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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25화 (125/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5화

“우울한 생각하지 말고, 내일 황실 조사단이 도착하면 하엘던 황자와 이시더 남작에게 어떻게 제대로 복수할지나 생각하자.”

“어…… 음……”

“잔인하고 나쁜 건 싫어?”

계단을 오르던 에르안이 어딘가 소름끼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야 내가 정말 잘하지. 생각 안 나면 내게 맡겨.”

확실한 건 그가 정말로 잘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연구실에서 한 번 본 웨데릭의 처참한 꼴을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에르안이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페렐르만 자작이 돌아오면 네 솔직한 마음을 얘기해. 내가 보기에 페렐르만 자작은 네 눈치를 보느라 마음껏 좋아하지도 못하 고 있으니까.”

“좋아할까요?”

“일단 말해 봐. 네가 딸이 아니었을 때도 페렐르만 자작은 널 많이 아꼈잖아.”

“……네.”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드디어 웃네.”

에르안이 안도가 된다는 둣 말 했다.

“그거 알아?”

“네?”

“네가 웃으면 세상이 멈춘 것 같아.”

그가 짙게 웃으며 내 젖은 머리 카락의 물을 꼭 짜 주었다.

“열세 살, 네가 같이 공놀이하 자고 할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

옛날 생각이 나자 나 역시 그를 키우다시피 했던 예전의 그 감정 이 되살아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신 따위가 아무리 네게 못되게 군다고 해도, 너는 내게 구원이 야.”

작정하고 유혹했던 그때처럼,  에르안은 작정하고 나를 위로하 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리체, 너를 아는 사람 들이면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날 밤, 에르안은 내가 잠들 때까지 내 침대 머리맡에서 나를 지켜봐 주었다.

“그러니까 피하지 마, 리체.”

“네가 워낙에 빛나는 사람이니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을 거라고 믿지만, 나쁜 결과가 나오더라도 내가 무조건 옆에 있을 테니까.”

훌쩍 달라진 외양만큼이나 속까 지 깊어져 있다는 것이, 그래서 약해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남 자가 되었다는 것이 와 닿았던 밤이었다.

[나도 약속할게. 꼭 건강해져서,  온갖 것들로부터 너를 지켜 줄 거야.]

아주 옛날, 어린 에르안이 내게 했던 약속처럼 그가 온갖 나쁜 생각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는 느낌이었다.

설핏 잠이 깰 때마다 걱정스러 운 눈으로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마음이 움직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내게 애정을 갈구하며 칭얼거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약해졌을 때 진심으로 함께 비를 맞아 주고 토닥여 줄 줄 아는 연인이었다.

에르안이 이렇게까지 잘생기지 않았어도 결국 좋아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건 상처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줄 어든다는 뜻이라는 걸 나는 처음 으로 알았다.

에르안으로 인해서 두려운 상황 이 벌어진다고 해도 위로받을 수있다는 확신이 생겼기에.

그래서 나는 다음번에 페렐르만 자작을 보면, 에르안의 말마따나 그동안 어색하게 대했던 것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

아르가는 페렐르만 자작저에 가서 펠릭스와 세이린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하엘던 황자가 무슨 신탁을 받았는지, 시오니가 어떻게 죽었는 지, 그리고 실종된 딸이 누구인 지.

전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분 노와 눈물을 감출 수 없는 긴 이 야기였다.

리체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대목에서는 펠릭스와 세이린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번져 가는 환희와 감격의 맥을 끊은 것은 아 르가의 초조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리체가 너무 의기소침합니다.”

아르가는 무거운 표정으로 이마 를 짚었다.

“아버지라고…… 다시 부르지도 않고. 그냥 어색하고 깍듯하게 자작님이라고 하더군요.”

“아니, 대체 왜……”

세이린이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 며 말했다.

“그냥 여기 데려오지 그랬어? 이제 리체의 집은 여기잖아.”

“당연히 같이 가자고 했지.”

아르가는 시무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런데…… 거절하더라고. 아,  세이린 경과 펠릭스 어르신께 안부를 전해 달라는 말만 덧붙였다.”

“뭐?”

세이린 역시 심각한 얼굴로 입 을 벌렸다.

“세이린 경? 펠릭스 어르신? 내 가 고모고, 아버지가 할아버지잖아. 왜 호칭이 그래?”

“글쎄다.”

아르가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울면서 좋아 한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니 까 서운한 게 많은지……”

아르가의 그 말에 펠릭스와 세이린 역시 어깨를 축 내려트렸다.

“걸리는 게 너무 많아.”

아르가는 리체의 어색한 표정을 보면서 머리 아프도록 생각한 것 들을 한 번에 옮었다.

“처음에 보자마자 건방진 꼬마라고 했고, 친자 검사를 도와준 다는데도 의심부터 하고 제니한테 감시도 시켰어. 첫눈에 알아 보지 못한 내게 당연히 실망했겠지?”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담 하다는 둣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리체는…… 사냥 대회에서 나 를 위해 하엘던 황자에게 직접 사과까지 받아 줬는데…… 나는 아버지람시고……”

그 말에 펠릭스 역시 큰일 났다는 둣이 중얼거렸다.

“그럼 여기 안 오는 것도 우리 에게 실망해서 그런가 보군.”

노인의 주름이 더 깊게 패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그 애가 개인 열 추적기를 달라고 할 때, 내가 얼마나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는 지……. 널 어떻게 믿느냐며 화도 냈어.”

펠릭스는 처음 리체를 만났을 때를 되짚어가며 한숨을 쉬었다.

“그 애는 날 위해 지금까지도 에나베 관절염 약을 보내왔는데……. 그래, 할아비한테 당연히 실망했을 거야.”

사색이 된 것은 세이린도 마찬가지 였다.

“나는 심지어 개한테 아르가의 대녀라고 페렐르만 사람은 아니라는 말까지 했어. 첫 만남이 그 모양 그 꼴이었으니 나를 고모라 고 부르고 싶을 리가……”

결국 첫 만남에서 리체에게 싸 늘했던 것은 셋 다 똑같았다.

미친둣이 찾아 헤매던 가족을 눈앞에 두고 의심의 눈초리로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리체는 알아서 우리를 찾아왔는데 우리가 몰라봤던 거야.”

아르가는 생각만 해도 후회가 된다는 듯이 이를 꽉 물었다.

친딸을 찾아서 너무 기쁜데, 그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리체라서 마치 꿈만 같은데 차마 미안해서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워낙에 짚이는 것이 많아서 왜 그러냐고 물으면 도리어 뻔뻔해 보일까 봐 이유도 묻지 못하고,

아르가는 본디 만인에게 까칠했 던 자신의 성격만 탓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이린은 아르가의 핏발 선 눈 을 보면서 다급하다는 둣이 말했다.

“그냥 여기로 도망 온 거야?”

“……너와 아버지께 알리기는 해야 하니까.”

아르가는 머리를 쓸며 대답했다.

“내일 아침엔 다시 출발할 거 야. 황실 조사단이 와서 이시더 남작의 자백을 듣기로 했으니까. 그 자리에 당연히 참석해야지. 헛소리 못하게.”

“그 새끼 내가 죽여도 돼?”

“안 돼.”

세이린의 살기 어린 질문에 아 르가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죽이는 건 너무 그 작자에게 쉬운 형벌이야.”

“두고두고 괴로움에 몸서리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수라고 세르이어스의 미친 공작이 그러더군. 맞는 말이긴 한데……”

아르가는 또 하나, 마음에 꽉 얹힌 것 같은 말을 쏟아 냈다.

“그놈이 리체를 꼬드겨서 결혼 을 전제로 한 교제를 하겠다고……. 당연히 안 된다고 공작 성 전체를 뒤엎고 싶은데 리체가 너무 의기소침해서 참을 수밖에 없었어.”

“안 돼!

세이린이 벌떡 일어났다.

“리체는 시오니를 닮았어. 얼굴 뜯어먹고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고. 세르이어스 공작이라니, 분명히 얼굴만 봤을 거야!”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부터도 위험하다 생각했지만…… 내 조카라면 더더욱 안 돼. 그 인간 정상이 아닌 것 같아 보이던데.”

“또라이 맞아. 핀트 나간 건 제 어미를 완전히 닮았거든. 그냥,  목숨을 살려 줘서 아끼는 줄 알 았는데 속내가 아주 검은 놈이었어.”

아르가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 를 끄덕였다.

“이제야 찾았는데, 결혼이라니 말도 안 되지. 그것도 그런 개차반한테.”

그때 펠릭스가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세게 쳤다.

광, 하는 소리에 아르가와 세이린이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그럼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느냐.”

노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번쩍이고 있었다.

“우리가 다 리체를 만나는 게 좋겠다.”

“네?”

“잘못한 게 있으면 잘못했다고 하고, 실망했다 하면 앞으로 못 해 준 것만큼 잘하겠다고 빌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르가 이 못난 놈, 리체가 의기소침하다고 우물 쭈물대다가 이리로 도망을 와 버려?”

“도망이 아니고.......”

“어차피 세르이어스 공작성으로 다시 간다고? 세이린과 나도 함께 가겠다. 내 손녀딸을 직접 봐 야겠어.”

“아, 아버지.”

“그리고 당연히 자작저로 데려 와야지. 리체가 거기 있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

아르가는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리체는 그곳의 주치의……”

“너 하나면 되잖아? 넌 그냥 거 기 있어라. 리체만 보내.”

“네? 저도 딸이랑 같이 있고 싶은데요?”

“그럼 둘 다 사표 써. 그 공작이 그렇게 약골이냐?”

그 말에 냉큼 대답한 사람은 세이린이었다.

“아뇨, 엄청 건강합니다. 우리 중 가장 의사 없어도 되는 사람이에요.”

“그럼 얘기는 끝났구나.”

펠릭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자. 그 미친 공작에게서 우리 손녀딸을 데려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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