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2화
동이 틀 무렵이었다.
키가 작은 여자가 부른 배를 안 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초록색 머리끈에 묶인 곱슬거리 는 금발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7개월 차 임신부가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내며 페렐 르만 자작이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엉망인 차림새지만 시오니가 입고 있는 옷은 분명 그가 재단사를 불러 직접 골라 준 임부복이었다.
가장 맘에 든다며 라베리 섬에 갈 때 챙겨 가던 시오니의 설렌 표정까지도 여전히 기억에 선명 했다.
“아가, 미안해…… 아직 나올 때가 아닌데……”
수정 구슬 속의 그녀가 눈물을 꾹 참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를 부축하고 있던 하녀가 다급히 말했다.
“곧 마을이 나와요, 조금만 참으세요! 아마 산파가 있을 거예요. 아니면 조금 쉬었다 갈까 요?”
“안 돼.”
시오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추적이 붙었을 거야. 눈치채지 못했을 때 얼른 멀리 가야 해.”
“정말…… 이시더 남작이 저희 를 죽이려고 한 거예요? 대체 왜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이 아이를 죽이려고 한 것 같아.”
시오니가 숨이 찬 와중에도 둥 그런 배를 조심스레 쓸면서 말했다.
“저녁 식사에는 몰래 넣은 조프 리풀이 가득했고, 욕실에는 카토향이 가득하더군. 그리고 아까 봤잖아. 계단에 초칠을 해서 미끄러운 것”
영문을 모르겠다는 하녀의 얼굴을 보며 시오니가 덧붙였다.
“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아르가가 조심하라면서 아이에게 좋지 않은 것들을 모조리 설명해줬거든. 그중 사람들이 잘 모르는 치명적인 것들만 골라서 배치해 두었어.”
“어머......”
“아르가가 호들갑 떨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토록 똑똑하지만 않았더라면 당연히 몰랐겠지.”
그녀의 초록색 눈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하녀 역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를 없애는 데 실패하면 나 를 죽일 거야. 얼른 멀리 가야 해.”
밤중에 몰래 급히 도망쳐 온지라 흔적을 없애는 것도 버거웠다.
그래도 밤새 달려서 남작령에서 꽤 멀리 도망쳐 왔다.
지금쯤은 그들이 그녀의 실종을 알아채고 사람을 풀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배가 아픈지 그녀 는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급히 숨을 참았지만 어느 정도 들이켜 버린 카토 향 때문에 아이가 위험을 감지하고 예정보다 빠르게 나오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시더 남작은 이사벨 마님의 친동생인데 대체 왜일까요?”
“글쎄.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 만 카토 향이나 조프리풀 같은 건 정말 극소수만이 아는 정보 야. 아무리 이시더 남작이 의학 계통에 일가견이 있다고 해도 쉽 게 구할 수 있는 약초도 아니고. 그 정도의 희귀종은 분명 페렐르만 상단을 거쳐야 할 텐데 아르가는 아무 말도 없었어.”
“자작님이 말씀 안 하신 건 아 니고요?”
“아르가는 내게 모든 걸 말해. 이 정도의 특이한 사안을 말하지 않을 리가 없어.”
시오니가 열은 한숨을 쉬었다.
하녀에게 설명하려는 목적보다 는 자기 자신이 말하면서 상황을 정 리하고 싶은 듯했다.
“이 정도의 의학 지식과 아르가 조차도 모를 유통……. 황실 의료 연구진밖에 없는데.”
“네?”
“아르가와 하엘던 황자님은 사 이가 좋지 않아……. 혹시 그것 때문일까?”
“설마요……”
“내가 라베리 섬에 가는 걸 모 르는 사람이 없어. 라베리 섬에 가려면 이시더 남작의 영지를 지나쳐야 하니 이시더 남작이 직접 초청 편지까지 보냈지……. 아마 우리 딸을 없애는 대가로 이시더 남작이 무언가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고……. 아아악!”
시오니가 배를 움켜쥐고 털썩 쓰러졌다.
다리 사이로 피가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녀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아이가, 아이가 나을 것 같아…… 너무 아파……”
비명을 억지로 참으며 시오니는 꽉 문 잇새로 중얼거렸다.
하녀는 힘겹게 그녀를 들쳐 업 고 가까운 농가의 허름한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해가 떠오르면 이제 사 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비명도 차마 지르지 못한 오랜 진통 끝에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저 멀리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산파도 의사도 없이 아이를 낳은 시오니는 기진맥진해 있었고, 하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고에서 정원용 가위를 찾아 탯줄을 잘랐다.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직감한 시오니가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헐떡이며 말했다.
“엘리, 아이를 데리고 얼른 도망가.”
“시오니 님!”
“나는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고, 여기 다 같이 있다가는 아이까지 죽어. 얼른 가, 얼른.”
하녀는 눈물을 닦으며 창고 구석에 있던 바구니를 찾아 막 태어나 울고 있는 아기를 담고 천으로 덮었다.
“세르이어스 공작령으로 가.”
시오니는 차분하게 말했다.
“페렐르만 자작령으로 가면 무조건 붙잡히게 될 거야. 로만이 이사벨의 동생이니, 내가 세르이어스 공작령으로 아이를 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야. 그 곳이 가장 안전해.”
“이시더 남작이 저 지경인데, 세르이어스 공작 부인님은 믿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여기서 세르이어스 공작령은 꽤 먼데요”
“글쎄…… 그냥 죽음을 앞둔 사람의 직감이자 도박이야. 쉽게 붙잡히는 것보다는 오랜 믿음에 의지하는 게 낫겠지.”
그녀는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헝겊으로 덮여 있는 딸을 가까스로 보고 나서, 자신의 머리 카락을 묶고 있던 초록색 끈을 풀어 바구니에 묶어 달라고 하녀에게 요청했다.
“괜히 남에게 길을 묻지 말고, 켈리아스 강을 따라서 계속 하류로 내려가. 그러면 세르이어스 공작령이 나올 거야.”
밖이 점점 더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얼른 가, 얼른!”
하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 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문으로 급히 달려가 사라졌다.
혼자 남은 시오니는 엉금엉금 기어 창고에 널브러져 있던 책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바닥에 고여 있는 피로 ‘벼 파 종 시기에 대한 기본 원칙’이라 는 책에 다잉 메시지를 남긴 그 녀는 그 책을 품에 안아 들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수정 구슬의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칸시아가 수정 구슬에서 손을 뗐을 때, 시오니 님의 마지막을 확인한 이사벨 마님과 페렐르만 자작은 온 얼굴이 젖도록 울고 있었다.
눈물조차 홀리지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페렐르만 자작의 손을 잡았다.
“아, 아버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리체, 맨 처음 너를 보았을 때, 강물에 떠내려 오면서도 방긋 웃고 있었지.
초록색 리본이 달린 바구니에 담겨 초록색 눈을 반짝이는 너는 마치 선물 같았단다.
-엘번 선생님]
엘번 선생님이 내 성년식 때 보 내 준 편지 내용에는 정확히 초록색 리본과 바구니가 언급되어 있었다.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떠내려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엘번 선생님이 초록색 리본을 그동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마 바구니에 처음부터 달려있던 장식이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 바구니도 어쩌다가 사라졌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실제로 그 바구니를 본 적이 없었다.
분주한 보육원에서 잡동사니들이 없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서신을 쓰며 그냥 생각났겠지.
그 하녀의 시체는 보름 정도 후에 발견되었다고 했다.
아마도 나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달아나던 하녀는 결국 추적을 당해 죽고, 그 전에 기적을 바라며 켈리아스 강에 나를 내려 보냈을 것이다.
나는 바구니에 담겨 세르이어스 공작령의 변방까지 흘러갔고, 엘번 선생님이 구출해 보육원에서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시오니 님이 다잉 메시지에 남 긴 딸의 생일은 6월 9일인데 내가〈제하 보육원〉에 온 날은 6 월 말이라는 것도 시간상으로 딱 맞아 떨어졌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엘번 선생님의 편지를 갖고 오자, 페렐르만 자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울었다.
“아…… 시오니……”
그는 차마 내 이름은 부르지도 못하고 시오니의 이름만 몇 번을 중얼거렸다.
나 역시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다가, 내가 직접 암호를 해석한 「벼 파종 시기에 대한 기본 원칙에 묻어 있던 피를 떠올리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 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페렐르만 자작은 들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리석어…… 내 가족의 원수 말만 믿고…… 내 눈앞에 찾아온 딸을 알아보지 못해 서……”
“아니에요.”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대답했다.
“못 알아본 건 저도 마찬가지인 걸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이사벨 마님은 어쩔 줄 몰라 하 며 이마를 짚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를……”
자신도 동생에게 독살당할 뻔 했으면서, 그녀는 우리 앞에서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뭐, 빌어먹는 게 그 정도로 인간 말종 같은 짓은 아니라우. 여기 빌어먹는 사람으로서 좀 기분 이상하네.”
칸시아는 슬금슬금 수정 구슬을 챙기며 일어났다.
“더 심한 욕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리고 가족 상봉은 좋 지만 약속은 지켜야지? 내가 좀 아프다고.”
“네, 네. 고쳐 드려야죠.”
나는 페렐르만 자작을 부축해서 일어나게 한 다음, 칸시아에게 다가갔다.
아직 맞춰지지 않은 하나의 퍼즐 조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