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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23화 (123/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3화

[칸시아가 곧 모든 전말을 알려 줄 거예요. 당신은 모는 진실을 알게 돼요. 이것이 그대를 위한 신탁입니다. 지난 신탁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

“칸시아.”

“어.”

하지만 분명 칸시아에게 본격적으로 신탁의 내용을 물으면 심술을 부리며 얘기를 해 주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번 신탁, 제가 받은 거 알고 계세요?”

“아, 맞아. 건국제에서 부스를 열었던 리체 에스텔이라고 했어. 수도 사람들이라면 다 떠들고 있 지.”

“내용 안 궁금하세요?”

“내가 왜?”

칸시아는 뚱하게 물었다.

“알아 봤자 딱히 쓸모도 없더만.”

“.......지난 신탁은 알고 계셨어요?”

“어.”

“그거 원래 남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원래 집시가 신을 싫어해. 마법을 대가로 신에게 버림받은 존재라. 청개구리 마음으로 그 신탁 알아내 보려고 좀 심보를 고약하게 썼지.”

내가 그녀의 몸에서 날뛰고 있 는 마력을 진정시키는 동안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신탁을 남에게 말한 사람에게 는 불행이 온다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아. 게다가 별달리 대단한 내용도 아니었다고.”

“아…… 집시는 신을 싫어하는 군요? 자, 이렇게 하면 좀 몸이 가벼우세요?”

“그래, 훨씬 나아.”

칸시아는 기분이 좋은지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씩 웃 었다.

“역시 다른 의사들은 아무것도 못하던데 네게 맡기니 순식간에 좀 나아지는군.”

“지금은 긴급 치료만 하고,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그럼 좋아 지실 거예요.”

“그때 돈 준다고 했던 것도 잊지 마.”

“예, 예.”

나는 고통이 줄어든 칸시아의 눈매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확인한 뒤 슬쩍 말을 돌렸다.

“그럼 칸시아는 신탁을 아무렇 게나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겠네요?”

“응?”

“집시는 신을 싫어하니까요. 신탁을 말하면 불행이 온다는 말은 안 믿을 거 아녜요.”

“ 음.........”

“설마 무서우세요?”

“무슨 소리야? 천하의 칸시아 에스토니가 무서울 게 뭐 있어?”

또 성이 바뀌었다.

이쯤 되면 그녀의 실명을 그녀 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근데, 지난 신탁은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진짜 별걸 다 아시네……”

“옛날에 내가 집시 중에서 가장 마법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누군가가 찾아왔는데 하엘던 황자였어.”

“칸시아,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어요?”

“마법은 좀 하지.”

오만 가지 마력을 몸에 받아들이고 아프다고 낑낑대서 그렇지 실력자는 실력자인 모양이었다.

하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보통 마법은 아닐 것이다.

거의 세계관 최강자 수준인데 너무나 천성이 쓰레기여서 이 세상이 멀쩡히 굴러가고 있는 지경이었다.

“임신이 잘 되게 하는 마법을 써 달라 부탁하기에 대가로 신탁을 말해 달라고 했거든. 사람들이 하도 떠들어 대길래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말했듯이 신탁에 얽힌 저주 같은 걸 믿고 싶지 않다는 청개구리 심보도 있었고.”

“……음, 저주를 믿지 않는 건 칸시아인데 실질적으로 피해 보는 건 하엘던 황자님이시잖아요.”

“그거야 내 알 바인가?”

놀랍도록 뻔뻔한 대답에 우리의 대화를 숨죽이며 듣고있던 사람들의 표정까지 무너졌다.

“근데 임신이 안 되셨잖아요.”

“잘 되게 해 주는 마법이지 무조건 되게 해 주는 마법은 아니었어. 100%의 마법이 있으면 세 상에 불가능한 게 없게?”

뭐, 불임에 있어서 100%의 치 료법이 없는 건 의학도 마찬가지니까 할 말은 없었지만, 어쨌든 하엘던 황자는 딱히 소득도 없이 괜한 신탁의 내용만 유출한 셈이 되었다.

내게 찾아왔던 이스엘라도 그렇고, 오랜 세월 동안 그 두 부부가 얼마나 일관적으로 간절히 아이를 원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럼 그 신탁의 내용이 뭐였어요?”

“별거 아니라니까.”

“별거 아니니까 말씀해 주실 수 있잖아요.”

나는 눈을 굴리며 도발하듯 말 했다.

“설마 가장 마법을 잘하는 집시가…… 사실은 신탁을 말하면 불행이 올까 봐 겁먹고 있거나.........”

“무슨 소리야? 신 같은 건 엿이 나 먹으라고 해.”

“아니면, 혹시 칸시아는 생각보 다 조심성이 있는 계획적인 집시 였나요?”

“말이 심하네! 난 내일이 무섭지 않은 쓰레기라고!”

그녀는 행,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짜증을 내며 단숨에 소리쳤다.

“그냥, 페렐르만 자작의 딸 때문에 꿈꾸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질 거라는 내용이었어! 아직 하엘던 황자는 멀쩡하게 살아서 연구진 이끌며 승승장구하고 있고,  내용 자체도 별거 아니잖아?”

잠시의 시간차 이후, 칸시아는 갑자기 얼어붙은 분위기를 감지하더니 뒤통수를 긁으며 어색하 게 덧붙였다.

“아, 네가 페렐르만 자작의 딸 이었지? 방금 본 거라 바로 연결이 안 되네.”

***

로만은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포박당했다.

“미, 미쳤소, 호아킨 단장?”

그는 자신을 서늘하게 바라보고 있는 호아킨 단장을 올려다보며 눈이 뒤집혀 소리쳤다.

“내가 누군지 알고 지금 이러는 거요? 누님 불러오시오! 당장! 이 공작령의 주인이 내 조카인데!”

“곧 만나시게 될 겁니다.”

호아킨은 무뚝뚝하게 말하고 기사들을 시켜 웨데릭과 뚝 떨어진 지하 감옥에 그를 가두었다.

그의 몸을 타고 흐르던 불길한 예감은 지하 감옥에 손수 찾아온 이사벨의 표정을 보고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이사벨은 마치 사형 선고를 내리던 젊은 시절처럼 서슬 퍼런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뿐인 혈육이라고 끝내 너 를 의심하지 않은 내가 바보였지.”

“누,  누님…… 뭔가 오해가......”

“네 손톱만 한 간으로 이런 일 을 벌였을 리는 없고……. 그래, 시오니의 딸을 죽이는 대가로 하엘던 황자에게 받은 전략이 나와 에르안을 죽이는 것이었나?”

시오니의 딸과 하엘던 황자라는 말이 나오자 로만의 입이 떡 벌 어졌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나 싶어서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 그럼…… 웨데릭은 혹시……”

“시오니의 딸을 없애려고 했을 땐 네 자식 내놓을 생각도 했어야지.”

“누님, 누님! 저는 누님의 친동생이고 웨데릭은 하나뿐인 조카입니다!”

“말 잘했다. 내가 네 친누나고, 에르안은 네 하나뿐인 조카지. 그런데 네가 우리에게 어떻게 했더라.”

“오, 오해입니다. 누님, 제 말을 들어 보세요.”

“웨데릭이 에르안에게 과자를 먹였다지. 그 과자 성분을 페렐르만 자작과 리체가 밝혀냈다.”

분명히 웨데릭에게 에르안이 그 과자를 몰래 다 먹게 하라고 지시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 과자가 문제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결정 적인 단서가 됐는지 미칠 노릇이었다.

“그, 그건…… 아마도 웨데릭이 잘 모르고……”

“아. 황실 의료 연구진이 직접 만들어 낸 과자를 웨데릭이 잘 모르고 입수해서 에르안에게 먹였다? 너라면 그걸 믿을 수 있겠니?”

로만은 이사벨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사벨은 로만보다 뭐든 잘했고 또 비교도 되지 않게 냉정했다.

세르이어스 공작과 결혼하여 영지를 떠나서 망정이지, 스스로 작위를 물려받겠다고 선언할까 봐 내내 마음을 졸였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쌓여 온 열등감 때문에 하엘던이 접촉을 시도했을 때 내심 희열을 느꼈던 것 같았다.

[페렐르만 자작 부인이 친정에 간다는군. 라베리 섬에 가려면 그대의 영지에 반드시 들러야 한다지?]

한낱 구석진 항구를 품고 있을 뿐인 변방의 남작에게 하엘던 황자가 처음으로 접근한 날,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세르이어스 공작 부인과의 연 때문에 페렐르만 자작이 자작 부인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다고 들었다. 자작 부인을 객으로 맞이하고 그때 품고 있는 딸을 죽여. 가능하다면 그 부인까지 죽여도 괜찮아. ]

[예? 드, 들키면 어떡합니까?]

[사람의 눈이 잘 닿지 않는 변 방이지 않나. 안 들키게 하는 것이 남작의 임무지. ]

왜 그 딸을 없애고 싶어 하냐고 묻자 그는 그냥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될 것 같다는 말로 얼버무 렸다.

윗분들의 일을 자세히 물어볼 처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로만은 그저 하엘던과 아르 가의 사이가 생각보다 굉장히 좋 지 않은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아이를 없애는 온갖 희귀한 시약과 향을 줄 테니 시키는 대로 만 하게. ]

[그게…… 그것이……. ]

[대가로 남들이 잘 모르는 독을 두 개 주겠네. ]

하엘던은 뱀같이 웃으며 제안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이 오늘내일 한다지. 나머지 둘만 죽으면 그 영지의 주인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로만은 그에게 세르이어스 공작 부인과 에르안이 자신의 혈육이라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 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엘던 역시 아직 꼬마에 불과한 이복동생인 제이드 황태자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만에게 자신의 편에 설 것이면 확실하게 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꽤 많은 고위 귀족들이 서명한 반란군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도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흘끗 훌어봐도 변방의 남작은 아예 끼워 주지도 않는 커다란 판이었기 때문에 그는 반란군의 계획에 당황한다기보다는 마음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웨데릭이 세르이어스 공작령의 주인이 되면 이 고위 귀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 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차피 거기 주치의로 있는 페렐르만 자작은 딸과 부인이 잘못 되면 제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 거야. 분명 폐인이 되어 그만둘 거고, 그럼 그 독을 눈치챌 수 있는 주치의는 없을걸. ]

어떻게 눈치챘는지는 몰라도 시오니는 저녁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 쫓아갔을 때에는 이미 딸을 출산하고 어디론가 보낸 터였다.

인원을 시켜 추적했지만 하녀를 죽이는 데에만 성공하고 딸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목격자가 너무 많아 시체 자체를 숨길 수는 없었다.

이대로 들킬 수 없다고 생각한 로만은 거짓 중인을 만들고 아르가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르가가 세르이어스의 주치의 를 그만두어야 로만의 계획도 더 순조로워질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단 하나, 하엘던과 로만의 예상을 빗나간 것이 있었다.

아르가가 딸을 찾는다며 주치의를 그만두었을 때 오랜 친우였던 세르이어스 공작이 그 사이에 결국 지병으로 죽어 버린 것이다.

그 죄책감에 아르가는 다시 공작저에 주치의로 들어갔다.

과자 형태로 만들었지만 아르가의 아이디어로 만들어 낸 독을 투입한지라 들킬까 봐 정말로 불안했다.

웨데릭에게 에르안의 입을 단단히 단속하라고 여러 번 일렀고 주치의의 조수로 끊임없이 첩자를 집어넣어 가벼운 중상은 모두 조작했다.

하엘던 역시 제이드를 노리기 위해 오랜 시간 치밀하게 독극물을 주입하는 것 같았으나, 제이드의 몸이 워낙에 튼튼한 데다가 해적 소탕에 나가 버려 중간에 맥이 끊기고 말았다.

도중에 실패한 사람은 하엘던뿐 만이 아니었다.

로만의 계획 역시 갑자기 들어 온 리체에 의해 모두 어그러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웨데릭마저 행방 불명되고, 자신의 영지와 작위까지 사라지게 생겼다.

“네 구차한 명을 이어 가고 싶으면.”

횃불에 일렁이는 이사벨의 얼굴이 서늘했다.

“또 네 아들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예전에 세르이어스 공작이 죽 고, 제멋대로 날뛰는 가신들을 숙청할 때의 그 잔인함을 다시 보는 것 같아 로만은 숨을 삼켰다.

“아는 것을 다 나불대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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