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24화 (124/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4화

이사벨이 로만의 앞으로 무언가 를 툭, 하고 던졌다.

피에 젖어 있는 웨데릭의 크라바트였다.

“우리는 이미 대부분의 진실을 알고 있어. 네가 그에 맞지 않는 헛소리를 한다면 네 손으로 네 자식을 죽이는 셈이 될 거다.”

“누, 누님. 잠시만, 잠시만……”

“너희 부자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곳은 역설적으로 이곳뿐이 니까.”

로만은 이사벨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웨데릭이 걸려 있는 한 그는 결 국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세르이어스 공작령에서 는 자신의 자백을 토대로 제이드 황태자에게 반란군의 존재를 고 할 테고, 반란군 명단에 이름을 올린 로만과 웨데릭은 바로 처형 당할 것이다.

제이드 황태자는 순진했지만 그래서 단순하게 잔인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런 전략 없이 해적들을 모두 다 소탕해 버린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반란군 명단? 읽기 귀찮은데 그냥 다 죽여.’라고 해 맑게 말할 가능성이 컸다.

기적적으로 내부 고발자의 혜택을 받아 살아남는다고 해도, 음 지에 숨어든 반란군 무리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더 이상 그를 보호해 줄 영지도 작위도 재산도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세르이어스 공작가가 나서 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안위를 해치려 한 이시 더 남작을 직접 잡아들였으니 자신들이 처분하겠다 결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사벨의 말을 들어 보니 단번 에 죽일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로만은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로 이사벨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주 근시안적인 판단이었다.

이사벨과 에르안은 사이가 데면데면하여 서로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이는 절대 아니었지만, 각자 ‘죽이는 게 제일 쉽다.’라는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정말 안 갈 거냐? 다들 너를 보고 싶어 하는데……”

“네, 자작님.”

페렐르만 자작은 나의 거절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혼자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밝혀진 진실을 전하러 페렐르만 자작저에 간다고 했다.

나는 어색하게 그를 배웅하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유난히 긴 것만 같은 여름이었다.

사냥 대회에서부터 시작하여 내 성년을 지나고 건국제에서 죽을 뻔하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근사한 연인도 생겼 고 갑자기 생각하지도 못한 가족도 찾았다.

우산 없이 나왔는데 길었던 여름의 끝 무렵을 알리는 비가 추 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가 그치면 온도가 점점 더 낮아져 무더위는 가고 가을이 밀려들어을 것이다.

지난 해 반란군이 궐기하고 내가 어영부영 회귀해 버린 그 싸늘한 계절.

나는 하엘던 황자의 신탁을 들은 이후 계속해서 의기소침해져 있는 상태였다.

페렐르만 자작을 마주하면서도 괜히 내가 불편해져 더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곤 했다.

내가 그럴 때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돌아섰다.

“리체, 뭐해?”

정원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꽃 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머리 위 로 커다란 우산이 드리워졌다.

자신이 다 낫기만 하면 온종일 붙어 있을 거라고, 하고 싶은 것 이 너무나 많다던 에르안은 요 며칠 예전처럼 칭얼대지 않고 묵묵히 내 옆을 지켜 주었다.

역시 그동안 가끔씩 애처럼 엉겨 붙었던 것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 내가 어쩔 줄 모르 게 하려는 계산된 행동임에 틀림 없었다.

“비 맞잖아, 이러면.”

“아, 맞을 만한 것 같아서요.”

“무슨. 완전 다 젖었는데.”

“그렇게 맞다 보니까 이렇게 됐 네요.”

“페렐르만 자작이 나가는 것 같던데.”

“네, 자작저에 잠시 다녀온대요”

나는 우산 속에서 내 어깨를 감 싸는 에르안을 올려다보며 다소 기운없이 웃었다.

“펠릭스 어르신과 세이린 경께 말씀드리고, 또 시오니 님 무덤 에 가신다고.”

“너는 왜 안 가고.”

“뭐, 그냥……”

“.............”

에르안은 무거워 보이는 내 표 정을 보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맨 처음 수정 구슬을 보고 놀라움에 ‘아버지’라고 부른 뒤, 나는 그 이후에 페렐르만 자작에게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쓰러지던 시오니 님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가슴이 죄어 왔기 때문이다.

페렐르만 자작이 직접 부검한 시오니 님의 사인은 마력의 역류였다.

마력이 역류하는 경우는 단 두 가지였다.

숙련된 의사나 산파가 없어서 출산할 때 태아와 산모의 마력이 섞이는 경우, 아니면 황궁에 있는 ‘마력의 돌’을 쓸 경우.

마력의 돌은 워낙에 위험한 아이템이라, 황제나 황태자의 승인이 아니면 반출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는 재임 중에 그 어 떤 마법 아이템도 반출을 승인하 지 않기로 유명했다.

결국 시오니 님은 나를 낳다가 죽었다.

이사벨 마님이 이시더 남작을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이시더 남작은 황궁 조사관에게 모든 것을 다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했다.

케인즈 경이 직접 황궁 조사관 들을 비밀리에 파견해 달라는 요 청을 했고, 조사관들은 내일이면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도착할 것이었다.

이시더 남작이 모든 것을 다 사 실대로 말하고나면 하엘던 황자는 당장 감금되고, 사실 여부에 대한 조사가 공식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렇다면 하엘던 황자가 ‘페렐 르만 자작의 딸 때문에 하려던 일을 실패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듣고 나를 죽이려던 것부터 시작 되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게 되겠 지.

역설적이게도 지금 나 때문에 제이드 황태자가 관람탑에서 살 수 있었고, 이시더 남작을 잡아 내어 반역 역시 사전에 꼬리를 밟혔다.

어쨌든 신탁은 다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당장 하엘던 황자를 가만두지 않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황궁의 황자를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제이드 황태자에게 차근차근 진실을 알리고 그가 합당한 처벌을 내리길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시더 남작이 조사관들에게 모든 것을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당장 이시더 남작에 게 화풀이를 할 수도 없었다.

즉 나는 지금 합당한 처벌과 복수 아닌 복수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였다.

“쓸데없는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에르안은 손수건을 꺼내 빗물에 젖은 내 얼굴을 닦아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에르안의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저 때문에 시오니 님이……”

페렐르만 자작저에 드나들면서 시오니 님이 얼마나 사랑받았는 지 알고 있었다.

의사나 산파가 없다고 해서 모두가 다 마력의 역류로 죽는 건 아니었다.

출산을 하다가 마력의 역류 때문에 사망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뱃속에 있던 내가 무언가를 버티지 못해 빠르게 나오려고 해서, 그러면서도 제대로 나오지 못해서…….

내가 가족을 찾았다며 마냥 기뻐하지 못한 이유였다.

수정 구슬에서 나를 낳고 죽어 가는 시오니 님의 모습을 본 충격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 당해졌다.

막연히 ‘출산 때문에 시오니 님 이 죽었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시오니 님이 쓰러지는 장면에서 페렐르만 자작이 세상을 잃은 것 처럼 오열하는 모습을 직접 봐서 더 그랬다.

그동안은 ‘설마 우리가 가족?’ 이라는 생각에 설랬다면, 신탁 내용을 듣고 나서는 너무 큰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에 끝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것도 이 비극이 다 나로 인한 신탁 때문이니까…….

그냥 단순히 나를 낳다 죽었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존재에 대 한 죄책감이 밀려 들어왔다.

차마 미안해서 엄마라고 부르지도 못하겠고, 따라서 페렐르만 자작에게도 그 이후 아버지라는 소리가 목이 메어 잘 나오지 않았다.

페렐르만 자작은 안절부절못하 다가 그저 시간이 좀 필요할 테니 편해질 때까지 일단 기다리겠 다는 말을 했다.

오늘 아침도, 페렐르만 자작이 함께 자작저에 가서 펠릭스 어르 신과 세이린 경께 사실을 말씀드리고, 시오니 님의 무덤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조용히 거절했다.

페렐르만 자작저에 가득한 라베리 섬의 정원수를 떠올리니 내가 그 대리석 길을 걷는 게 죄스러웠다.

시오니 님을 떠올릴 때마다 짙은 그리움과 참담함을 내보였던 세이린 경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페렐르만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다렸던 아이가 하필 나라서 이 모든 비극이 생겼다고 생각할까 봐 겁났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제가 이 모든 불행의 기원일지도요. 내가 아니라 다른 아이가 시오니 님과 페렐르만 자작님께 잉태되었다면 그 신탁에 언급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 같아서..”

시오니 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에르안에게는 자꾸만 떠오르는 나쁜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어쩔 줄을 몰 라 하는데, 솔직히 말해 봤어?”

“아뇨.”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말을 꺼내는 것조차 좀 그래서요. 대화를 나누다가 진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면, 너무 상처받을 것같아요.”

“거듭 말하지만, 네 잘못 아니잖아. 내가 하엘던 황자처럼 방해가 되는 사람을 모두 죽였다면 이미 제국의 대가 끊겼을 거야.”

에르안은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 안으며 말했다.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그 야비한 놈이야. 그리고 또 하나, 빌어먹을 신때문이지. 아냐, 빌어먹는다는 게 그렇게까지 나쁜 표현 은 아니라고 그 집시가 그랬던가.”

그가 가만가만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 쓰레기 같던 집시 말이 맞아. 신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 해. 마음 같아서는 신전을 쑥대 밭으로 만들고 싶은 기분이야. 제기랄, 무슨 신탁을 그 따위로 해서……”

“결국 제게 내려진 신탁 때문에 진실을 알게 되기도 했죠, 뭐. 하지만 정말 애초에 신이 저를 위 주로 불행을 계획했다면…… 제 가 공작님의 연인으로 있는 것도 좀 찝찝해요.”

“.........뭐?”

“그런데 얼른 떨어지세요.”

나는 그를 약하게 밀어내며 말했다.

“저는 다 젖었잖아요. 공작님까 지도 젖어요. 누누이 말했지만 날이 더운 남부에서 회복한 몸이라, 날이 좀 추워지면 공작님 몸 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고요. 곧 환절기잖아요.”

“그러게.”

그는 낮게 웃었다.

“이미 젖었는데, 우산을 씌워줘도 같아질 수가 없겠구나.”

그리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 에 들고 있던 우산을 툭, 하고 땅에 내려놓았다.

“공작님?”

아까보다 더 거세진 빗물 때문 에, 그 역시 순식간에 빗물에 젖 어 버렸다.

“널 이런 표정으로 만든 신을 죽여 줄 수가 없어서 미치겠군.”

그리고는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에르안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무언가를 이유로 들어 거부하면, 그 이유를 없앤 뒤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네 어머니를 다시 살려 줄 수 도 없어서 고통스러워.”

그건 아무도 못한다고 대답하려 는데 그가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내가 전지전능하지 못해서 우 산 따위로 네가 비에 젖은 걸 말 려 줄 수 없다면 적어도 함께 비 를 맞아 줄게.”

그 말에, 나는 눈을 들어 에르안을 바라보았다.

키 차이가 워낙 많이 나서 안긴 채로는 그의 눈을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내게 내리꽂히는 따뜻 한 시선만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막을 수 없겠지만…… 무조건 너와 똑같은 모 습으로 네 옆에 있어 줄게.”

내가 맨 처음 열세 살의 풀죽은 꼬마를 보았을 때, 나를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 주며 커다란 위로 를 해 줄 수 있는 남자가 될 줄 은 조금도 몰랐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지만, 만일 네가 정말로 불행의 기원이라고 해도 기쁘게 너와 똑같은 불 행을 맞이할 거고.”

“공작님, 일단 들어가요. 아직 외부 온도가 낮으면 어떻게 될지 사후 검사를 못했……”

“아파도 돼. 너 혼자 비 맞는 것보다는. 그리고 좀 아프면 네가 고쳐 주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는 내 손을 잡고 공작성 안으로 이끌었다.

아마도 내가 더 이상 비를 맞는 것이 싫어서 여기까지 계산하고 애초에 우산을 던져 버린 것 같 기도 했다.

“마음껏 불행해도 돼. 네가 없 는 것보다는. 그리고 난 네가 있 으면 그게 어디든 행복해져.”

나는 그게 꼭, 곁에 있기 망설 여진다는 내 말에 대한 답처럼 느껴져 아무 말 없이 그와 함께 성 안으로 돌아왔다.

혼자 있으면 한없이 밑으로 파 고들었던 나쁜 생각들이 건져 올려지는 기분이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