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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26화 (126/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6화

“잠깐만요.”

아르가는 재빠르게 말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세르이어스 모자는 절대로 리체를 보내 주지 않을 테니까요.”

똑같은 눈매를 가진 이사벨과 에르안을 기억하고 있는 세이린이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표정의 펠릭스를 보며 아르가가 말을 이었다.

“특히나 공작이 아프다면서 드러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주치의 계약서를 쓴데다가 책임감까지 강한 리체를 데려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실 제로 환절기까지 봐야 할 사후 검사도 있고요.”

“그러면……”

“차라리 여기로 불러서 만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르가는 본디 황궁 조사관을 직접 보기 위해 시간에 맞추어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어차피 리체와 이사벨이 있는 이상 자신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 판단을 내렸다.

너무 빠른 진행을 부담스러워하는 리체를 두고 이사벨과 에르안이 결혼이니 양녀니 흥분해서 떠들어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중요했다.

아무리 페렐르만 자작가가 막대한 부를 쌓았다고 해도 전투력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사벨과 에르안이 꾀병이라도 부려서 리체를 붙잡고 늘어진다면 세르이어스 공작가와 전투를 벌여 리체를 데려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하엘던 황자의 심문에 저는 불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언은 그때 해도 충분하지요. 일단 리체를 데려오는 게 좋겠습 니다.”

아르가는 한숨을 쉬며 느리게 말했다.

“물론…… 우리를 용서하지 못 하고 다시 세르이어스로 간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리체가 열세 살에 공작성에 들어오고 성년이 된 지금에 이르기 까지, 리체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이사벨이었다.

만일 리체가 자신을 못 알아보고 처음에 날을 세웠던 페렐르만이 싫다고, 세르이어스에 남겠다고 하면 그때는 보내 주어야겠지만, …….

생각이 그쪽으로 깊어질수록 어두워지는 아르가의 얼굴을 보며 세이린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대리석 길은 걷게 해야지.”

세이린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공작성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데에 동의해. 내 인생에서 가장 오빠가 도움이 되는 순간이야.”

“...그래, 초청장은 내가 써야겠다.”

펠릭스 역시 즉시 깃펜을 들었다.

***

“이시더 남작이 사라졌다고?”

하엘던은 보고를 듣고 나서 성가시다는 둣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관람탑 암살 계획마저도 실패했으니 이제는 최후의 방법밖에 없었다.

반란군을 궐기시켜 무력으로 끝 내는 것이다.

제이드가 생각보다 전투에 능해 서 어떻게든 암살로 끝내고 싶었 으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었 다.

반란군의 수도 이제 상당하거니 와 제이드는 아직 해상 전투 경 험밖에 없으니 승산이 꽤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이번 가을에 궐기하기로 하지 않았나.

“남작령 자체가 황폐화되고, 사용인들도 다 도망가 버려서........”

그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중얼 거렸다.

하필이면 로만의 단 하나뿐인 아들도 행방불명이고, 영지도 어음 때문에 은행에 넘어갔다고 들었다.

로만을 협박하고 움직일 수 있 는 것들이 없다는 뜻이었다.

“추적 중이라 곧 소재를 밝힐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설마 배신일까요?”

“그렇게 멍청할까 싶긴 한데……. 세르이어스 쪽에서 무슨 변수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뭐, 딱히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 고 단박에 내 이름을 말하지는 않을 테니 시간의 여유는 있을 거다.”

하엘던은 턱을 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죽이는 게 안전하겠지. 한발 늦어 놓쳤어도 상관없게 만들면 돼.”

“네?”

“이제 행동에 옮기자, 이 말이다.”

원래 예상했던 날짜보다 조금 빠르긴 하지만, 원래 산발적으로 궐기할 예정이었으니 별 상관은 없었다.

“제이드가 출정하게 만들어야지. 가장 먼저 칠 곳은……”

하엘던은 지도를 펴고 망설임 없이 군사를 처음으로 일으킬 영지를 짚었다.

“그리고 황실근위대에 연락해. 화풀이할 상대가 하나 있으니.”

***

황궁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조사단은 원래 도착하기로 했던 저녁 보다 훨씬 이른 아침에 도착했다.

그래서 페렐르만 자작이 없는 상태에서 이시더 남작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지하 감옥에서 끌려나온 이시더 남작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초췌했다.

예전에 자주 본 얼굴이고, 마지 막에 만났을 때에는 직접 대화까지 오래 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 보는 원수처럼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저 남자가 배 속에 있던 나를 없애려고 했으며 시오니 님을 추적하고 페렐르만 자작에게 거짓 말을 한 사람…….

예전에는 단순히 에르안과 이사벨 마님의 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얼굴을 보는 것 만 해도 중오스러웠다.

이시더 남작은 황궁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조사단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았다.

조금이라도 틀린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지적하려고 했는데 알아서 진실만을 얘기했다.

에르안 말로는 웨데릭이 걸려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자작 부인이 도주 한 것을 알았을 때, 황자님이 몰래 보내 주신 기사 몇 명을 보내 추적한 것입니다. 정말로 딸만 없애라고 했습니다.”

그는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자작 부인을 죽일 생각은 정말 없었습니다. 우리 영지에 방문한 사람이 죽는 건 제게도 위험 부담이 너무 큰 일이니까요……. 페렐르만 자작이 직접 부검하지 않았습니까. 마력에 의한 역류라고요. 저는 자작 부인만큼은 정말 안 죽였습니다. 그냥…… 나중에 확인하니 죽어 있었다고요.”

시오니 님과 친했던 이사벨 마님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내 심장은 더 아프게 죄어 드는 것 같았다.

페렐르만 자작이 돌아오면 이런 내 죄책감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는데도 시오니 님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자꾸만 위축되었다.

“여기, 증거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시더 남작은 자신에게 내려온 지령이 적힌 서신을 직접 내놓기 까지 했다.

[관람탑의 실패 때문에 이쪽도 예산이 부족함.

메일리스 공국의 일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 것을 엄중 문책할 예정임.]

“이 서신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관람탑도 반란군의 소행이었군요.”

케인즈 경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엘던 황자님께서는 언제나 의료 연구진이 좋다며, 황위에 욕심이 없다 하셨는데……. 정말 사람 속은 모르는 거군요, 특히 황궁에서는.”

“훤히 속 보이는 사람 하나 있지 않습니까.”

에르안이 빈정거렸다.

“이 정도면 제국의 미래를 걱정 해야 할 때 아닙니까?”

“뭐……”

케인즈 경은 난감하다는 둣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황태자님은 워낙에 실력이 출중하시니…… 무슨 일이 닥쳐도 살아남으실 거고, 반란이 일어나도 다 진압하실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운도 좋으십니다.”

하기야, 제이드 황태자는 실제로 그 어떤 공격을 당해도 해맑은 얼굴로 멀쩡하게 다 죽이고 돌아올 사람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황궁에서 온 조사관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엘던 황자님과 이스엘라 황자비를 포함한 가담자들을 모두 다 즉시 잡아들여 조사하도록 하 지요. 반역은 중대한 사안이니.”

이다음부터는 제이드 황태자가 알아서 할 것이다.

나는 아무 예외도 없이 ‘다 사형’을 때려 버렸던 제이드 황태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이 꽃밭이기는 했으나 자비로운 성격은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을 기획한 첫 시작,  하엘던 황자는 내가 사형 선고를 받았던 그때처럼 그렇게 제이드의 손에 참수당하겠지.

어쨌든 이 모든 자백을 받는 데 에 내가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웨데릭을 잡아들였고,  이시더 남작이 아무것에도 기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시원하 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에르안의 말대로 그냥 죽이는 것은 너무 쉬운 결말 아닌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건국제 때 그 사람의 아이를 갖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처방까지 했다.

‘무조건 비밀로 하고 싶어 했지만, 제이드 황태자에게 들킨 이상 분명히 그 비밀은 지켜지지 않을 텐데……”

내가 이어지는 생각에 몰두했을 때, 에르안이 조용히 황궁 조사관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까지 한 번도 황궁 마법 아이템을 반출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나는 살짝 놀라 에르안을 바라 보았다.

조사관 중 가장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제 폐하께서는 황위에 오르시고 나서 단 한 번도 마법 아이템의 반출을 허가하신 적이 없습니다. 황태자 시절부터 마법은 집시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싫 어 하셔서.”

황실 조사관들은 반역에만 집중 했지 시오니 님의 사인 같은 것 에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페렐르만 자작과 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조차 않았기 때문에 에르안의 질문을 뜬금없게 여기는 듯했다.

“거봐요.”

나는 기운 없이 속삭였다.

확인한다고 해서 그 유명한 사 실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음, 많이 중요한 사안입니까?”

그때, 조사관은 망설이며 조심 스럽게 반문했다.

에르안이 몸을 기울이며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는 천진한 눈을 해 보이며 말 했다.

“반역의 무리를 더 추론하는 데 에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 습니다.”

사실 반역과는 별 관계가 없었 지만, 아마도 반역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야 사실대로 말해 줄 것 같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조사관의 표정을 볼 때, 분명 뭔가가 있는데 황실의 체면 등과 관계되어 말할까 말까 고민 중인 듯했다.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사안일 것 같습니다. 음, 아실지 모르겠 지만……”

에르안은 눈을 접어 보이며 웃 었지만 나는 그동안 그와 오래 지냈기 때문에 입 끝이 살짝 떨 리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저는 황태자님이 언제나 충신 이라고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니 믿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의 연기와 거짓말은 능숙했으 나 그런 말을 하는 자기 자신에 게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져 서, 조사관이 한숨을 한 번 쉬고 체념한 둣이 말했다.

“황태자님께서 4살인가? 5살 때 하나 반출시키기는 했습니다. 상대는 궁에서 일하는 시녀였고요.”

“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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