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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27화 (127/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7화

‘마력의 돌’을 반출시킬 수 있는 또 한 사람, 제이드 황태자는 내가 태어났을 당시 5살이었기 때 문에 아예 고려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장난감이랑 바꿨다고 하 던데……. 그래서 지금 황제 폐 하께 굉장히 혼나고 그 이후부터 아예 마법 아이템에는 관심도 두 지 않으셨습니다.”

조사관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 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 시녀는 그냥 희귀한 마법 아이템을 갖고 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뭐, 말도 안 되는 속설이지만 그런 소문이 도 는 건 사실이니.”

물론 5살짜리 아이가 장난감에 홀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육올 받은 데다가 주변 에 사람도 많았을 텐데!

“황태자님은 어릴 때부터 운동 신경이 뛰어나 시종들을 쉽게 따 돌리곤 했죠. 그래서 남들 몰래 반출 허가를 해 주신 겁니다.”

테이블 밑에서 덜덜 떨리기 시 작한 내 손을 에르안이 살며시 잡아 주었다.

“반납도 제때 잘 되었고 별사건 이 벌어지지도 않았지만, 황실의 권위를 너무 떨어트리는 사건이 라 외부에는 알리지 않고 있었습 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저와 황제 폐하, 직속 시종뿐입니다. 그 시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으로 죽었거든요.”

“혹시……”

에르안은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말했다.

“마력의 돌이었나요?”

조사관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떻게 아셨지요?”

그러니까 시오니 님은 나를 낳 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마법의 돌로 인해 ‘출산으로 인한 사망’ 으로 위장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아마 하엘던 황자가 이시더 남작에게 직접 파견한 기사 중 하나가 갖고 있었을 테고, 혼자 남아 있는 시오니 님에게 마력의 돌을 써서 살해했겠지.

그렇다면 살인 사건이 아닌 출산으로 인한 사고사로 판단되어 완전 범죄가 되는 것이다.

모든 내용을 듣고 있던 케인즈 경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조사관들이 나가고, 나는 멍하니 앉아 케인즈 경에게 물었다.

“케인즈 경, 제가 맨 처음 전하를 뵈었을 때…… 분명히 조용히 책을 읽고 계셨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다섯 살부터 지금까지 한 결같이 아무 생각 없으실 줄은 몰랐는데.”

케인즈 경은 한숨을 푹 쉬며 대 답했다.

“그나마도 전쟁 끝난 기념이라며 몇 장 보시고 관두셨습니다. 본디 책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아, 무슨 책인지는 묻지 마십시오……. 제가 민망하니까요.”

“아니, 제국의 미래가 책을 안 좋아하면 어찜니까?”

“어린 시절부터 책만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되셨습니다.”

한 때 나의 양부를 자처하던 케인즈 경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고 싶군 요……. 이 모든 일을 숨기지 않 고 전하께 다 전달해드리겠습니 다. 그게 제 역할이지요.”

“마력의 돌을 동원했다는 건 정말로 자작 부인을 죽이려고 했다는 거겠지.”

조사관들이 돌아가고, 에르안은 내 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 탄생과 별개로, 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목숨을 잃으셨을 거야.”

나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내가 탄생하고 시오니 님이 무 사했을지라도, 하엘던 황자가 파견한 기사들이 그녀를 죽였을 것 이다.

애초에 마력의 돌을 반출한 것 자체가 시오니 님을 죽이려고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신탁에 따르면 나만 죽이면 되는데……”

“글쎄, 이왕 손에 피를 묻히게 된 거, 페렐르만 자작의 행복을 완벽하게 부수고 싶다고 여긴 것 아닐까.”

에르안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 렸다.

“사냥 대회 때 보니까 페렐르만 자작에 대한 열등감이 뿌리 깊어 보이던데.”

끊임없이 페렐르만 자작을 깎아내리려고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에르안의 추론은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오래전부터 자식을 간절하게 갖고 싶어 했다.

그런데 페렐르만 자작은 하엘던 황자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의학 지식을 소유해서 사사건건 황실 의료진 앞에서 그의 자존심을 건 드린 것도 모자라, 그토록 가지 고 싶었던 자식까지 결국 먼저 가져 버렸으니…….

예전에 보았던 초상화만 봐도 얼마나 그가 아내의 임신으로 행 복한 얼굴을 하면서 지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자식으로 인해서 아내를 잃은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니, 정 말로 악질이었다.

“마력의 돌은 희귀한 황궁 아이 템이고, 이시더 남작을 믿지 못 해서 본인의 기사를 직접 투입했겠지.”

“정말……”

나는 눈을 내리깔며 숨을 골랐다.

“정말 용서할 수가 없어요.”

치맛자락을 잡은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내 손가락 끝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물론 황태자님이 알아서 처분 해 주시겠지만, 그래도 분이 풀 리지가 않아요. 감옥에서 사형당 하는 건 너무 편안한 결말인 것 같고요. 아, 전 원래 선량한 평화 주의자인데 왜 이렇게 온갖 나쁜 생각들이 드는지……”

“사랑하면 서로 닮아 가서 그런 것 아닐까?”

“그건 좀 싫은데”

내가 부루퉁하게 말하자 에르안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쓸면서 속삭였다.

“하지만 내가 계속 하는 말이잖 아……. 죽이는 건 제일 쉽다고.”

외양도 딱히 선하게 생긴 인상 이 아닌데 그런 내용을 속삭이니, 무슨 아름다운 악마가 한 마 리 현신한 것 같았다.

“똑같이 대해 줘야지. 너와 페렐르만 자작이 헤매고 고통스러웠던 지난 세월을 똑같이.”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내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 리가 들렸다.

“리체?”

디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에르안의 손을 놓고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응, 무슨 일이야?”

디엘은 내 뒤의 에르안을 흘끗 보더니, 몸이 잔뜩 굳어서 내 눈도 바라보지 않고 재빨리 말했 다.

“페렐르만 자작저에서 서신이 왔어. 정확히 말하면 초청장이야.”

나는 디엘이 내민 초청장을 받아 들었다. 예전에도 펠릭스 어르신은 나를 보고 싶다며 이런 초청장을 보내신 적이 있었다.

“심지어 마차까지 보내 주셨어. 바로 출발하는 게 어때?”

디엘은 속사포처럼 쏟아 놓고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꾸벅 인사를 하더니 나가 버렸 다.

내가 황당하다는 듯이 뒤를 돌자, 에르안이 재빨리 무시무시했던 표정을 온화하게 바꾸는 것이 보였다.

“디엘한테 왜 그러세요?”

“어린 시절의 심한 트라우마 때문에.”

“트라우마는 디엘이 생긴 것 같은데……”

나는 도망치듯 사라진 디엘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들으면 디엘이 공작님을 괴롭히기라도 했는 줄 알겠어요.”

“네가 나이있는 친구를 선호한다고 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그나저나……”

에르안은 본인도 유치하다는 걸 아는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초청장이 온 걸 보면 역시 네 걱정은 쓸데없는 거였던 거야. 그렇지?”

“뭐…… 음.”

“분명히 페렐르만 가문은 널 정말 기쁘게 환영할 거라니까. 진짜야. 자신감을 가져.”

나는 펠릭스 어르신의 이름이 새겨진 초청장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을 가지라니, 나는 내 평 생 그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만큼 내게 가족이라는 건 간 절하면서도 어려운 것이었다.

“가족이 있는 삶이 처음이라 제 가 뭐든지 서툰가 봐요. 이렇게 머뭇거리는 성격이 아닌데.”

페렐르만 자작저에 뻗어 있는 대리석 길이 눈에 흰해서 내 목 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 길을 보존해 놓은 것을 보면 서 사실 그 딸이 너무 부러웠는데, 그게 나였다니.

계속해서 나를 찾아 헤맨 페렐르만 자작도,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단순한 매력이 있는 세이린 경도, 한 땀 한 땀 직접 수를 놓은 손수건을 선물해 주신 펠릭스 어르신도 다 내게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다시 찾은 가족들이 너무 마음에 들고 꿈만 같아서 오히려 더 조심스럽고 어려웠던 것 같았다.

“아마 너무 간절해서 그런가 봐요.”

에르안은 다 안다는 둣 나를 가만히 안고 토닥여 주었다.

“나도 같이 갈게.”

“네?”

“처가댁에 미리미리 인사드려야지.”

내 황당하다는 표정을 본 뒤 에르안이 씩 웃으며 정정했다.

“농담이고, 조사관들하고 있었던 일을 정리해서 말하려고 해. 넌 지금 자작 부인 이름만 나오면 울먹이잖아. 너랑 직접적으로 관 련된 일인데 네가 객관적으로 잘 전달할 수 있겠어?”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왠지 앞의 말 역시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확실히 페렐르만 자작은 황실에서 조사관이 나올 때 함께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사실을 전달해 줄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나 역시 내 입으로 마력의 돌 얘기를 하다가 평정심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간다면 가족 상봉을 방해할 테니까 조금 시간차 를 두고 가도록 할게.”

그는 내가 다소 염려했던 한 가지조차 이미 생각한 듯 생긋 웃 으며 덧붙였다.

페렐르만 사람들을 만나는 데 에르안이 껴 있으면 확실히 그를 의식해서 모두 어색해할 것 같았 다.

하지만 적절한 시간차만 둔다면 에르안이 오는 건 확실히 좋은 의견이었다.

진실을 전달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는 것도 중요했 기 때문이다.

이 모든 비극을 초래한 사람에 대해서 그냥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을 지켜본다.’ 외에는 딱히 떠 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무래도 분 이 풀리지 않는 게 아마 나와 다 똑같을 것 같았다.

나나 페렐르만 자작, 세이린 경 은 모두 잔인한 복수를 위한 방도를 생각해 내는 데에는 재능이 없었다.

에르안을 데려가서 그 재능을 맘껏 펼치라고 해야 모든 사람들의 속이 조금 시원해질 듯했다.

내가 페렐르만 자작저에서 온 마차를 타러 나가는데, 갑자기 나와 함께 있던 에르안을 불러 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에르안!”

이사벨 마님이었다.

“잠깐!”

항상 우아하게 걷던 그녀가 숨까지 헐떡일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늦여름 비가 온 뒤 살짝 쌀쌀해 지기 시작한 날씨 때문에 걸친 슬이 비뜰어져 있었다.

그녀의 옷매무새가 이토록 허물어진 것은 처음 보는 일이라 나 역시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페렐르만 자작저에 간다며.”

“어머니?”

에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자 이사벨 마님이 황급히 말했다.

“무조건 납작 엎드려라. 그리고 페렐르만 가문에 전해.”

그녀는 에르안의 팔을 붙잡고 눈을 마주치며 간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 아들이 무조건 다 맞추겠다고. 아니, 공작가 전체가 모두 리체에게 맞출 테니 온갖 갑질 다 해도 된다고 해라. 뭐라도 필요한 것 있으면 무조건 말하고.”

에르안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닥을 기고 오겠습니다. 잘할게요. 걱정 마세요.”

“지금 가는 거지?”

“리체는 지금 가고, 저는 다른 마차로 좀 시간차를 둬서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잘됐구나. 따로 줄 것이 있었는데.”

“지금 주셔도 되고요. 아무래도 바쁘니까.”

이사벨 마님은 에르안에게 무언가를 비밀리에 건넸는데, 그것에 대해 속삭이시는 말까지는 듣지 못했다.

에르안은 그녀에게 받아든 것을 소중히 품에 넣더니, 갑자기 한숨을 쉬며 감동받았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그동안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혹시라도 어머니께서 리체를 반대하실까 하는 생각 에….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동안의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사벨 마님 앞에서 저렇게 온순한 표정을 지으며 진정으로 참회하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 했기 때문이다.

“이런 귀중한 것을 폐기하라고 난리쳤던 과거의 제 말을 귓등으 로도 안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언제든 제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홀려 주세요.”

“드디어 네 인성 교육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구나.”

“안 그래도 느낀 바가 정말 많습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 착하게 살아야 했는데.”

“뜻밖의 참교육이구나. 그래도 어미니까 이렇게 쉽게 받아 주는 거란다.”

이사벨 마님은 에르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어쩌겠니. 쌓은 업보가 있으니 앞으로 좀 굴러야지. 순탄하지는 않아 보이는구나.”

나는 끼어들려다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에르안이 돌아온 이후, 모자의 관계가 이토록 좋아 보이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곧 갈게.”

이사벨 마님과의 대화를 끝낸 에르안은 내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며 속삭였다.

“불안해했던 만큼 행복해질 거 야.”

고맙다는 의미로 그에게 생긋 웃어 준 뒤, 나는 이사벨 마님의 배웅올 받으며 에르안보다 먼저 페렐르만 자작저로 출발했다.

처음 가는 길도 아닌데 속이 울렁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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