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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19화 (11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9화

나는 충격을 받아 잠시 대답하 지 못했다.

그동안 평민 주제에 이사벨 마님의 조카를 의심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혼자 몰래 연구해 온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만들어 낸 배 합이라 헤맸다고 생각하면 오랫동안 상해 왔던 자존심이 조금은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뭐, 정말 생각해 내기 까다로웠어요. 역시 제……”

나는 무심코 말을 잇다가 황급 히 입을 다물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헛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성분을 분리해 내지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 한 번에 보기는 어려웠을 거야.”

페렐르만 자작은 나를 위로하듯 특 내뱉었다.

“살살이풀이 과자로부터 성분을 분리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은 나도 못했다. 역시 내……”

그는 마지막으로 슬쩍 웃으며 덧붙이려다가 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더니 크흠, 하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묘하게 바꿔서 증상도 달라…. 나는 원래 치료제로 개발한 거니까. 그래도 다른 곳 도 아닌 내가 주치의로 있는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투입하다니 놀랍군.”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과자 하 나를 집어 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연구 결과를 모두 연구진에 넘기고 왔다.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을 테니 황실 의료 연구진이 어린 시절 세르이어스 공작의 지병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명백 해.”

“디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케인즈 경이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야. 불러와 줄 수 있 어?”

케인즈 경은 황실 군의관 소속 으로 제이드 황태자와 긴밀한 사이였다.

지금 우리가 낸 결과를 직접 보 여 주면 제이드 황태자에게 누구보다도 더 충성스럽고 정확하게 알려 줄 사람이었다.

“실마리가 잡힌 이상 빠르게 밀어붙여 야죠.”

아주 높은 확률로 내 일일 수도 있었다.

여러 사람의 눈물로 보존되고 있는 그 대리석 길을 19년 동안 걷지 못하고 헤맨 그 딸이 나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당한 건 19년이면 충분했다.

***

잠시 후, 디엘과 함께 우르르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는 케인즈 경만 말했는데, 에르안과 이사벨 마님은 물론 호아킨 단장님이 양손이 포박된 웨데릭까지 끌고 왔다.

“도중에 공작님을 마주쳤는데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디엘은 난감한 둣 뒤통수를 긁었다.

“공작님께서 사정을 듣고 이런 건 다 같이 들어야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하셔서……”

나는 웨데릭의 형편없는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얼 굴은 거칠했으며, 손질 못한 머리카락과 수염은 엉망이었다.

무엇보다도 제대로 못 먹었는지 그새 비쩍 말라 있었고 무엇보다도 동공이 미친 둣이 혼들리는 게 정신 상태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온몸에 상처가 나 있었고 피딱 지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혈육이라고 사지를 멀쩡 하게 놔둔 것 같다며 디엘이 몰래 속삭였다.

“제대로 대답해야 할 거야.”

에르안은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벌벌 떨고 있는 웨데릭의 멱살을 질질 끌어 과자가 놓여 있는 연구실 책상 앞으로 데려갔다.

가뜩이나 내가 오랜 시간 연구하느라 과자는 딱 두 개가 남아 있었는데, 하나는 지금 성분 분석을 해 버리느라 썼다.

그래서 온전한 형태의 과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에르안은 그 하나의 과자를 집어 들고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거 기억나?”

그가 내뿜고 있는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한지, 우리는 정적을 지키며 그 광경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웨데릭은 거친 숨을 쉬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에르안은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선득하게 웃었다.

“대답해야지.”

나긋한 목소리지만 살기가 잔뜩 느껴져서, 내 옆의 디엘은 히끅하고 딸꾹질을 한 번 했다.

“말 안 하면…… 지하 감옥에서 나랑 또 독대할까?”

“기, 기억 나!”

대체 지하 감옥의 독대가 무엇 이기에.

웨데릭은 기겁을 하며 황급히 소리쳤다.

“나는…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거야. 말했잖아. 그냥 네게 먹이면 된다고…난 아무것도 몰라!”

에르안은 그런 웨데릭을 빤히 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 형이 몰래 쥐여준 그 과자를 먹으면… 난 정확히 형이 말한 중상대로 아프곤 했어. 책을 읽으면 머리가 아플 거라고 한 뒤엔 머리가 아프고, 식사를 하면 배가 아플 거라고 한 뒤엔 배가 아팠지.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닐 텐데.”

이사벨 마님이 머리를 짚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웨데릭이 어린 에르안에게 이상 한 것을 먹이고 있었다는 것 자체를 지금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해도, 크고 나서 생각하니까 너무 수상한 거야. 하지만 혹시 모를 이용 가치 때문에 참았는데……”

에르안은 자신을 해치려고 한 건 별다른 가치도 없다는 둣 여유있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만한 이용 가치도 없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 그냥 그런 효과가 있는 과자일 뿐이야! 말했잖아, 우리는 윗선에서 그냥 포상을 받은 것뿐 이야. 페렐르만 자작의 딸 일로 말이야!”

웨데릭은 빠르게 속삭이며 발버둥쳤다.

“이로써.”

그런 그를 가볍게 바닥에 내팽개치며 에르안은 짜증을 섞어 말 했다.

“그 ‘윗선’이 황실 의료 연구진 이라는 건 확실해졌군. 설마 그 과자를 페렐르만 자작이 스스로 포상으로 내렸을 리 없잖아?”

“내가 맨 처음 개발하려고 한 건, 책을 많이 읽어 머리가 아프거나 식사를 하면 배가 아픈 것 같은 몇 가지 질환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약물이었지.”

페렐르만 자작은 씹어뱉듯 중얼 거렸다.

“하지만 실용화시키기 전에 내 딸이 없어졌고… 그대로 진행 하던 연구 결과를 넘기고 왔어. 다만, 기억이 나는군.”

약을 독으로 바꾸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사냥 대회의 하엘던 황자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슷한 조합으로 질병을 일으키는 약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요?”

“그래. 연구진을 이끌고 있던 하엘던 황자님께 맨 처음 상의를하니 첫마디가 ‘조금만 바꾸면 상당히 유용하고도 새로운 독이 되겠군.’이었어.”

“그래서 자작님은 어떻게 대답 하셨나요?”

“의료 연구진의 기본 이념도 모르시냐며 들이받았지.”

그 말에 디엘이 옆에서 절레절 레 고개를 저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사회생활을 못 하는 것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고작 자작 위를 가진 이가 연구진의 우두머리인 황자를 들이받다니......

“흐으음……”

케인즈 경은 방금 성분 분석을 한 결과를 보며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천재가 아니다 보니 페렐르만 자작처럼 한 번에 보자 마자 알아채기는 어려운 둣했다.

페렐르만 자작이 케인즈 경에게 이것저것 원리를 설명하는 동안, 호아킨 단장님은 다시 웨데릭을 끌고 지하 감옥으로 사라졌다.

“퍼즐을 맞추는 것 같군.”

에르안은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전혀 관심 없던 일이었지만 이제 내가 얽혀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듯했다.

“하엘던 황자가 외숙부를 도와 준 건 알겠어. 일개 남작이 황자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무엇보다 대체 그게 왜 페렐르만 자작의 딸과 관련이 있는 거지?”

“시오니 님께서는 친정에 가기 위해서 이시더 남작령을 지나쳐야 했으니까요.”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무 옛날 일이고, 하엘던 황자님께서 진실을 알려 주실 리도 만무하니 더 이상 퍼즐을 찾는 건 어렵겠어요.”

“하지만……”

“공작님, 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시겠어요?”

지금처럼 진실이 필요했을 때가 없었다.

[칸시아가 곧 모든 전말을 알려 줄 거예요. 당신은 모든 진실을 알게 돼요. ]

티실리아 대신녀가 내렸던 신탁이 이런 뜻이었나.

[제가 보기에는 반년 안에 크게 아프실 거거든요? 그때가 되면 공작성으로 오세요. 제가 천재 의사라는 건 바뀌지 않았으니까.]

뭐든 말만 해 보라는 에르안의 얼굴을 보며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곧 집시 할머니 하나가 찾아올 거예요. 이름은 칸시아 멜로니아. 그분이 오셔서 저를 찾으면 꼴이 얼마나 거지같든 절대 쫓아내지 마시고 제게 즉시 안내해 달라고 문지기들에계 얘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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