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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15화 (115/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5화

“에, 에르안?”

잠시 흐르던 침묵의 분위기를 깬 것은 이사벨 마님이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뭐지?”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설마 네가 말한 적 있는, 마음에 둔 여자라는 그 불쌍한 사람이……”

“리체 맞습니다.”

에르안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당당하게 말 했다.

“결혼을 전제로 하는 교제 승낙을 받아 내는 데에 한참 걸렸습니다. 죽기 살기로 매달려서요.”

“하……”

이사벨 마님의 동공이 미친 둣이 흔들렸다.

그녀의 얼굴에 고민과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안 그래도 내가 평민이라서 반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지내며 이 정도로 내적인 고뇌가 느껴지는 표정은 처음 보았다.

냉랭한 기운에 나뿐만이 아니라 응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침묵을 깬 사람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페렐르만 자작이었다.

“하지만 리체는…… 평민인데, 결혼이라니……”

“적당한 귀족 가문의 양녀로 들어가면 되죠. 그만한 집안은 가신 중에서라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에르안이 냉큼 대답하자 드디어 이사벨 마님이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거기까지 생각했구나.”

“더 멀리도 생각했습니다.”

“리 체.”

그녀의 심연과도 같은 새까만 눈이 나를 향했다.

“네게 묻겠다. 너도 같은 마음이니? 정말 에르안과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야?”

그토록 떨리는 목소리를 처음 들어 보았기 때문에 나는 조금 기가 죽었으나 그래도 또박또박 하게 대답했다.

“네, 교제를 결정한 이상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요.”

지금 당장 결혼하겠다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교제는 안 하겠다는 뜻이었다.

“에르안이…… 에르안이 좋니? 신중하게 대답해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답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할지도 모르니까.”

에르안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내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그의 표정에 언뜻 불안감이 스쳤다.

언제나 나를 두고는 안달복달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서,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이사벨 마님이 반대한다고 해서 금방 훌쩍거리며 물러설 생각이 라면 애초부터 에르안의 마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어영부영하다가 홀리듯 그에게 넘어간 것 같았지만 에르안은 오 랫동안 내 소중한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엔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 에서 시작했지만 그가 돌아온 이 후 두근거렸던 기억들이 어느새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특히나 셀리아나와 함께 있던 모습을 본 순간 급강하했던 내 기분을 생각하니 그가 다른 여자 에게 다정한 모습을 볼 수 없다 는 결론을 내렸다.

“하아……”

이사벨 마님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혹시 제가 근본없는 평민이라 공작님의 짝으로 마음에 들지않으시는 거라면...”

“리체.”

나의 조심스러운 말에 이사벨 마님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마저 고여 있었다.

“용서하렴…… 정말 엄청나게 고민했지만, 나 역시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기적인 사람에 불과하구나.”

에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기 시작하고, 그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너를 아무리 친자식처럼 생각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기만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나 자신이 실망스러워서 어쩔 수 없지만 결국엔 에르안이 내 친자식 이지. 그건 어쩔 수 없구나. 미안 하다.”

그러더니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있던 에르안의 손을 찰싹 쳐서 떼어냈다.

에르안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녀가 자유로워진 내 손을 꼭 붙들었다.

“너를 정말로 내 친딸처럼 생각했다면 저 개차반보다 네가 훨씬 아깝다고, 절대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어야 할 텐데. 차마 내 이기적인 마음이 그럴 수가 없다.”

나는 흠칫 놀라 그녀의 아련한 표정과 꽉 잡힌 손만 번갈아 바 라보았다.

“네가 결국 저 껍데기에 넘어간 것이 뻔한데…… 말려야 하는데 차마 말릴 수가 없어. 저 몹쓸 놈을 잘 부탁한다. 네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결혼식부터 올릴 까?”

그녀의 눈꼬리가 에르안처럼 곱게 접혔다.

그렇게 작정하고 웃으니 단박에 중년의 유혹적인 분위기로 변했다.

획획 분위기를 바꾸는 것과 매 혹적인 표정을 지어 보일 줄 아 는 것까지, 에르안은 자신의 어머니를 닮은 것이 분명했다.

“반품은 안 돼. 살렸으니 부디 끝까지 책임져 주렴. 에르안이 좋다고 네가 직접 대답했잖니.”

나는 놀라서 잠시 눈을 깜빡였다.

솔직히 말하면 에르안이 좋긴 좋은 것같지만 이런 식의 빠른 진행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 었다.

아까 전에 돌이킬 수 없다고 말 한 것이 이런 뜻이었나…….

“이제 성년인데…… 벌써부터 결혼식을 생각하는 건 좀..”

“페렐르만 자작과 시오니는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했는걸.”

그 말에 페렐르만 자작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건 나니까 그렇고, 공작님이 상대라면 좀 더 지켜보는 게 낫겠지요.”

“대체 자작과 에르안이 뭐가 다릅니까? 성인의 결혼 여부까지 대부가 끼어들 건 아니라고 봅니다만.”

이사벨 마님이 완전히 표정을 바꾸어 냉랭하게 대답했다.

페렐르만 자작은 에르안과 자신의 차이점에 대하여 백 가지 넘게 얘기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이사벨 마님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일단 그럼 양녀로 들어갈 가신 가문부터 정하는 게 좋겠어.”

화제를 마무리한 그녀의 목소리 에는 거짓말처럼 생기가 돌았다.

“적당한 목록을 얼른 추려 봐야 겠다.”

“케인즈 경은 즉시 돌아가셔서 이 일을 반드시 황태자님께 전하길 바랍니다.”

에르안 역시 해사하게 웃어 보 이며 말했다.

“결혼 예정이라고 말이에요.”

분명히 결혼 전제가 아니면 절 대 교제하지도 않겠다고 한 건 난데, 갑자기 분위기가 곧 결혼을 할 것처럼 잡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는 과거의 내 말에 발목이 잡히는 것이 특기인 듯했다.

나는 좀 부담스럽다는 둣이 떨 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장 결혼 예정은 아닌데요. 그냥 미래가 없는 교제는 하고 싶지 않다, 뭐 이런 거였는데.”

“결혼 가능성이 백만분의 일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걸어 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내 말에 이사벨 마님이 사근사 근하게 대답했다.

에르안이 내 의사를 존중하면서 도 애정을 쏟아 부어 퇴로를 막아 버리는 것은 아마 이사벨 마님을 닮은 듯했다.

케인즈 경이 한숨을 쉬며 테이블 위에 있던 제이드 황태자의 서신을 재빨리 거두었다.

가만히 두면 에르안이 황태자의 친서를 찢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를 것 같았기 때문에 나로서도 반가운 처신이었다.

“아…… 뭐, 리체 양도 마찬가 지의 의견이라면 당연히 전달을 드려야겠죠.”

케인즈 경은 고뇌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제이드 황태자에게 어떻게 이 슬픈 소식을 전할까 고민하는 듯했다.

그때, 이사벨 마님의 뒤에 서 있던 호아킨 단장님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기…… 어차피 귀족 신분이 필요하신 거라면 저도 일단은 기사 신분이니, 고위 귀족은 아니더라도 작위가 있습니다만.”

그는 수염을 쓸면서 수줍게 말을 이었다.

“제가 양부가 되어 드리는 건 어떨까요?”

그 말에 이사벨 마님과 에르안의 눈이 커졌다.

이사벨 마님이 떨떠름하게 중얼 거렸다.

“음…… 뭐, 아예 남남인 가신 가문보다야 친숙하겠지만……”

“리체 양께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고, 개인적으로 목숨까지 빚지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저는 충성 맹세까지 했으니 제가 가진 작위가 리체 양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면 몹시 영광일 것 같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제안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결혼을 생각할 때쯤 어느 가문 에 양녀로 들어가는 게 좋을지 찾아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호아킨 단장님의 양녀라니, 어차피 형식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그림이 잘 그려지 지 않았다.

내 당황한 표정을 본 호아킨 단장님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비록 목적이 있는 입양이라고 할지라도, 그 어떤 가족보다도 잘해 드리겠습니다. 제 아내와 자식들도 두 팔 벌려 환영할 겁 니다. 결혼에 필요한 모든 지원 은 물론, 혹시라도 공작님과의 분쟁이 생기면 무조건 찾아을 수 있는 친정이 되어 드리겠……”

“페렐르만 자작저에 오면 되지, 무슨.”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페렐르만 자작이 툴툴대며 끼어들었다.

“한 번 가 본 적도 없는 단장님 의 가택에는 뭐 하러 가나? 그딴 일 생기면 무조건 자작저로 와.”

이상하게 그의 기분이 급강하한 것처럼 보였다.

에르안과의 교제 를 발표할 때보다 훨씬 더 못마 땅하다는 듯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때, 이번에는 케인즈 경이 눈을 반짝이며 한쪽 손을 들었다.

“저도 작위가 있습니다, 리체 양.”

“네?”

“저 역시 리체 양의 여러 활약에 감명받은 사람으로서, 입양될 가족을 구하신다면 욕심을 좀 내 보고 싶군요.”

그는 이미 제이드 황태자에게 내 거절을 전하는 일을 뒷전으로 보낸 것처럼 보였다.

호아킨 단장님이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아무리 형식상이라고 해 도 연고가 있는 사람이 낫지 않 겠습니까? 리체 양과 저는 세르 이어스 공작령 소속으로 오랜 시간을 지냈습니다. 제가 더 편하 시지요?”

“글쎄요.”

케인즈 경 역시 싱긋 웃으면서 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날카롭게 대답했다.

“저와 리체 양은 같은 직업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제 큰아들도 군의관 소속이니 가히 의사 집안이라 할 만합니다. 저희 집 안에 오시는 게 더 친숙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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