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6화
“크흠.”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페렐르만 자작이 끼어들었다.
“오랜 시간 세르이어스 공작령 소속인 데다가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아니에요.”
지금 당장은 생각이 없다며 단호하게 말하려다가, 페렐르만 자작의 말을 자르는 것이 먼저인 것 같아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자작님께서는 친딸을 찾으셔야죠. 자작저의 대리석 길은 저를 위한 게 아니니까요.”
“.............”
“주인이 있는 자리에는 가고 싶 지 않아요. 아무리 형식상이라고 해도.”
곧 이시더 남작이 만신창이가 되어 찾아오면 친딸에 대한 단서 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이미 그의 딸 방을 쓰고 있었다.
혹시라도 친딸을 찾았을 때, 그 딸이 양녀로 들어온 나를 보고 이상한 박탈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페렐르만 자작 역시 내 말 뜻을 알아들었는지 크흠, 하는 헛기침 과 함께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인즈 경과 호아킨 단장님을 번갈아 바라보 며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성에 차지 않 는 듯했다.
“뒷배경이나 지원 같은 것 다 필요 없습니다.”
미묘한 침묵을 깨고 에르안이 정리하겠다는 둣 찻잔을 딸깍, 내려놓았다.
“어차피 제가 다 해 줄 거거든요. 두 분 중 아무나 해 주시죠. 말 나온 김에 지금 결정하는 것 이 좋겠습니다.”
호아킨 단장님, 케인즈 경, 그리고 페렐르만 자작 사이에서 미묘 하게 흐르는 긴장은 싹 무시한 채 에르안이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턱을 치켜들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차피 다른 부수적인 것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지금요? 굳이 그렇게 급하게……”
내 말은 또 페렐르만 자작에게 가로막혔다.
“홈.”
그는 아주 못마땅한 둣이 언성 을 높였다.
“아무나 해 달라니. 그런 무책 임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결혼 을 언제 할지도 모르는 거고, 둘 이 헤어질 수도 있는 거고. 꼭 이런 방식을 택해야 하는 겁니 까?”
“결혼은 리체가 원하는 순간 할 거고, 헤어질 일은 없습니다. 제 가 다 맞출 거거든요. 하지만 굳 이 다른 방식을 원하신다면
에르안은 검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열혈 개혁 세력이 되어 몇 년 이 걸리든 제국의 법을 바꾸든 가, 오랜 싸움을 시작해서 독립 공국을 만들든가, 법을 바꾸는 건 오직 황족만이 가능하니 반역 을 일으키거나.”
그는 살짝 어깨를 으쓱하며 섬뜩하게 덧붙였다.
“그중 제일 빠른 건 반역이겠군요. 제일 맘에 들기도 하고.”
“정말 괜찮은 방안이지만, 평화 주의자인 리체가 싫어하지 않겠 니.”
이사벨 마님이 사근사근 말했다.
“그러니 페렐르만 자작께서도 받아들이시지요.”
“행.”
페렐르만 자작은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리체를 위한 일 아닙니까.”
이사벨 마님이 평소의 오만한 말투 대신 달래는 둣한 어조를 사용하며 말했다.
페렐르만 자작은 내 대부였기 때문에 다른 곳에 양녀로 들어가 려면 그의 허가가 필요했다.
“뭐…… 알겠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둣이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렇게 아무 집안에나 보낼 수는 없습니다. 여러모로 리체에게 어울리는 자격이 되는 가문에 보내야죠.”
“아무 집안이라니.”
케인즈 경이 헛기침을 하며 미 간을 찌푸렸다.
“3대째 군의관으로 황족을 보필 해 온 가문입니다.”
하지만 페렐르만 자작은 못마땅 하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래도 그 가문은 안 됩니다, 케인즈 경.”
그가 딱 잘라서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집안에 가기엔 리체가 너무 똑똑합니다. 가족 식사 때 대화가 안 통할걸요. 적어도 저 정도 로는 영리해야 리체와 소통이 되죠”
민망해서 내 얼굴이 벌게질 지경이었다.
케인즈 경이 항의를 하기도 전에 호아킨 단장님이 싱글벙글 웃 으며 나섰다.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요.”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리체 양을 양녀로 들이게 되다니 영광……”
“아, 거기도 안 됩니다.”
페렐르만 자작은 호아킨 단장님 의 말을 단박에 끊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림이 안 그려지잖아요. 리체가 지나치게 귀엽습니다. 초상화라도 남기신다면 그 이질감을 어쩌시려고. 과욕이십니다, 호아킨 단장님. 적어도 저 정도로는 생긴 집안이어야 합니다.”
호아킨 단장님의 표정도 순식간에 굳었다.
기분이 잔뜩 상한 케인즈 경과 호아킨 단장님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화를 내려고 할 때였다.
“제가 얘 대부입니다.”
페렐르만 자작의 표정은 거만하 기까지 했다.
내 대부라는 자리가 거대한 권 력이라도 되는 듯 그의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 심기를 거스르시면 어차 피……”
페렐르만 자작을 살살 달래려고 하던 이사벨 마님과는 달리, 그 꼴을 도저히 못 봐 주겠다는 둣 에르안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 간 와중에도 눈매에 이상한 광채가 맴돌았다.
“페렐르만 자작.”
낮은 목소리가 섬뜩했다.
“적당히 하시죠.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아니면 내가 반역이라도 일으키는 꼴을 보고 싶은 건지.”
“반역은 안 돼요!”
내가 그의 팔을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페렐르만 자작을 바라보며 어설프게 웃었다.
“자작님, 저를 아끼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적당히 허락해 주시면…. 지금 당장은 저도 좀 부담스러우니까, 나중에……”
“어쨌든 네 가장 가까운 보호자는 나야.”
페렐르만 자작은 에르안의 얼굴 을 보며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한테 넌 너무 아까워. 그 런데 아까운 집안에까지 보낼 순 없다.”
“에르안에게 리체가 아깝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어깃장을 놓을 권리는 대부에겐 없지요.”
지금 당장은 부담스럽다는 내 말은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서로의 자존심 싸움이 되어 버렸다.
이사벨 마님이 섬뜩한 어조로 눈을 번득였다.
“입양에만 관여하시죠, 자작. 될 수 있으면 좀 협조하시고. 성인의 교제 여부에 대해서 페렐르만 자작이 가진 권리는 없습니다.”
“.............”
“페렐르만 자작은 대부지, 친부는 아니잖아요.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하시길 바람니다.”
찻잔을 쥔 페렐르만 자작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좀 쉴까요?”
이러다가는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질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끼어들어 말했다.
어차피 페렐르만 자작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닐 것이다.
조금만 시간을 가지면 스스로 진정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 과열된 분위기를 좀 가라앉 히면 굳이 지금 무언가를 결정하 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침착하게 말할 예정이었다.
나는 그저 에르안과 연애를 하 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저는 잠시, 옷매무새를 추스르러 다녀올게요.”
“그래.”
이사벨 마님은 환히 웃으며 대 답했다.
“다들 각자의 생각을 좀 정리해 볼 시간을 갖도록 하죠.”
나는 자신이 옷매무새를 정리해 준다느니 하는 에르안의 헛소리 를 깔끔히 무시하고 일어났다.
몇 명은 바람이라도 쐬러 나갈 줄 알았는데, 나 외에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사람은 뜻밖에도 디엘이었다.
디엘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발을 동동거리며 서 있었다.
“디엘? 왜 여기 있어?”
“페렐르만 자작님이 오셨다며.”
며칠 전부터 페렐르만 자작이 언제 오는지 계속 확인하더니 정말로 급한 일인 듯했다.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응접실 앞에서 이렇게 꼬박 기다리다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 티타 임은 다 끝난 거야?”
“다 끝난 건 아니지만 좀 쉬고 있어.”
디엘이 페렐르만 자작을 이렇게 까지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나는 차마 가 서 기다리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 분위기라면 서로 기분만 상하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티타임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급한 일이라면 지금 말씀드려도 될 것 같은데.”
응접실 문을 열고 대화하고 있 는 중이어서, 응접실 안에도 우리의 말소리가 모두 다 들리는 모양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갈색 머리카락을 쓸며 신경질적으로 걸어 나왔다.
“왜, 뭐.”
그가 디엘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게…… 여기서 말씀드려도 될지……. 워낙에 큰일이어서……”
디엘은 그답지 않게 정말로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가뜩이나 저기압이었던 페렐르만 자작은 그의 망설임을 배 려해 주지 않았다.
“그냥 해.”
나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위로하듯 디엘의 둥을 두드려 주었다.
아무래도 친자 검사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안 그러면 다른 사 람도 아니고 페렐르만 자작을 대상으로 이렇게 머뭇거리며 시간 을 끌 리가 없었다.
그 후에도 디엘이 침묵을 지키 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는 것을 보면서 페렐르만 자작이 신경질을 냈다.
“아, 빨리 말해!”
페렐르만 상단에 꽤 피해가 갈 수 있는 내용이라는 추측을 하며 나는 조용히 말했다.
“편히 얘기해. 나는 빠져 줄게.”
“아냐!”
디엘이 뒤를 돌아서려는 내 팔 을 황급히 잡았다.
그러자 응접실 안에서도 나만 바라보고 있던 에르안이 벌떡 일 어섰다.
그러나 디엘의 이어지는 말이 더 빨랐다.
“너도 들어야 해. 그동안 내가 몰래 해 왔던 친자 검사 얘기란 말이야.”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그 상대를 나까지 들어야 돼? 내가 아는 사람이야?”
디엘은 심호흡을 하더니 단숨에 말해 버렸다.
“너랑 페렐르만 자작님이었거든 ”
일어서서 다가오려던 에르안마 저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