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8화
11. 제자리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펠릭스 어르신을 볼 수 있었다.
“리체……”
노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몰라봐서, 몰라봐서 정말 미안하다.”
예상하지 못한 첫 마디라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미안하다며 눈물을 그렁거리고 있는 어르신의 얼굴에서는 어디서도 원망스러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은 다리 또한 휘청 거리고 있어서 나는 황급히 펠릭스 어르신을 부축했다.
“맨 처음 네가 이곳에 왔을 때 의심해서 미안해.”
“아무것도 없는 평민 여자애가 희귀한 마법 아이템을 쓰겠다는 데 의심하신 건 당연하죠.”
나는 재빠르게 대답하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을 섞어 웃어 보였 다.
그런 걸로 어르신을 원망할 생 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그 런 생각을 하시고 계셨다니 맥이 빠졌다.
문득 나 역시 비슷하게 혼자 쓸 데없는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다.
서로가 너무 소중하여 스스로가 자격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전긍긍해 하는 표정이 아마 마차 안에서의 내 얼굴과 똑같았 을 것이다.
“아르가가 그러는데 네가 많이 섭섭해한다고 하더구나.”
“네?”
“어색해하고 자꾸만 자기를 피 하려고 한다고. ‘아빠’ 소리가 그 렇게 듣고 싶은데 여전히 자작님이라고 부른다면서.”
“아, 그건……”
나는 긴장한 얼굴로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내 입으로 말하기가 새삼 어려 워서 주저할 수밖에 없었으나,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느니 솔 직하게 말하는 것이 나았다.
먼저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고 나를 보자마자 사과하신 펠릭스 어르신처럼.
“저 때문에 시오니 님이 잘못된 것 같아서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신 분인데 괜히 제가 태어나는 바람에……”
각오했는데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어야 했다.
“다들 저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 을까 싶고……”
“세상에, 아가.”
펠릭스 어르신이 내 손을 부여 잡으며 말했다.
그가 상상도 못했다는 듯이 한 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 니.”
나는 한 번도 ‘아가’라는 호칭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초청장을 받았을 때 이미 눈치 챈 바지만, 그래도 가슴이 툭 하고 떨어졌다.
“우리 모두 너를 너무 오래 기다렸단다.”
그 한마디로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왔던 불안함이 눈 녹듯이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펠릭스 어르신의 눈에도 내 눈 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어르신, 대리석 길은 관절염에 좋지 않……”
“아냐.”
그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같이 걷고 싶구나.”
저택까지 쭉 뻗은 대리석 길을 걷는 내 다리 역시 떨리기 시작 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기 다렸다는 이 길을 걷는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그리고 그 길을 둘러싼 백백한 라베리 섬의 관상수들 역시 새로 운 의미로 다가왔다.
대리석 길을 모두 다 걸었을 때, 저택 문이 열리며 세이린 경이 나왔다.
“시오니가 가장 좋아하던 꽃이야. 노란색을 좋아했거든, ”
그녀는 내게 노란 프리지아 꽃 다발을 한아름 안겨 주었다.
“정말 미안하다……. 알아보지 못해서, 네게 처음에 못되게 말해서.”
아찔할 정도의 짙은 꽃향기를 맡고 있자니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너무 미안해. 너는 알아서 이 집에 찾아와 주었는데.”
“상식적으로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어요. 저야말로…… 저 때문 에 시오니 님이 돌아가신 것 같 아서……”
“시오니 님이라니, 리체.”
세이린 경이 내 볼을 어루만지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잖아.”
그 말에 내 볼에 눈물이 주룩주 룩 흐르기 시작했다.
미안해서 차마 속으로도 엄마라 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내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바구 니에 초록색 리본을 매어 주던 수정 구슬 속 여자의 초록색 눈 은 분명 나와 비슷했다.
작은 키와 동글동글한 얼굴형까 지 나는 그녀를 닮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는 고모잖아.”
“아……”
“고모라고 불러 줄 수는 없겠 니? 아직 우리가 용서가 안 돼? 아르가 놈한테도 도저히 아빠라 고 못 부르겠어?”
“용서라뇨. 애초에 그런 생각도 안 했는걸요.”
우리의 대화에 옆에 서 있던 펠릭스 어르신이 침울하게 말했다.
“아까 내게도 어르신이라고 하더구나……”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단숨에 말했다.
“할아버지, 고모.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번도 불러 보지 않은 호칭이 라 조금 어색했지만, 서로가 그 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셋 다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맨 처음 이 자작저에 발을 디딜 때부터 내 방이 만들어질 때까지 일련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던 자작 저의 사용인들도 저마다 훌쩍이 더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르가는…… 그 바보는 무섭다고 시오니의 무덤에 가 있어.”
안 그래도 보이지 않아서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네가 또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대할까 봐, 자신을 몰라봤다고 원망할까 봐 두렵대.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멜 정도로 간절했으면서 겁은……”
“저랑 비슷하네요.”
나는 훌쩍이면서도 살짝 웃었다.
“저도 그동안 겁이 나서 어쩔 줄 몰랐거든요.”
아마 비슷하게 행동했던 것은 그를 닮아서겠지.
“……엄마 무덤에 가고 싶어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던, 이름 모를 농가에서 발견된 시신이 묻혀 있는 엄마의 무덤.
***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엄마의 무덤은 페렐르만 자작저 뒤의 작은 언덕에 있었다.
“나는 다리가 아파서 갈 수가 없다.”
물론 에나베 관절염을 앓고 계시는 분과 함께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모는 다른 이유로 함께 가는 것을 거절했다.
“난 아르가 놈이 질질 짜는 거 보기 싫어. 그 꼴 보면 당분간 잘해 주고 싶을 것 같단 말이 야.”
고모는 자신의 눈을 연신 흠치면서 말했다.
“혼자 갈 수 있지?”
부녀 상봉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고모의 마음이 느껴져서 나 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혼자 걷기 시작했다.
가을이 눈앞에 온지라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릴 뿐 주변은 고요했다.
하나뿐인 오솔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오니.”
각종 아름다운 꽃에 둘러싸인 그녀의 묘비에는 ‘시오니 나니아 페렐르만, 이곳에서 영원한 평안 을 얻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갈색 머리의 중 년 남자가 가만히 서서 다정하면 서도 서글픈 목소리로 읊조리고 있었다.
“네가 내게 온 것은 너무나 기적 같은 일이었는데…… 결국 지키지 못하고 말았어.”
목소리가 얼마나 슬픈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춰서고 말았 다.
“그때 연구고 백작이고 뭐고 그 냥 함께 라베리 섬으로 향했더라면.”
수없이 이어지는 후회가 느껴졌다.
내가 차마 발걸음을 옮기지 못 할 동안, 그는 한숨을 쉬며 떨리 는 손으로 묘비를 쓸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너무 겁이 나.”
대답 없는 엄마가 야속할 만큼,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날이었다.
“우리의 딸이 기적 같이 내게 왔는데, 이번에도 내 부족함으로 놓치고 말까 봐.”
내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리체의 실력은 6년 전에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 그래서 이사벨과 에르안이 리체에게 많이 의존한지라 마음 놓고 대륙 방방곡곡을 뒤지고 다녔단 말이야. 아무리 가까이 있으면 더 모른다고 하지만, 어떻게 한 번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디엘이 그토록 둘이 비슷하다고 했건만, 너무 가까이 있는 사람 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이해할 수가 있었 다.
“난 리체가 공작성을 지키며 친자 검사 연구를 할 동안 그 혜택만 보았지 한 번 도와준 적이 없 어.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개 가 아냐……”
점점 더 잠겨 가는 목소리를 들 으며 내 볼에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그 애가 수정 구슬을 본 뒤부 터 ‘자작님’ 하고 부르면서 눈도 마주치지 않을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어.”
나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 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한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아서.”
그동안 수없이 했던 자책의 말 을 내뱉고 난 뒤, 그는 잠시 정 적을 지켰다.
“항상 보고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 끝도 없이 간절해……. 너 를 끌어안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그는 하염없이 묘비를 쓸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딸은 혼자서도 너무나 영리하고 씩씩하게 컸다고, 뛰어난 의사인 건 나를 닮았지만 다른 건 다 너를 닮아서 야무지기 그지없다고, 네가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정말로 뿌듯할 것 같다 고……”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나는 차마 미안해서 다가가지도 못한 채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용 서를 구해야 할지 너는 알고 있냐고.”
그가 언제까지고 서글픈 말을 중얼거릴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천천히 걸어갔다.
이른 낙엽을 밟는 소리에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6년 전에 처음 본, 결코 좋지는 않은 첫인상이었지만 어느새 가 족을 떠나 정말 많이 친숙해진 사람.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