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7화
디엘이 생각했던 그림은 여러모로 지금 상황과 달랐다.
일단 페렐르만 자작과 리체를 조용히 불러서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이렇 게 큰일을 주도적으로 발표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 그러니까…… 우연히 페렐르만 자작님의 피를 리체가 개발해 낸 친자 검사 시약에 넣었는 데 비슷한 색이라서……”
그는 누군가의 뒤에서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혼자 뿌듯함을 느끼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주목받는 지금 이 순간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페렐르만 자작과 리체뿐 만이 아니라 이사벨과 에르안, 호아킨과 케인즈 앞에서 이런 중 대 발표를 하게 되다니……
심지어 모르긴 몰라도 이들의 분위기는 아주 험악했다.
“그래서 몰래 머리카락 검사를 해 봤고, 그 결과가 다 ‘일치’가 떠서……”
리체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페렐르만 자작이 올 때까지 기다린 것은 괜한 희망을 줘서 리체가 괴로워하지 않길 바라서였다.
한스와의 친자 검사가 이루어지 던 그 오랜 시간 동안 리체가 얼마나 긴장한 표정으로 공작성을 돌아다녔는지, 결국 가족을 찾지 못했을 때 얼마나 허탈한 표정을 지었는지 디엘은 잊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똑같은 푸른색이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지금 혈액을 뽑아서 검사를 해 봐야겠네.”
리체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표정이 확연히 굳어 있었다.
디엘이 페렐르만 자작이 직접 을 때까지 기다린 이유를 눈치첸 탓이었다.
어차피 지금 혈액을 뽑아 시약에 넣어 같은 푸른색이 나온다고 해도 또 3단계인 시약 검사가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품어야 하는 희망과 절망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야겠다는 디엘의 배려를 알게 된 페렐르만 자작 역시 조용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리체는 연구실로 가서 직접 자신이 개발한 용의 발톱 시약과 마력 감정석까지 가져왔다.
“그럼…… 확인해 보죠.”
페렐르만 자작과 리체는 나란히 앉아 직접 주사기로 자신의 팔에서 피를 뽑았다.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이사벨은 입술을 떨었다.
저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집중 할 때 입매에 힘이 들어가는 버릇이라든가 미간이 살짝 찌푸려 지는 각도라든가 하는 것이 상당히 유사했다.
‘그러고 보니 동그란 초록색 눈 이 완전히 시오니를 닮은 것 같 기도 하고…’
리체가 온 후 페렐르만 자작이 워낙에 마음 놓고 여기저기 떠도는 바람에 리체와 함께 있는 것을 자주 보지 못해서인지 여태껏 생각조차 못했다.
아니, 그냥 의식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홀려 넘긴 것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은 오랜 시간 금 발의 녹안인 딸을 찾아 헤맸고, 사실은 딸의 특성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무기력 에 빠져 버렸다.
오랜 시간 그 딸을 리체와 연결 짓지 않아 왔기 때문에 새삼 다르게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아마 공작성의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각각 시약이 담긴 비커에 피를 홀려 넣는 동안, 긴장 속에서 정적이 흘렀다.
“아.”
피가 시약 속에서 퍼지는 순간, 분홍색 시약이 정확히 똑같은 파란색으로 변하는 것을 본 응접실 사람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 져 나왔다.
디엘이 혹시 몰라 재빠르게 갖다 준 마력 감정석에서도 당연히 같은 결과였다.
이제 확실히 하기 위해, 꽤 오 랜 시간이 걸리는 시약 검사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르가와 리체의 얼굴에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둘이 부녀 관계일 확률은 상당히 높았다.
마지막 검사에서 불일치가 뜬다 고 하더라도 분명 가까운 혈연 관계였다.
잃어버린 딸도, 리체도 열아흡 이었다.
시오니의 마지막 메시지에서 딸 은 6월 9일 생이었고 세르이어스 공작령으로 보냈다고 되어 있었다.
리체는 세르이어스 공작령의 변 방에 있는 강물에서 발견되었으 며 〈제하 보육원〉의 엘번이 그녀를 건진 6월 말을 생일로 치고 있었다.
이 아귀가 들어맞는 모든 상황이 우연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시약 검사가 남아 있으니까 확정은 할 수 없지만, 가능성 이 꽤나 높겠군요.”
리체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말 했다.
아무래도 한스와 있었던 일 때 문에 100%가 될 때까지 상황을 선뜻 확정지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딸을 찾아왔고, 관련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페렐르만 자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물론 그의 시선도 같은 색깔을 띠고 있는 두 비커 속의 시약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 시간 찾았어……. 확실하 게 하는 데에 조금은 더 기다릴 수 있지.”
리체가 상처받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아르가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딸이 간절했지만 리체 는 천애 고아로 살아왔으니 혈연 에 대한 갈망은 어쩌면 그녀가 더 컸을지도 몰랐다.
아르가는 가만히 리체가 맨 처 음 자신을 찾아 공작성에 오던 날을 떠올렸다.
처음 보던 날부터 딸의 방을 주고 싶다고 느꼈던 충동이 거짓말 처럼 생생했다.
당당하고 총명하던 꼬마 여자애가 어느새 커서 자신의 뒤를 이어 주치의 계약서를 썼다.
사냥 대회에서 당당히 하엘던 황자에게 사과를 받아내던 리체 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에서 왈칵 이상한 감정이 솟구쳤다.
아까 케인즈와 호아킨이 서로 리체를 양녀 삼고 싶다고 했을때 어깃장을 놓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양부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잃어버린 딸에 대한 이상한 죄책감 때문에 리체의 거부를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그 와중에 리체가 정말 자신의 친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맞닥 트리자 온몸이 울렁거리는 것 같 았다.
‘시오니……’
이름을 가만히 떠올리는 것만 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것 같아, 아르가는 오히려 더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딱딱하게 말했다.
“디엘, 관련 시약을 모조리 준비해라. 당장 시행해야 하니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리체의 옆에 앉아 있던 에르안이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조금이 라도 빠른 게 낫지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에르안은 리체가 가족을 얼마나 찾고 싶어 했는지 알고 있었기때문에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하여 말을 이었다.
“당장 외숙부를 잡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차피 뭐 별달리 아는 것은 없을 것 같지만 작은 실마리라도 이 상황에는 맞춰 볼 수 있으니까.”
로만은 어차피 수중에 있는 피 라미 같은 적이었기 때문에 잔뜩 고통스러워하라고 놔둔 것이었다.
리체의 계획이 다 먹힌다면 스스로 세르이어스 공작령에 기어 들어을 작자였으니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조금이라도 그가 아는 정보를 캐낸다면 시약 검사에 걸리는 오 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질 지도 몰랐다.
분명 웨데릭은 반란군과 ‘페렐 르만 자작의 딸’이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본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리체가 얽혀 있을 가능성이 조금 이라도 있다면 얘기는 달라졌다.
“그게 좋겠다.”
이사벨이 고요하게 호아킨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남동생이라고 편의를 봐주지 말고, 세르이어스의 적이라고 생각하세요.”
“……일단은.”
아르가는 이마를 짚으며 일어났다.
“양녀 얘기는 없는 것으로 합시다.”
그 말에는 아무리 에르안이라고 해도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 얘기도.”
미묘하게 상황이 역전되었다.
[입양에만 관여하시죠, 자작. 될 수 있으면 잘 협조하시고. 성인의 교제 여부에 대해서 페렐르만 자작이 가진 권리는 없습니다. 페렐르만 자작은 대부지, 친부는 아니잖아요. 자신의 위치를 명확 하게 파악하시길 바랍니다. ]
아르가는 이사벨을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며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친부일 수도 있는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니까.”
***
로만은 ‘그분’에게서 반란군 자금을 대라는 명령을 받았다.
항구를 끼고 있는 이시더 남작 령에 가까운 메일리스 공국에 일부러 피부병을 일으키는 화장품을 유통시키고, 치료제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라는 것이 윗선의 지시였다.
[메일리스 공국의 의학은 상당히 질이 좋지 않다. 치료제의 개발 자체도 상당히 어려울 것이 니, 큰돈을 벌 기회야.]
그가 시킨 대로 일을 진행하던 도중 웨데릭이 실종된 것이다.
페렐르만 자작이 언급한 서쪽을 뒤지러 당장 출발하느라 결국 메 일리스 공국의 일은 뒷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화장품 유통을 세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그 결 과 소수의 몇 명들에게만 퍼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몇 명이 고위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꽤 돈이 될 것이 라고 생각했다.
반란군 자금도 자금이지만, 당장 웨데릭의 정보를 알고 있다는 길드에게 빠르게 돈을 주기 위해 그는 무리해서 리체에게 아모리 꽃의 농축액을 샀다.
사실 그 길드에서 온 편지도 리체가 조작하여 보낸 것이었지만 자식이 걸려 있는 일이니 로만은 맹목적으로 믿었다.
작은 희망에 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치료제를 만들어 메일 리스 공국에 보낸 후, 그는 초조 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저기, 남작님……”
그러나 치료제의 유통을 맡긴 하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 치료제가 돌아서 수요가 없었습니다.”
로만은 어이가 없는 상황에 눈을 껌백였다.
“진정제가 아니고?”
건국제 기간 동안, 진정제가 돌고 있다는 것은 내부 정보로 알아냈지만 분명히 일시적인 것이 라고 들었다.
“네.”
하인은 그의 눈치를 보며 대답 했다.
“확실히……치료제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희의 치료제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돼.”
로만은 미친 둣이 고개를 저으 며 거칠해진 머리카락을 쓸었다.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메일리 스 공국 같은 의료 후진국이 그토록 복잡한 치료제를 개발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아모 리꽃은 시장에 잘 돌지도 않아서 생각해 내기도 어려워!”
의학을 좀 아는 자신도 그분이 건네준 치료제 성분을 보고 무릎 을 쳤을 지경이었다.
백지 상태에서 연구해 내려면 아르가가 매달린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것까지는 제가 알 수 없 고……”
하인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남작님, 월급이 밀린 지 세 달 째인데……”
재정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집사가 며칠 전에 조목조목 짚어 주었다.
사용인들이 월급이 밀려 하나둘씩 집 안의 값나가는 물건을 들고 도망가는 일이 늘었다.
로만도 지금 남작저를 관리할 상황이 아니라서 저택은 점점 더 황폐해지고 있었다.
“지금 그게 문제야? 아냐… 아직 희망이 있지. 그분께 답신은 받아 왔느냐?”
하인은 주춤거리며 품 안에서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메일리 스 공국에 그를 보내며, 윗선에 급전을 부탁하는 편지도 전달한 터였다.
정신없이 봉투를 열어본 로만의 표정이 더 무시무시해졌다.
[관람탑의 실패 때문에 이쪽도 예산이 부족함.
메일리스 공국의 일을 제 때 처리하지 못한 것을 엄중 문책할 예정임.]
그의 얼굴을 본 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답이…… 부정적인가요?”
“젠장, 나가! 나가라고!”
로만은 화를 벌컥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상황이 믿을 수 없다는 둣이 그는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책을 집어 던졌다.
하인은 조용히 로만의 방을 나섰다.
그가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서자, 얼마 남지 않은 사용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진짜로 이제 월급이 나온대?”
사용인들의 질문에 하인이 절레 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이 잘 안 됐어.”
그는 장갑을 벗으며 복도에 침을 퉤, 하고 한 번 뱉었다.
“다들 얼른 조금이라도 돈 되는 것 가지고 튀자고. 이 영지도 곧 넘어갈 테니까.”
“뭐? 영지가 왜 넘어가?”
“어음을 썼거든. 그걸 갚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끊긴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오는 길이야.”
몇 달 동안 월급이 밀려도 ‘혹 시나’를 생각하며 기다리던 몇 안 되는 사용인들은 그 말에 누 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후다닥 흩어졌다.
그러고는 남작저의 얼마 안 남 은 물건들을 정신없이 챙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