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9화
원래 ‘아버지’라고 부르려고 했지만, 할아버지와 고모의 말에 따라 ‘아빠’라고 불렀다.
엄마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모습 을 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 이 그렁그렁해지면서 아무런 위 화감 없이, 아이가 부르는 것 같 은 호칭이 튀어나왔다.
“리체…… 미안하다……”
아빠는 내 앞에서 결국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까 할아버지, 고모와 함께 실 컷 울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눈물이 나왔다.
“정말 미안해……”
나는 한아름 안고 있던 프리지 아 꽃다발을 엄마 무덤 앞에 놔 두었다.
깔끔하게 관리된 무덤 앞에서, 나는 내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 하고 하녀에게 들려서 떠나보내 던 엄마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렸 다.
“엄마가 저 때문에 돌아가신 것 같아서…… 모두에게 소중한 사람을 제가 뺏은 것 같아서 그랬어요.”
아빠도 할아버지와 고모처럼 오 해하고 있는 것이 뻔해서, 나는 훌쩍이며 말했다.
아빠의 독백을 떠올리면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너무 슬폈다.
“제가 괜히 태어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무슨 소리냐.”
아빠는 나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맨 처음 생겼을 때부터 우리의 축복이었고, 우리의 딸이라는 걸 몰랐을 때에도 페렐르만의 행운이었어.”
만일 회귀한 후에, 나 혼자 살겠다고 세르이어스 영지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삶을 시작했다면 영원히 아빠와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대의 이타적인 선택이 잃어 버렸던 것을 찾아줄 거예요. ]
신탁은 또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다고,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이렇게 완벽한 딸이라니.”
아빠의 목소리가 점차 더 감격에 젖어 들어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저도…… 정말 어떤 부모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이사벨 마님 말대로 돈만 바라는 천박한 사람이 내 부모더라도 다 해 주겠다고……. 그런데 감히 꿈꿔 본 적도 없는 멋진 가족들이라 너무 기뻐요.”
엄마의 무덤 앞에서 나와 아빠 는 그동안의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펑펑 울었다.
“시오니가 이렇게 큰 네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아빠는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 으며 몇 번이나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은 엄마를 주제로 얘기를 해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아빠는 엄마를 조금도 잊지 못하는 눈치였다.
가슴속 깊이 더 슬퍼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복수심을 어쩌지 못했다.
신탁을 받은 나를 없애려고 한 것도 그렇지만 아무 상관 없었던 엄마까지 죽인 건 명백한 악의였다.
그것도 그냥 사고사도 아니고 출산으로 인한 사망으로 위장하려고 하다니, 지나치게 악독했다.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서 그다지 지위가 높지 않은 자작 부인 하나가 죽은 것은 그다지 화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시녀가 다섯 살짜리 황자를 꼬드겨 극히 위험한 마법 아이템을 빼돌렸다는 건 황실의 권위를 상 하게 하니 무조건 비밀로 했을 테고, 그러니 모두가 두 사건을 연결하기가 어려웠겠지.
다시 찾은 가족들이 애릇하면 애틋할수록 지난 시간들이 아파 서 이 모든 일의 원흉을 가만두 고 싶지가 않았다.
그 생각을 모두가 똑같이 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페렐르만 자작저에 다시 돌아가 다 같이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아빠와 고모, 할아버지가 연신 내 손을 쓰다듬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해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같이 해야 할 게 너무 많은데.”
고모는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부터 해야 하지?”
그 말에 할아버지는 주섬주섬 양피지 더미를 어디선가 꺼내 왔다.
“여기서 고르면 된다. 그때그때 적어 둔 거야.”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돋보기까지 꺼내 들면서 열성적으로 읊었다.
“가족 초상화 그리기, 대륙의 5 대 진미 맛보여 주기, 황실 납품 드레스 입히기, 최고급 액세서리 숍 가기, 함께 보드게임 하기, 호화 티파티를 열어 온갖 귀족 초 청하기……”
놀랍게도 그중에 내가 하고 싶 은 것은 가족 초상화 그리는 것 밖에 없었다.
함께 보드게임을 하면 어차피 내가 다 이길 것이기 때문에 별 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나머지는 공작성에서도 이사벨 마님이 해 주었으며, 호화 티파 티를 떠올리면 에르안의 취임식 때 베티아와 실비나가 서로 싸우 던 묘한 분위기만 생각났다.
“천천히 다 하면 되지.”
아빠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간은 많으니까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일단 빨리 요리사 면접부터 다시 봐야겠다. 전국에 유명한 디저트 전문 요리사를 다 불러. 리체는 단것 좋아하니까.”
아마 그러려면 세르이어스 공작 성에 있는 요리사를 빼와야 할 테지만 나는 일단 말을 아꼈다.
“연구실하고 온실 공사도 시작 해야지. 리체 전용으로, 세트이어 스 공작성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호화스럽게.”
고모가 ‘세르이어스 공작성’이라 는 말에 눈을 번득이며 끼어들었 다.
“일단 데뷔탕트부터 다시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귀족 아가씨 잖아.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성년 생일 파티를 뺏긴 게 아직까지도 분한데.”
“음, 저는……”
내가 차분히 말문을 열자, 모두 다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보다는, 일단 저희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의 끝을 지켜 보고 싶어요.”
그 사람들이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을 보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즐거울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말에 응접실에 앉아 있던 우 리 사이에 다시 분노의 감정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황자의 배에 직접 검을 쑤셔 넣을 수는 없을까.”
고모는 어느새 벌게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하엘던 그 개새끼를 어떻게 죽여야 이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 나……”
“세이린, 개한테 사과해라.”
“아, 그렇군. 개 앞에서는 비밀로 해 줘.”
아빠의 말에 저렇게 즉시 긍정 하는 고모의 모습은 보기 드물었는데. 어지간히 마음이 맞는 모양이었다.
“황실 조사관이 다녀가셨어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곧 체포되실 거예요.”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대로 있으면 곧 진실이 밝혀지고, 제이드 황태자님이 알아서 처분해 주시겠지요.”
“분이 안 풀리는데.”
고모가 씩씩거리며 이를 갈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 다.
“안 그래도 곧 세르이어스 공작님이 오실 거예요.”
그 말에 아빠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에르안 세르이어스?”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진 것 같은 아빠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황실 조사관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좀 더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해 드리……”
“그 말을 믿니, 리체.”
아빠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찻 잔을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우리가 널 다시는 세르이어스 공작성에 안 보낼까 봐 전전긍긍해서 쫓아오는 거겠지.”
그 말에 할아버지가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지팡이를 짚었다.
“그 공작, 아주 몹쓸 놈이라고 들었다.”
“네?”
“혹시라도 협박 받고 있는 거 냐? 신분의 격차를 이용해 너를 몰아가고 있는 거라면 이제 너도 귀족이다. 비록 자작가지만 공작 가에 질질 끌려갈 일은 전혀 없 다!”
“그건 아니에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이글이글한 눈으로 소리치는 바람에 나는 기겁을 하여 고개를 저었다.
“그래? 좀 이상한 놈이라던데, 아냐?”
할아버지의 미심쩍다는 질문에 나는 망설이며 중얼거렸다.
“음…… 좀 이상하긴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에르안이 좀 이상한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르가 말에 따르면 겉과 속도 다르다던데.”
“확실히…… 조금 그런 면모 가……”
겉과 속이 다른 거야 디엘과 나 를 볼 때 표정의 온도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잔혹하고 피도 눈물도 없다면서!”
“일단 혈액의 흐름과 눈물의 분 비는 정상이고요. 그렇지만 다소 잔혹하시긴…… 하시죠.”
그리고 넝마 꼴이 된 웨데릭을 떠올리면 잔혹하다는 평가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딴 놈이 뭐가 좋다고!”
“그 이유는 제가 압니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이마를 짚자 고모가 재빨리 대답했다.
“리체는 껍데기만 봅니다. 시오 니를 닮았어요. 우리가 그 거죽 만 멀쩡한 미친놈에게서 어떻게 든 구해내야 합니다.”
“아니에요! 처음엔 그렇다고 생 각했는데, 지내면 지낼수록……”
내가 두 손을 저으며 황급히 말 하자 고모는 눈을 번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공작이 못생겼냐?”
나는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하 고 즉시 대답했다.
“엄청 잘생겼죠.”
“거봐!”
고모가 의기양양하게 콧김을 내 뿜고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리체, 여기 온 김에 공작성에 는 다시 돌아가지 마라. 너는 거기서 너무 오래 지냈어. 마침 네 방도 있고 하니까 이제 계속 여기서 살아.”
할아버지도 거세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일단 사건의 경과를 지 켜보더라도, 그동안 가족끼리 식 사도 하고 나들이도 가고…… 못 다한 얘기도 실컷 해야지. 일단 호적부터 올려야겠구나.”
“이제 귀족 신분이니 미들 네임도 새로 지어야 해. 내가 지어 줘도 될까?”
고모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시오니 어때?”
고모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난 옛날부터 네가 아르가 놈보다는 시오니를 더 닮았다고 생각 했어.”
“좋아요.”
나는 수줍게 웃어 보이며 대답 했다.
엄마의 이름을 미들 네임으로 쓴다니, 평생 소중한 것을 늘 가 까이에 간직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내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 나를 살리려고 온갖 수를 다 쓴 엄마를 회상하게 될 것 같았다.
리체 시오니 페렐르만.
드디어 다시 찾은 내 이름을 조용히 중 얼거려 보자 새삼 정말로 내게도 가족이 생겼다는 뿌듯함이 몰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