빠는 공작령에서 처분을 맡기로 한 이시더 남작을 어떻게 할 것이냐 물은 것이다.

“아.”

에르안은 명령을 잘 듣는 짐승 처럼 온순한 어조로 무시무시한 말을 뱉어냈다.

“웨데릭의 비명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에 있는 지하 감옥에 재갈을 물려 가두었습니다.”

그럼 웨데릭은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갇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도 못할 것이다.

“저희 어머니는 어린 제가 아파서 고통스러워 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똑같이 그 세월을 다 겪 도록 하려고요.”

에르안은 담담한 어조로 ‘이시더 남작은 평생을 감옥에서 자식 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 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긴 지킨 셈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패악이라도 부리면, 웨데릭의 피 묻은 옷가시 같은 걸 던져 줄 수도 있겠죠.”

엄살이 심했던 웨데릭을 생각하면 이시더 남작은 정말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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