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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30화 (130/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30화

“디엘보고 네 짐을 다 챙겨오라 고 해야겠다.”

나 역시 당분간은 가족들과 시 간을 많이 보내고 싶었다.

에르 안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의 소망이었다.

그래서 페렐르만 자작저를 두고 공작성으로 바로 돌아가서 지낼 생각은 없었으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에르안의 주치의였고 곧 가을이 오고 있었다.

지금이야 쇠도 씹어 먹을 기세지만 아무래도 처음 시행했던 치 료법이니만큼 어떤 부작용이 있 을지 몰랐다.

거기까지 확인하는 것이 내 할 일의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으 니 정말로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것 같은데……’

내 생각을 눈치겠는지 아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진료는 내가 하면 된다. 믿고 맡겨.”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듯한 에르안의 반응을 상상 하며 내가 조금 망설이자 부들거 리고 있던 아빠가 낮게 물었다.

“그래서 그놈은 언제 온다고?”

“고, 공작님이신데…… 그놈이라뇨……”

“내 딸을 노리는 놈한테는 더한 소리도 할 수 있어.”

“몇 시간 차이를 두지 않기로 해서, 아마도 곧 도착할 것 같은 데요……”

아빠는 벌떡 일어나 하녀를 불러 지시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다기를 준비해.”

충분히 돈으로 잘 발라놓은 집인데, 가장 좋은 다기?

갑자기 에르안을 잘 접대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도 생겼나 싶어 반색하려는데 아빠가 이를 갈며 덧붙였다.

“혹시라도 자작가라고 깎아내리 지 못하도록 해야 해. 세르이어 스 공작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충분히 잘 먹고 잘 산다는 걸 보여 줘야 자기들이 더 리체를 행 복하게 해 준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못 하겠지.”

그때 하인 하나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자작님.”

“왜?”

“세르이어스 공작님이 오셨습니 다.”

하인의 이어지는 말에 할아버지와 고모, 아빠의 표정이 모두 전투태세로 바뀌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입니다. 긴장 하세요.”

“분명 준비를 잔뜩 하고 왔을 텐데, 세치 혀에 휘말리면 안 됩니다.”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 노인이라고 무시당하지 않게.”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난감함’이 라는 감정을 느꼈다.

“저기…… 그런데 세르이어스 공작님께서 좀 정상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더 나은 남자도 드물텐데요.”

“더 나은 남자라니! 그 어떤 놈 을 데려온대도 네가 아깝지!”

심지어 고모까지 도끼눈을 뜨는 바람에 나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눈에 차는 남자 없으면 혼자 살아도 돼. 날 봐. 난 남편이 없어도, 괴팍한 아버지랑 거지 같 은 오빠랑 천사 같은 조카가 있 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고모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 며 눈을 부라렸다.

지금은 무슨 소리를 해도 안 통 할 것 같았다.

***

에르안은 적당한 시간에 도착했다.

할아버지와 고모, 아빠 셋 모두 에르안의 맞은편에 앉아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무시무시 한 표정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려고 하면 아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결국 에르안은 미동도 하지 못한 채 황실 조사관들이 다녀간 일을 전달했다.

“……뭐, 이렇게 되었습니다.”

에르안의 말을 듣는 세 사람의 표정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력의 돌이 어떻게 반출되었는 지 설명할 때에는 아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할아버지와 고모,  아빠를 둘러보며 살짝 고민하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혹시 자작저에 기사단이 있습니까?”

나는 그의 옆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다가 흠칫 놀랐다.

그가 꺼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자작저의 군사력을 물어볼 이유가 없는데,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있소.”

할아버지가 못마땅하다는 얼굴 로 대답했다.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혹시 상단을 호위하는 정도라면……”

아빠가 도끼눈을 뜨며 끼어들었 다.

“리체를 지킬 호위 기사 정도는 공작성 못지않게 붙여 줄 수 있습니다.”

아마 다기로는 홈을 잡지 못하 니, 공작성의 기사단 규모로 기를 죽이려는 의도라고 파악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사벨 마님과 에르안이 바짝 기겠다고 대화를 나눈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르안은 여기서 날 두고 그런 걸로 힘겨루기를 할 정 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왜요?”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뭐,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사실 오는 길에……”

“공작님.”

아빠는 소리 내어 찻잔을 내려 놓고 턱을 치켜들었다.

“빙빙 돌아가지 말고 결론만 말하죠. 제 딸은 결혼 안 시키고 여기서 평생 살 겁니다.”

“예?”

“제 딸을 노리고 있는 것 다 압니다. 절대 안 되니까 그리 아십 시오.”

“자작님.”

에르안은 눈을 접어 보이며 순 하게 웃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제가 많이 부족한 것은 압니다. 페렐르만 가문에서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말투가 얼마나 공손하고 표정은 얼마나 예쁜지, 못마땅한 눈으로 에르안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이 살짝 풀렸다.

“저는 리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줄 마음가짐을 갖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요.”

그러나 아빠는 턱도 없다는 둣 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사람 바뀐 척, 요망한 표정 하지 마십시오. 안 넘어갑 니다. 절대 허락 못 해요.”

평상시 같았으면 차가운 눈으로 무시했을 에르안이 고개를 숙이 며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저는 리체가 없다면 정말로 죽을 것만 같은 순정을 가 지고 있는데……”

“이미 제게 진실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빠는 냉담하게 말하며 사냥 대회 때의 첫 인상을 잊을 수 없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성인이 되고 난 뒤 에르안과 아빠의 첫 만남이 어땠기에 저렇게 치를 떠는지 모를 일이었 다.

“그러고 보니 성인이 되고 마주 한 순간부터, 공작님은 제게 후 회할 일들만 차곡차곡 적립하신 것 같군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마지막에 나를 양녀로 들이느니 어쩌니 할 때까지도 에르안은 아 빠에게 방해하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으니까.

“겉과 속이 다른 자의 최후겠 죠. 아주 인과응보에 권선징악입 니다.”

“친자 검사 결과를 들을 때부터 열심히 구를 각오는 했습니다. 대체 왜 제가 그따위로 살았을까요”

그는 세상 후회가 된다는 표정 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주 반성하고 있습니다. 많은 걸 느꼈고요, 이제 성격 고쳐먹고 만인에게 친절한 새사람이 되겠습니다.”

에르안은 청초하기까지 한 표정 을 지어 보이며 참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지금부터 모두에게 리체 대하둣이 대하겠다고요?”

“아, 그건 좀……”

에르안은 정자세로 앉은 채로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진지 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제가 전 인류에게 헌신 하는 신전의 성인(姓人)이 되어 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제가 싫어요. 신전이라니,  신탁과 관련된 말만 들어도 시무룩해지니까.”

내가 천천히 말하자 에르안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게 리체 대하는 것의 반의반의 반 정도로 상냥하계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새사람이 되기 에 충분한 것 같기는 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 저는 젊고 어리니, 갱생 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여 기회 를 주시면 안 될까요?”

에르안의 불쌍해 보이는 얼굴에 잔뜩 찌푸리고 있던 고모의 미간 마저 살살 펴지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하지만 아빠는 견고한 벽처럼 고개를 저었다.

“타협의 여지는 없습니다, 공작 님.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변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 정체성은 원래 리체 맞춤형 인간인 걸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신사적인 남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아빠가 딱 잘라서 대답할 때마 다 에르안은 아주 공손하게, 그러나 따박따박 멈추지 않고 제 할 말 다 하며 대답했다.

“리체 곁에 있기 위해 변해야한다면 변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안 됩니다.”

“자작님이 원하시는 어떤 인간 상에라도 제가 다 맞추겠습니 다.”

“안타깝게도 영원히 안 됩니다.”

에르안의 얼굴에 좌절이 물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이제는 정말로 내가 나서야 할 차례 같았다.

아빠의 말이 전부 다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에르안만이 줄 수 있는 감정과 유대감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뭐 당장 결혼을 하고 말고를 떠나, 일단 지금 내 연인인 것은 사실이었기에 중재를 하고 싶었다.

“아빠, 하지만……”

하지만 내 말은 바로 끊겨 버렸다.

“리체, 공작님 인품이 좋지 않 은 건 너도 잘 알지 않니. 절대 안 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있다는 둣, 아빠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시끄럽게 미쳤다면 약 이라도 먹이지, 조용히 미친 건 약도 없어!”

다 맞는 말이어서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 사이에 대해서 설 득이라도 해 볼 생각으로 다시 한번 말을 꺼냈을 때였다.

“아빠, 하지만 우리는……”

“‘우리’라니!”

내 말에 아빠가 이성을 잃고 테 이블을 광, 하고 쳤다.

자작저에서 가장 비싼 찻잔 속 의 찻물이 흔들렸다.

“네가 결국 저 번지르르한 외모 와 악마 같은 속삭임에 홀려 버 리고 말았구나! 다 저놈 얼굴 탓 이야! 저놈 잘못이라고!”

결국 ‘저놈’이라는 호칭이 나와 버렸다.

나는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내가 널 공작성 따위에 보낼 성 싶으냐!”

하지만 에르안은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될 까요? 혹시 지난번 황태자의 편지 때문에 공작성 정도로는 마음 에 안 차시는지……”

이 말을 꺼낼 때, 그는 조금 고통스러워 보였다.

“황태자비 자리를 원하시는 거 라면 제가 반역이라도 일으켜서……”

“공작님! 무슨 소리세요!”

“맞아, 그 얼빠진 멍청한 놈도 있었지. 황태자고 뭐고, 난 그냥 내 딸에게 집적대는 남자가 다 싫어!”

“인간 남자가 싫다면 초월적 존재를 원하시는 겁니까?”

에르안은 간절한 표정으로 아빠 를 바라보았다.

“건국 신화에 따르면 첫 황제가 마물 천 마리를 죽이고 용으로 현신했다고 하던데 저도 마물을 죽이고 돌아올까요?”

이쯤 되면 대화가 그야말로 난장판이 었다.

반역이니 용으로 현신이니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에르안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하여 더 환장할 노릇 이었다.

결국에는 아빠가 벌떡 일어났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 돼! 공작이든, 황태자든, 용이든, 신 이든, 뭣도 다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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