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8화
로만이 몇 시간 후 사용인을 부르기 위해 종을 울렸을 때,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남작저를 지켜 왔던 노인 마구간지기밖에 없었다.
“뭐야?”
로만은 씩씩거리며 마구간지기 를 노려보았다.
“다들 어디 가고, 네가 오는 거 지?”
“……다 떠났습니다.”
“뭐?”
“월급이 많이 밀린 데다가, 어음을 쓰셨다는 소문이 돌아.....”
“이런 배은망덕한 놈들!”
마구간지기의 느릿한 말에 로만은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남작저의 복도는 쓰레기들로 엉망진창이었고, 벽에 있던 그림마 저 떼어 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주방으로 달려간 그는 식자재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리체에게 아모리꽃 농축액을 사 기 위해서 쓴 어음에는 작위와 영지가 걸려 있었다.
은행에서 수금하러 을 날이 며 칠 남지 않았다.
한때는 세르이어스 공작령 전체 를 웨데릭에게 줄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지금은 작은 남작령조 차도 완전히 빼앗길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경멸하면서 부려먹었던 아론 크릴소와 달라질 것이 없는 몰락 귀족이 되 는 것이었다.
“남작님.”
마구간지기가 조용히 말했다.
“선대 남작님을 생각하여, 말 한 필을 필사적으로 지켰습니다.”
“한 필이라고?”
로만의 눈이 광기로 번득였다.
“그것도 힘들었습니다. 다들 몇 달씩 월급이 밀렸으니까요.”
“젠장, 빌어먹을 것들!”
“어디 도움을 청할 곳은 없으십 니까?”
로만은 아수라장이 된 복도 한 가운데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윗선에서 ‘엄중 문책’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그의 어려움을 보살펴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아냐…… 필요 없는 패로 낙인 찍히면 내 목숨도 장담할 수 없다.’
그의 윗선은 냉정하면서도 잔혹 한 성격이었다.
그의 효용 가치가 사라진다면,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지금 당장 암살자를 보내도 이상하지 않았
사방이 가로막힌 기분인데, 목 숨보다 아꼈던 아들마저 생사가 불분명했다.
그러나 당장 식재료도 없어 식사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며칠 지나면 이 저택과 영지마저도 그가 발 디딜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다.
마구간지기의 말대로, 그에게 남은 것은 말 한 필뿐이 었다.
결국 도움을 청할 곳은 단 한 군데였다.
남작령에 걸린 어음쯤이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갚아 줄 수 있는 부유한 영 지.
어려움에 처할 때 은근슬쩍 부 탁하면 그의 친누이가 적선하듯 보석을 툭툭 내주던 곳.
그래서 언제나 동경했고, 누군 가 그곳을 가질 수 있다며 유혹 했을 때 홀린 듯 간절히 염원하 게 된 땅.
“……세르이어스 공작령으로 가야겠다.”
***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어안이 벙벙했다.
마지막 단계는 시약 검사로 또 지루한 시간을 꽤 기다려야 했다.
디엘이 준비해 놓은 시약으로 이런저런 검사를 시행하면서 페렐르만 자작과 나 사이에는 미묘 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고 했지만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디엘.”
“네!”
시약을 정리하던 디엘이 바짝 얼어 대답했다.
“월급의 500% 보너스다.”
담담한 페렐르만 자작의 말에 디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니, 자작님…… 제가 그런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싫으면 말고.”
“그래도 그만한 대가를 받을 일이기는 했지요.”
순식간에 태세를 바꾼 디엘이 히죽 웃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과했다.
“미안, 그런 사정도 모르고 나는 네가 사고 친 줄만 알았어……”
“됐어.”
자본의 힘인지, 디엘은 세상 너그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 정도야 봐줄 수 있지, 뭐. 친구 사이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가 흠칫 놀라 슬쩍 페렐르만 자작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 내 말은…… 아직은 우리가 친구라는 거야. 네가 페렐르만 사람이 되면 그땐 얘기가 당연히 달라지겠지!”
그렇게 되면 내 신분은 귀족이 되는 셈이라, 디엘이 왜 급하게 덧붙였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귀족 신분을 얻는다는 뜻 은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양녀로 들어가지 않아도 에르안과 결 혼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단단하게 깔려 있는 페렐르만 자작저의 대리석 길을 떠올리며 나는 펠릭스 어르신이 준 손수건 을 만지작거렸다.
노인의 정성이 들어간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일이 온다던데.
‘정말로 내가 혈육을 찾은 걸까’
그 대리석 길이 나를 위한 것이고, 내가 펠릭스 어르신의 손녀가 되고 세이린 경의 조카가 되며 페렐르만 자작의 딸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엄마…… 내 엄마 시오니는……’
제대로 된 산파나 의사 없이 나를 낳다가 마력이 섞여 죽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울적해 졌다.
마지막으로 건국제 부스에서 본 이시더 남작의 얼굴이라도 힘껏 때리고 싶었다.
“근데, 자작님의 따님이 반란군과 얽혀 있다고 했잖아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요?”
“몰라.”
페렐르만 자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반란군이라니, 난 그런 정치적 문제와는 얽힌 적도 없어. 관심도 없고 말이야. 유일하게 황가와 가까웠던 일은 황실 의료 연구진에 들어갔던 거야. 그마저도 거기 가서는 연구만 했다고.”
“연구만 하셔서 문제였지요.”
디엘이 냉큼 끼어들었다.
“그런 곳에서는 사회생활이라는 걸 좀 하셨어야죠. 특히나 하엘던 황자님이 계신데.”
“넌 그 당시에 어려서 자세한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아는 척이냐?”
“페렐르만 상단에 있으면 다들 하는 얘기니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죠.”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반란군과 얽혀 있다는 페렐르만 자작의 딸이 나일 가능성이 높아진 지금, 어떻게 해서든 진실을 알고 싶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어디에서든 환 영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반란군의 표적이 될 정도로 여기저기 들쑤시는 성 격도 아니었다.
문제는 반란군의 끄나풀에 불과한 이시더 남작을 잡는다고 해도 딱히 답을 내지 못할 것 같다는 거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란군의 뒤에 하엘던 황자님이 계시는 건 아닐까요?”
페렐르만 자작과 디엘을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증거도 없이 황족을 함부로 의 심하는 것은 모독죄에 해당하여 크게 경을 칠 수도 있었다.
나는 우후죽순으로 일어나던 반란군의 최종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을 때 회귀했다.
“황태자님이 다치시면, 바로 다음 황위 계승자이시니까요.”
“글쎄다.”
페렐르만 자작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대답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지금 황제 폐하께서는 노환과 지병이 심각 하여 반란군을 밟을 여력이 안 되신다. 그리고 황태자님은… 알다시피……”
“실력만 믿고 아무 생각이 없으시죠……. 하지만 이번엔 목숨이 정말로 위태로우셨는데 여전히 별생각 없으세요?”
“대다수가 그렇듯, 사고라고 믿고 계시지.”
나 역시 에시언의 말 한마디로 눈치챈 것이므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작정하고 나를 살려준 에시언을 곤란하게 만들수도 없었으니까.
사실 가만히만 둬도 제이드 황태자가 다 때려 부수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진실이 너무 궁금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하엘던 황자는 황실 의료 연구진을 이끄는 자신의 위치에 정말로 만족하고 있어. 정치보다는 연구가 적성에 맞는다는 말을 계속 퍼트리고 있 으니까.”
“자작님 생각은 어떠세요? 직접 함께 연구하셨잖아요.”
“홈……”
페렐르만 자작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대답했다.
“진정한 의료인이라면 언제나 환자의 회복이 우선이어야 한다. 하지만 황자는 겉으로 보이는 연구 실적에 목을 매는 사람이야.”
나는 사냥 대회에서의 하엘던 황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수혈이 급한 환자인데도 천천히 사람들 앞에서 나탈리가 을 때까지 기다린 것, 사람 둘이 다친 것을 가지고 ‘흥미로운 대결’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끼리 이렇게 말해 봤자 아무런 성과가 없다는 건 아시죠?”
디엘은 조심스럽게 시약을 정리 하며 말했다.
간이 작은 그는 이런 화제가 불편한 듯했다.
“이런 건 황실을 맘대로 의심해도 그에 맞설 권력이 충분하신 공작님께 맡기자고요.”
안 그래도 에르안은 웨데릭을 더 ‘조져야’겠다며 지하 감옥으로 사라진 채였다.
이미 나을 것은 다 나온 것 같지만, 한 마디라도 더 기억해 내면 단서가 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물론 아론도 열심히 심문한 모양이지만 그는 끄나풀인 관계로 웨데릭보다 더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너와 관련 된 일이잖아, 리체. 무조건 도와 야지.’라고 말하며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반란군과 페렐르만 자작의 딸이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내뱉은 사람이 웨데릭이었기 때문에 추 가 심문을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우리가 딱히 할 일이 없어요. 그냥 기다려요. 어차피 증거도 없잖아요.”
디엘은 제발 그만하라는 둣이 더 분주하게 연구실을 정리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 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디엘이 무언가를 치우려고 하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아냐, 디엘. 그건 아직 시작도 안 한 거야. 거기 그냥 놔둬.”
“응? 오래전부터 있던데?”
“아직까지 못 알아내서 그래. 근데 곧 밝혀낼 수 있어.”
그 말에 호기심을 보인 사람은 페렐르만 자작이었다.
“뭔데?”
그는 천천히 일어나 디엘이 들고 있는 실험 기구들을 기웃거렸다.
그건 웨데릭이 예전에 에르안에게 준 과자들이었고, 이제 다 자란 살살이풀을 투입하여 성분을 알아낼 일만 남아 있었다.
“뭔데 네가 못 알아내는 거야?”
“아… 웨데릭 님이 어린 시절 공작님께 이상한 과자를 몰래 먹였더라고요.”
“뭐? 나 몰래?”
“네. 이르비아로 내려가시고 몸이 훨씬 더 좋아지셨잖아요. 그 래서 과자에 무슨 성분이 있나 하고 계속 연구하고 있었어요.”
나는 생각난 김에 조심스럽게 다 자란 살살이풀을 넣어 과자 성분을 분리하며 말했다.
“사실 거의 6년 가까이 붙잡고 있었는데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는 거예요. 아무리 과자로 만들 어 성분을 유추하기 힘들다고 해 도 이렇게까지 못 알아내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그래 도 살살이풀을 구해서 드디어 성분을 분리할 수 있게 됐어요.”
“웨데릭이 그런 지식을 갖고 있을 리가 없고, 조금이나마 의학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시더 남작인데…. 그깟 이시더 남작이 만든 과자 성분을 네가 지금까지 못 밝혀냈다고?”
“그러니까 미칠 지경이었죠.”
나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제 실력에 그럴 리 없는데.....”
“어디 봐.”
페렐르만 자작은 턱을 치켜들며 내가 분리하고 있는 시험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 한번 해 보라는 표정으로 살짝 뒤로 물러났다.
분하지만 내 실력에 비견될 사 람은 페렐르만 자작뿐이다.
그라 면 이 성분들을 한 번에 알아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뭐, 황실 의료 연구진이야 명성은 대단했지만 사냥 대회 때 보니 우리 실력에 비할 바는 아니 었다.
그가 성분을 분석하고 있는 동안, 나는 턱을 괴고 잠시 물러났다.
어차피 성분을 다 분리한 이상 나 역시 천천히 들여다보면 독의 원리는 알 수 있을 터였다.
잠시 양피지에 무언가를 끼적이던 페렐르만 자작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디엘.”
“네?”
“증거가 나왔으니 이제 우리가 좀 더 이 일에 대해서 떠들어도 되겠군.”
“증거요?”
“그래.”
페렐르만 자작은 진지한 얼굴로 외알 안경을 들어 올렸다.
“리체가 이 과자의 성분을 알아 내지 못한 건 당연하다.”
“……왜요?”
나는 부루퉁하게 물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증거’라고 언급했다는 건 이 과자가 황실과 연관되었다는 뜻이었다.
끽해야 황실 의료 연구진이 만 들었을 독을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전 천재인데요. 대체 왜 못 알 아냈을까요?”
“또 다른 천재가 만들어 냈으니 못 알아내지.”
페렐르만 자작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황실 의료 연구진에 소속되어 있을 때 내가 만든 조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