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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20화 (120/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20화

제이드는 케인즈가 보낸 서신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황태자 전하, 황궁에서 안녕하 신지요.

저는 전하의 명을 받아 예정대로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잘 도착 하였습니다.

그런데 황실의 녹을 먹는 제국 군인으로서 긴급하고 중대하게 조사할 일이 생겼기에 조금 더 오래 머무는 것을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심만으로는 서신으로 언급하 기에 지나치게 무거운 일이라 자세히 서술할 수 없는 점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 일이 황태자 전하의 안위와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올립니다.

따라서 이 서신의 내용 자체는 당분간 비밀로 하는 것이 현명할 듯합니다.

공작님과 리체 양의 도움을 받아, 이 모든 일의 전말을 충심으로 조사할 것을 맹세 드리며 그 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부디 다시 뵐 때까지 강녕하신 나날 보내고 계시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케인즈 올림]

“아니, 리체의 대답을 들으러 갔는데 뭘 또 조사하겠다는 거지?”

그러나 군의관인 케인즈는 황실 기사단 소속이기도 했다.

그가 심각하게 조사를 해야 한다고 판단한 사안이라면, 게다가 충심까지 운운할 정도라면 가벼운 사건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르이어스 공작이 상당한 충신이고 리체 양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니… 내 안위 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내가 인복이 넘치는군.”

황실 기사단의 군인이 조사를 요청할 때 답신을 보내는 매뉴얼 에 따라서, 그는 충분한 시간을 줄 테니 황태자의 명으로 해당 사건 을 명명백백히 조사하라는 답을 간단히 써서 보냈다.

“그럼 형님께 병문안이나 좀 가 볼까……”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 는 것을 확인한 제이드는 벌떡 일어나 쾌활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이 나면 간간이 관람 탑에서 꽤 큰 부상을 당한 하엘던 황자에게 병문안을 가곤 했다.

물론 제이드가 있던 쪽의 바닥이 무너져서 진짜 죽을 뻔한 사람은 그였지만, 리체가 시기적절 하게 밀쳐 내는 바람에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가벼운 찰과상 몇 개만 입고 멀쩡할 수 있었다.

반대편에 있었던 하엘던은 목숨에 지장이 있지는 않았지만 다리 한쪽이 부러져서 며칠간 침대 신세를 져야만 했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지게 된 프릴리트 후작 역시 팔 한쪽을 크게 다쳤기 때문에 제이드는 내심 안타깝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에휴…… 다쳤는데 욕은 욕대로 먹고, 배상은 배상대로 하고, 징계는 징계대로 받고……. 하지 만 황실은 그만큼 잔인한 법이지. 어쩔 수 없어.’

그 외에도 관람탑에서 큰 부상 을 당한 사람들은 상당히 많았다.

에르안마저 크게 다쳐서 리체가 황급히 그를 데리고 공작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만일 그녀가 세르이어스 소속 주치의만 아니었어도 자신과 지금쯤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 을 것을…….

‘그러나 그런 프로페셔널한 모 습이 리체 양의 매력이지.’

그는 그의 목숨을 살려 준 리체 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어?”

그렇게 하엘던 황자에게 가는 길에 그는 황자비인 이스엘라와 마주쳤다.

이스엘라는 살짝 옅은 한숨을 쉬고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형님께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네”

“좀 어떠세요?”

“의료 연구진 몇 명이 붙어 있어서 회복 속도가 빠른 편이라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제이드는 순진한 푸른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형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없으셨지요?”

“예…… 조금 피곤하여.”

이스엘라는 관람탑에 가지 않아서 아무런 부상도 없었다.

“예, 곧 오래 기다리던 아이가 찾아올지도 모르니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번에 리체 양의 처방을 받지 않으셨던가요?”

“……다시 부탁드리지만, 황자 님께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요. 제가 이래 봬도 눈치가 좀 있는 편입니다.”

이스엘라의 납득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제이드는 이해한다는 둣 대 답했다.

“리체 양은 엄청난 명의입니다. 아마 형님 내외께 곧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제가 보장하죠. 리체 양은 못 고치는 병이 없으니까.”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모든 병을 고칠 수는 없으니, 리체가 들으면 기함할 말이었다.

그러나 확신에 찬 제이드의 말에 이스엘라의 얼굴에도 살짝 기대감이 맴돌았다.

하엘던과 이스엘라 모두 아이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황궁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하엘던이 맨 처음 황실 의료 연구진을 이끌게 된 이유도 자신들의 불임을 직접 연구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사냥 대회 이후 리체의 실력이 황실 의료 연구진보다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스엘라 에게는 어쨌든 희소식이었다.

제국은 법으로 사생아를 인정하 지 않았다.

하엘던에게 숨겨진 정부가 몇 명 있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진정 후계가 될 자식을 낳을 수 있 는 사람은 이스엘라뿐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하엘던은 자신의 후계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간절히 바랐다.

자식을 낳아 주면 그 많은 정부들도 정리하지 않을까 싶어 이스 엘라는 결국 평민인 리체의 부스 까지 몰래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그럼.”

이스엘라는 오랫동안 제이드와 말을 나누고 싶지 않은지 금방 사라졌다.

제이드는 해맑게 그녀에게 인사 하고 하엘던의 방으로 향했다.

하엘던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 무런 부상도 없는 제이드를 맞았다.

제이드가 어찌나 여기저기 리체 덕분에 살았다고 떠들어 댔는지, 그가 이토록 멀쩡할 수 있는 이 유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형님, 괜찮으신가요?”

“마음 써 주신 덕에 많이 나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제이드는 해맑게 말했지만 하엘던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러고 보니 친하게 지내던 프릴리트 후작이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지느라 상당히 타격이 크다고 들었다.

이런 불의의 사고가 생겨 친구도 곤란해지고 본인도 크게 다치다니…….

“저는 리체 양이랑 있어서 멀쩡할 수 있었는데 형님은 참 운도 없으셨군요.”

“그 얘기는 지금 병문안 오실 때마다 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체 양이 제 인생의 귀인 같아서요. 형님께서도 리체 양을 조금이라도 더 좋 게 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제이드는 만일 리체가 황궁에 들어오게 되면 혹시나 하엘던과 어색할까 싶어서 자주 리체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딱히 관심 없습니다, 그런 보 잘것없는 평민 여자애한테는.”

“보잘것없지는 않습니다. 사냥 대회 때 직접 보셨잖아요.”

“그 여자애에 대하여 논하기에 는 제가 좀 피곤하군요.”

리체의 이야기는 해도 해도 또 하고 싶은데 하엘던은 제이드와의 대화를 너무 초반에 차단해 버렸다.

‘하긴, 아프니까 동생이 관심있는 여자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

침대 신세를 지고 있는 하엘던에게 너무 배려심이 없었나, 자신을 되돌아보던 제이드는 조금 이라도 그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 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나으셔야죠. 좋은 소식이 올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좋은 소식이라뇨”

“뭐, 곧 예쁜 조카가 탄생할 수 도 있는 일 아닙니까?”

“황태자님.”

하엘던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 렸다.

“아무리 황태자님이시라고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남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것은 매너가 아니십니다.”

“아픈 곳을 찌르다뇨!”

제이드는 깜짝 놀라 두 손을 휘 저으며 황급히 말했다.

“저는 그저 형수님이 리체 양에게 불임 관련 처방을 받았으니…. 아, 이런.”

낭패라는 둣 제이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형수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물론 하엘던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그, 그래도 리체 양의 실력은 대단하잖아요? 자존심 때문에 너무 그러지 마시고……”

결국 제이드는 찝찝한 기분으로 병문안을 이르게 마칠 수밖에 없었다.

***

원래 혼자서 조용히 연구에만 매진하려고 만든 연구실에는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 작했다.

회귀 전, 의원을 열었을 때에는 환자들이 다 가고 나면 혼자 남아 이것저것 연구하는 것이 일상 이었는데 이제는 연구실에 들락 거리는 사람들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나를 보겠다며 한 명 두 명 찾아와서 결국에는 복작이게 되는 그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지금도 에르안과 디엘, 페렐르만 자작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 는 상태였다.

“이시더 남작이 오고 있다고 해. 말이 한 필뿐이고 여비가 충분치 않아 평소보다 오래 걸리나 봐. 시벨로 지역의 페렐르만 상단 지점에서 연락 받았어.”

디엘의 보고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곧 도착하겠네.”

처음엔 한스 사건이 패씸했고, 다음엔 페렐르만 자작의 복수를 해 주고 싶어서 과하다 싶을 정 도로 끌어내렸다.

웨데릭의 정보를 주겠다며 거짓 정보 길드의 서신을 보내고, 돈이 궁하게 만들어 영지와 작위까지 다 빼앗으려 했다.

에르안은 거기에 덧붙여서 모든 것이 없어졌을 때 웨데릭의 머리 카락이라도 보내서 사람을 더 미 치게 하자고 제안했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자신의 딸을 찾을 때 돈이라도 있었지, 찾을 수 있는데 돈이 없어 못 찾는 기 분은 훨씬 더 비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나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면 그를 조금이라도 더 괴롭히는 것보다 하루 빨리 작은 단서라도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냥 끌고 올까 싶기도 하지만, 지금 시벨로 지역이라면 달리 시간의 차이도 나지 않을 거 야.”

에르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요새 잠은 잘 자? 신경 쓸 게 많잖아.”

건국제 이후, 툭하면 자신이 아 픈 것 같다며 나를 불러내어 물고 빨던 에르안은 내 심기가 복잡한 것을 알고 난 뒤 인위적인 어리광을 즉시 멈췄다.

그 대신 그가 내 주치의가 된 것처럼 식사는 잘하고 있는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 안색은 어 떤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연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 서 어제보다 좀 마르지는 않았는 지 낯빛이 어둡지는 않은지 살펴 보는 에르안을 못마땅하다는 둣 이 노려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공작님.”

페렐르만 자작은 팔짱을 낀 채 로 말했다.

“공작님의 거친 손으로 리체를 그렇게 쓰다듬지 마십시오. 굳은 살에 스쳐서 생채기라도 나면 어떡 합니까?”

고작 검을 많이 잡아 생긴 굳은 살에, 그것도 부드럽기 그지없는 에르안의 손길에 생채기가 날 가 능성은 거의 없었다.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페렐르만 자작인데도 신경질을 가득 담아 트집을 잡는 것이 확실히 예전과는 달랐다.

페렐르만 자작과 나는 시약 검 사를 진행 중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정황상 부녀 관계가 아닐 확률이 더 희박했다.

심중이 넘치고 흐르는데 확실히 하기 위해 마지막 한 단계를 앞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 페렐르 만 자작은 미묘한 사이가 되었다.

“아, 그럴 수 있군요.”

예전 같았으면 코웃음도 치지 않았을 에르안은 재빠르게 장갑을 찾아 끼고 다시 내 머리카락 을 마저 쓰다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은살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검을 계속 잡아야 하니 까요. 혹시라도 리체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직접 다 관계자들을 해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좀 떨어지시죠. 리체가 갑자기 일어나다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공작님의 몸에 부딪히기만 해도 아플 텐데.”

“그런가요? 그럼 이렇게 하면 되죠.”

내 기억에 에르안은 더위를 많이 탔다.

그런데 그는 즉시 연구실 구석 에 있던 담요를 가슴에 칭칭 감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단단하고 넓은 가 슴은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리체가 몸 좋은 남자를 좋아해서 요.”

페렐르만 자작이 별것도 아닌 트집을 잡으면 에르안이 즉시 수긍하면서도 온갖 기괴한 방법을 동원해 정작 행동을 교정하지는 않는 광경이 이어졌다.

내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자작님, 저는 이미 리체를 위한 맞춤형 인재입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혹시 모르는 상황을 위한 자기 소개입니다.”

“행.”

페렐르만 자작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혹시라도 내가 리체의 친부가 아니면 완전히 태세를 전환할 인성인 걸 모르는 줄 아나.”

“여전히 총명하시군요.”

“그건 당연……”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페렐르만 자작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도끼눈을 떴다.

그때 연구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 하녀 하나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저기, 급히 드릴 말씀이 있는 데요……”

“네, 하세요.”

뭐가 되었든 이 이상한 분위기 를 깨기 위해 나는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지금 막 공작성에 도착해서 리체 님을 찾으시는 분이 계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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