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1 화
하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칸시아 엘리어스라는 분인데……”
“엘리어스요? 멜로니아가 아니라?”
나는 ‘칸시아 멜로니아’라는 사람이 나를 찾으면 무조건 들여보 내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녀도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리체 님이 말씀하신 분이 ‘칸시아 멜로니아’셔서 저도 여러차례 확인을 해보았습니다만 엘리어스라고 하시네요. 그리고 워낙에 행색이 엉망이고 말투가 천박한지라…… 들여도 될지 모르겠다는 문지기의 의견이 있어서요.”
“혹시 좀 지저분한 거적때기 같은 걸 두른 집시인가요?”
나는 혹시나 싶어 칸시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 네. 맞아요.”
“머리는 백발이고, 심술이 덕지 덕지 붙은 얼굴 맞죠?”
“네. 좀 뻔뻔한 데다가 엄살도 심하고, 하여튼 질이 아주 좋지 않아 보인다고 했어요.”
“아주 정확하네요.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로 그 사람이에요.”
역시 본명을 댄 건 아니다 싶었다.
그나마 ‘칸시아’라는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려 준 것을 고마 워해야 하나 싶었다.
“당장 만나게 해 주세요.”
“그게……”
하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식사부터 하고 싶다고 드러누운지라……”
백 번을 회귀해도 쓰레기처럼 살겠다던 그녀는 자신의 말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 중임에 틀림 없었다.
나는 따라오겠다는 사람들을 모조리 물리고 난 뒤 혼자서만 그녀를 만나러 갔다.
칸시아는 정신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공작성에서 차려 준 모든 음식을 접시까지 할아먹을 기세였다.
내가 식당에 나타나자, 그녀는 입가를 숙 닦더니 팔을 내밀었다.
“너무 아파. 좀 봐 줘.”
예전에 자유 도시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의 마력이 엉망으로 꼬여 있다는 걸 알고 지금쯤 찾아 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칸시아 멜로니아라면서요. 엘리어스란 성은 또 뭐예요?”
“아, 내가 그랬었나?”
칸시아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별것 아니라는 둣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땟국물이 꼬질꼬질하게 흐르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마력의 흐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밤마다 온몸이 쥐어짜듯 아프시겠네요. 아침에 일어나면 숨이 가쁘고요.”
“맞아.”
“제가 회귀 전에 분명히 함부로 이런저런 마력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살면 그게 집시인가, 모범 시민이지.”
칸시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뒤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고쳐 줄 수 있지?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는데 너처럼 딱 증상을 알아채는 의사는 없었어.”
“당연하죠.”
나는 그녀의 손목을 놓고 씩 웃었다.
“대신 조건이 있었을 텐데, 기억나세요?”
“아아, 수정 구슬.”
칸시아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갖고 왔어. 안 잊어버렸네.”
“그거 보면 닮아요? 왜 그렇게 안 보여주고 싶어해요?”
“딱히 그건 아닌데, 난 태생적으로 남한테 좋은 일을 해 주는 게 싫더라고.”
“좋은 일이라뇨. 병을 고쳐 주 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정정당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 도 딱히 좋아하진 않아.”
“아니, 그때 나를 같이 회귀시켜 준 건 그럼 칸시아 인생에서 단 하나의 선행이었어요?”
“어떻게 알았어?”
그녀가 음식을 삼키며 당당히 말했다.
“꼴 보아하니 실력도 좋고 엄청 열심히 산 것 같은데, 하루 종일 갇혀 있어도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게 불쌍하더라고. 그제야 가족 보고 싶다고 한 것도 좀 짠 하고.”
“그럼 이번엔 좀 도와줘요.”
“알았어. 그래서 챙겨 왔다고.”
칸시아는 자신의 커다란 가방을 툭, 치며 말했다.
“네 부모를 찾고 싶다, 이거잖아. 내 수정 구슬은 이름과 출생지만 알면 그 사람이 원하는 시기의 과거를 알 수 있어.”
살짝 긴장한 내 표정을 보면서 칸시아가 지저분한 가방끈을 풀 기 시작했다.
“네 이름하고 출생지를 말해 봐. 그럼 원하는 시점의 과거를 보여 줄 테니까.”
지금 당장 수정 구슬을 꺼내려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나는 씩 웃었다.
“아뇨, 여기서는 말고요.”
칸시아는 지금 당장 빨리 해치우지 못해서 불만스럽다는 둣 나 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어쨌든 병을 고치려면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서 크게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지금 같이 가요.”
티실리아 대신녀의 신탁이 맞는다면 칸시아가 이제 내게 진실을 알려줄 터였다.
“함께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요.”
그리고 그 진실은 모두가 알아야 하므로, 나는 식당에 내려오기 전에 디엘에게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소집시키라고 해 놓은 상태였다.
“거참, 까다롭네.”
“다 드실 때까지 기다려 드릴게요.”
“그럼 사슴 고기 좀 더 달라고 해도 돼?”
나는 칸시아의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가, 그녀를 끌고 응접실로 향했다.
“꿈은 잘 꾸고 있나.”
응접실로 가는 길에 칸시아가 물었다.
“글쎄요. 요새는 잘 안 꾸네요.”
“가을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래”
그녀가 귀를 후비며 가볍게 말했다.
“회귀했던 그 시기가 거의 다 왔잖아. 이젠 바뀐 미래가 얼마 없는 거지”
“그러면 회귀했던 그날이 지나가면 꿈도 안 꿔요?”
“당연하지. 이제 그냥 보통의 시간을 사는 거니까”
나는 새삼 칸시아를 감옥에서 만나 회귀했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찬바람이 막 불기 시작한 초가을이었다.
정말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고급 장식품으로 칸시아의 눈이 돌아가는 것이 보여서, 응접실까지 그 녀를 단단히 감시하며 이동해야 했다.
에르안과 이사벨 마님은 물론, 페렐르만 자작과 케인즈 경, 호아킨 단장님과 디엘까지 자리해서 응접실은 꽉 차 있었다.
응접실로 안내된 칸시아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보다 거창한지 한숨을 푹 쉬었다.
특히 에르안과 이사벨 마님을 흘끗 보더니 내게 ‘눈빛만으로 날 죽일 것 같은 사람들인데 괜찮아?’라며 속삭이기까지 했다.
“여기는 칸시아 멜로니아라고, 옛날에 저를 도와주신 분이세요. 실력이 몹시 뛰어난 집시이기도 하고요.”
누구나 집시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젠틀한 케인즈 경마저도 미간을 찌푸렸다.
“특정 인물의 과거를 알 수 있는 수정 구슬을 보여 주실 거예요.”
처음에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 주눅 들었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칸시아는 벌써 여유 만만인 표정으로 편히 앉아 수정 구슬을 꺼내고 있었다.
“대신 나 좀 치료해 줘야 해. 약속 지켜.”
“전 칸시아와 달라요. 그건 걱정 마세요.”
페렐르만 자작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집시를 믿을 수 있는 거야? 조작이라도 하면 어떡해?”
“어허.”
칸시아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집시는 다른 건 다 사기쳐도 약속한 마법은 지켜. 마법까지 등쳐먹으면 재수 옴 붙는다는 말이 있어서.”
“그건 사실이에요.”
디엘이 속삭였다.
“귀족분들께서는 집시를 잘 모르시지만, 평민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말이거든요.”
칸시아는 그것 보라는 둣이 헛 기침을 크게 한 번 한 뒤, 수정 구슬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언제를 볼 거야? 보고 싶은 시점을 말해. 아, 이건 1년 에 한 번만 쓸 수 있으니 두 번은 못 봐.”
“얼마나 오랫동안 볼 수 있어요?”
“내 마력이 허락하는 한. 근데 중간중간 몇몇 장면을 뛰어 넘는다고 해도 아주 오래는 못 볼 거야.”
응접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수정 구슬에 쏠렸다.
칸시아는 그들을 획 둘러보고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아까 말했지만…… 수정 구슬로 과거를 보려면, 명확한 이름과 그 사람이 태어난 장소가 필요해. 동명이인일 수도 있으니까.”
당연히 내가 태어났을 때를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한 칸시아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리체 에스텔이 본명 맞지? 어디서 태어났어?”
그 질문에 다들 살짝 긴장했다.
정확히 내가 어디서 태어난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리체, 전혀 아는 바가 없어?”
“혹시 모르니 보육원에 연락해 볼까?”
“아뇨, 제 과거 안 볼 거예요. 제가 과거를 보고 싶은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사이로 내가 조용히 말했다.
“시오니 나니아 페렐르만, 라베리 섬 출생이요.”
초상화로밖에 본 적 없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름이었다.
응접실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19년 전 6월 9일, 새벽 즈음부터 보여 주세요.”
시오니 님의 딸은 오후에 탄생 했다고 들었다.
초산 진통 시간을 넉넉하게 예측하여 그날 새벽을 지목한 것이다.
놀랍게도 반질거리기만 했던 수정 구슬에 천천히 상이 맺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