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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14화 (114/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4화

에르안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며 열흘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 아직도 아파……”

나는 손으로 그를 살짝 밀어내려고 했지만, 도리어 그는 그 손을 끌어 천천히 깍지를 꼈다.

“안 아픈 것 알아요.”

그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계속 누워서 내게 치료를 받고 싶어 했으나, 명의인 내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일하세요, 공작님.”

나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저는 제 일을 아주 열심히 해서 공작님을 다 낫게 해 드렸잖아요.”

“그러게, 너무 훌륭한 주치의야.”

에르안은 끙끙거리던 목소리를 단번에 그만두고 벌떡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시험관 속에서 자라고 있는 살살이풀을 관찰하는 데에 바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셀리아나에게서 받은 살살이풀 씨앗은 일주일 만에 쑥쑥 자라났다.

에르안이 다 나았으니 본격적으로 웨데릭이 주었던 과자를 연구 할 시간도 생겼다.

“몸도 다 낫고 했으니 오늘 어머니께 말씀드려야겠어.”

에르안은 머리카락을 쓸며 씩 웃었다.

“리체 에스텔과 결혼 전제로 교제할 거고, 그러기 위해서 알맞 은 귀족가에 형식상 양녀로 들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혹시 제가 귀족 출신이 아니라서 싫어하시지는 않을까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에르안이 담담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귀족 영애들의 혼담 서신을 떠올리며 나는 자신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를 능력 있는 주치의로 아끼 는 것과 쟁쟁한 집안의 여식들이 노리고 있는 공작령의 안주인 자 리를 허락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었다.

내가 그랬듯이, 애초에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 차이 때문에 우리 둘을 그런 식으로 아예 생각 해 보지 않으셨을 텐데.

“사실 난 어릴 때부터 유대감이 별로 없어서 어머니를 잘 모르겠어. 하지만 만약 그런 반응을 보이신다고 해도 상관없어. 내 미래는 대신녀도 못 바꿔.”

“그럼 오후에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요.”

“오후에? 왜?”

“페렐르만 자작님이 오시거든요.”

이즈음에 맞추어 수도에서의 봉사 활동을 그만두고 공작령으로 오셨으면 한다는 서신을 보냈고, 오늘 오후에 도착한다는 답장까 지 받은 터였다.

곧 이시더 남작이 제 발로 공작령에 찾아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페렐르만 자작만큼은 이시더 남작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볼 권리가 있었다.

“어차피 제 대부님이시기도 하시니 한 번에 말씀드려요.”

“그게 좋겠군.”

에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언가 관문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동안 밀린 일이 많으실 텐데 얼른 처리하세요. 여자에 눈이 팔려서 영지 말아먹지 마시고.”

“네가 머물 곳인데 대륙에서 가장 좋은 영지로 만들어야지. 그럼 넌 오늘 하루 종일 연구실에 있으려고?”

“네, 이제 살살이풀로 과자 성분을 분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신나서 말했고, 에르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혹시 연구실에서 계속 디엘 몰레킨과 함께 있을 건 아니지?”

“요새 걔 바빠요.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잘 안 나와요.”

친자 검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은 디엘의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기 위해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새 디엘이 정말로 이상한 건 맞았다. 가장 이상한 것은 그가 지금 페렐르만 자작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디엘은 페렐르만 자작이 멀리 떠날 때마다 최대한 늦게 오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요 근래 디엘은 내가 페 렐르만 자작과 서신을 주고받을 때 굉장히 초조해하며 ‘오신대? 언제 오신대?’ 같은 말을 몇 번 이나 반복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뭐 마려운 강 아지처럼 페렐르만 자작을 기다리느냐고 물었더니 긴히 밝힐 진 실이 있다며 결연하게 대답했다.

‘나한테 친자 검사 책을 빌려간 다음부터 날짜를 따져 보면… 지금쯤 머리카락 검사가 끝나긴 했을 텐데. 상대 여자가 페렐르만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왜 페렐르만 자작을 저런 표정으로 기다리는 거지?’

워낙에 그는 아이 이야기만 하면 도끼눈을 뜨고 억울하다는 듯이 팔짝팔짝 뛰어서 더 이상 물 어보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 주제만 나오면 내 눈을 못 마주치는 걸 보니 분 명 사고를 치긴 사고를 친 모양 인데…….

“어쨌든, 살살이풀 정말 고마워요.”

나는 신나서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몇 년간 끙끙대며 고민 해 왔던 문제가 풀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고작 이시더 남작 같은 사람이 고안한 과자 따위의 비밀을 밝혀 내지 못했다는 것은 내 자존심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정말 개인적인 호승심이 들 정도로 밝혀내고 싶었거든요.”

“앞으로도 네가 원하는 것이라 면 뭐든지 말해.”

에르안은 뿌듯하게 웃으면서 나 를 끌어안았다.

“다 나았으니, 이제 혈액 흐름 정도는 좀 빨라져도 되겠지?”

순식간에 그의 눈에 매혹적인 이채가 돌았다.

살짝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가 노골적으로 내 귓바퀴를 살살 어루만지는 바람에 나는 포기의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나는 그날 아침 생각보다 연구실에 늦게 들어가게 되었다.

***

페렐르만 자작은 티타임을 하기 딱 좋은 오후 시간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그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는데, 케인즈 경과 함께였다.

“리체 양.”

케인즈 경은 에르안에게 예를 표하기도 전에 나를 바라보며 아 주 반갑게 웃었다.

“이번에도 저희 황태자님의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뭐라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저는 단순히 밀치기만 한 걸요. 그 난장판 속에서 살아남으신 건 황태자님 능력이시죠. 전하께서 많이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아주 멀쩡하십니다.”

그 말에 내 옆에 서 있던 에르안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사정을 듣고 보니, 케인즈 경과 페렐르만 자작은 함께 수도에서 며칠간 의료 봉사를 했었고 페렐르만 자작이 세르이어스 공작성 에 간다고 하자 제이드 황태자가 케인즈 경을 딸려 보낸 것이었다.

지금 본인은 너무 바빠서 직접 오지 못하니, 나와 친분이 있으면서도 지위가 높은 이를 보내 감사 인사를 전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럼 케인즈 경도 들어오시지요.”

에르안은 짙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어머니와 페렐르만 자작을 모시고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함께 자리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의 속내가 뻔히 짐작되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케인즈 경의 앞에서 직접 나와 의 교제 사실을 밝혀서 제이드 황태자의 귀에 들어가도록 하려 는 속셈이 분명했다.

뭐, 물론 나 역시 내가 황태자 를 남자로 좋아한다느니 하는 그 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의 착각을 좀 깨 줘 야 할 필요성을 느낀 탓이었다.

그동안은 ‘리체는 날 좋아해!’라는 말이 그냥 인간적인 호감을 뜻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성적 인 의미라면 정말 곤란했다.

그래서 이사벨 마님과 케인즈 경, 나와 에르안, 페렐르만 자작 이 동석한 이상한 티타임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케인즈 경이 외부의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호아킨 단 장님이 형식상으로나마 이사벨 마님의 뒤에서 호위를 지켰다.

“이건 황태자님의 선물입니다.”

케인즈 경은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네며 싱긋 웃었다.

“목숨값으로는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정말 감사드린다고 몇 번 이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상자 속에는 딱 봐도 값이 나가 보이는 커다란 보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친필 서신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케인즈 경이 건넨 서신을 받아 들었다.

[내 목숨을 살릴 정도로 절절했던 리체 양의 사랑에 너무나 감탄했어.

원래부터도 나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

많고 많은 계산 때문에 미리 손을 내밀지 못한 나 를 용서해.

하지만 믿어 줘. 그날 밤, 나는 정말로 리체 양에게 고백하려고 했어.

어쩔 수 없이 달려가는 이 마음을 나는 결국 어쩌지 못했거든.

이제 그 어떤 힘듦과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함께할 거야.

내가 마음먹은 이상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막을 수 없을 테니.

그대 마음을 알면서도 주저했던 것,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

나를 향한 지독한 그리음에 시달렸 을 텐데 그만큼 실컷 사랑하도록 해.

내가 직접 그대를 데려다 옆에 세울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줘.]

한 글자 한 글자 읽을 때마다 나는 기가 막혀서 멍하니 입을 벌려야 했다.

무슨 세기의 사랑을 하는 것 같 은 결연한 서신에 소름이 다 돋 을 지경이었다.

“이미 대답을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대답을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서 신을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내려 놓았다.

“죄송하지만 케인즈 경…… 무언가 심각한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네?”

“저는 황태자님을 사랑해서 구해 드린 게 아닌데……. 제가 착 해서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걸 못 봤을 뿐이에요.”

그 말에 에르안이 팔짱을 낀 채 빈정거렸다.

“나도 딱히 충성심에 사냥 대회 에서 구해 준 게 아닌데 희대의 충신 취급을 하더군. 호의를 과 장하는 건 남녀 불문인가 봐.”

케인즈 경이 목을 몇 번 가다듬 더니 당황해서 말했다.

“뭐, 저도…… 리체 양이 딱히 황태자님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왔습니다. 게다가 황태자님께서는 진심이세요.”

“그 얼빠진 진심 그만둘 때가 됐군.”

에르안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진심이 통한 곳은 따로 있으니까.”

응접실에 적막이 흘렀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대 로 굳어 버린 이사벨 마님과 페렐르만 자작의 얼굴을 번갈아 바 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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