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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13화 (113/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3화

나를 어느 귀족가의 형식상 양녀로 들인 뒤 결혼하겠다는 에르안의 계획을 말해 주자 디엘은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망설이며 물었다.

“근데 양녀라면…… 친부모 찾는 건 포기한 거야?”

“그건 아니지.”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칸시아를 생각했다.

그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변수는 많았다.

미래가 바뀌어 버려서 그녀가 수정 구슬을 갖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고, 개차반처럼 살다가 또 어디에 기약 없이 갇혀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대신녀님은 칸시아가 진실 을 말해 줄 것이라고 했지만 그 시기를 함부로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확실하게 소 중한 사람부터 챙기기로 한 것이었다.

어느 귀족가에 양녀로 들 어간다고 해서 가족을 못 찾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부모님을 찾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볼 거야.”

“뭐…… 친부모님이 귀족일 수 도 있으니까.”

디엘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덧붙 였다.

“혹시 어디의 양녀로 들어갈지 는 생각해 봤어? 지금 생각나는 사람은… 음…… 페렐르만 자작님?”

“아냐.”

나는 페렐르만 자작저에 깔려 있던 대리석 길을 떠올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페렐르만의 성을 갖는 건 왠지 진짜 딸의 자리를 뺏는 것 같았다.

아무리 형식상이라고 할지라도, 만일 내가 가족을 가진다면 누군가의 빈자리에 대신 들어가는 느 낌은 싫었다.

“거긴 정말 아냐. 페렐르만 자 작님은 대부님으로 충분해.”

“……뭐.”

디엘은 쭈삣거리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어느 집 양녀로 들어가려면 페렐르만 자작님의 허락이 필요해. 대부님이시니까.”

“형식상일 뿐인데 상관없으시겠지, 뭐.”

“여하튼 미리미리 정하지는 마. 적어도 공작성에 도착한 다음에 천천히…”

“뭐 급할 게 있다고 공작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런 걸정하겠어.”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지만, 디엘은 이상하게 결연한 표정이었다.

“너는 친자 검사나 신경 써.”

본인 일에나 신경 쓰라는 의미로 나는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책임질 결과가 나오면 확실히 책임지고.”

“친구 일이라니까!”

“그래, 그래. 다들 친구 일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결과는 언제 나오는데?”

디엘은 씩씩거리며 짜증을 냈다.

“공작성 돌아가면 머리카락 검사를 마저 확인하고, 그러면 일주일?”

“그 다음 마력 검사랑 시약 검 사가 남았네. 내가 용의 발톱 시 약 좀 빌려줘?”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 며 말했다.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아기 옷 도 잔뜩 사 줄게. 결혼식도 제대로 올릴 거지?”

디엘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다가, 결국에는 무언가에 삐졌는지 저녁을 먹을 때까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

나는 공작성에 도착하자마자 본격적으로 에르안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사지를 거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다친 그는 일주일 내내 방 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나는 그의 주치의로서 그의 회 복에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므로 난장판이 된 건국 제와 많은 부상자가 생긴 관람탑

사건은 당연히 우선순위에서 밀 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내 부스를 제대로 철거하 지 못했고,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친 바람에 페렐르만 자작이 남았다.

일단 내 부스에 남은 농축 시액 들과 급히 페렐르만 상단에서 조달한 약초들로 의료 봉사를 좀 하겠다는 이유였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고 일손이 딸리는 게 눈에 보이는 데 재능있는 자로서 어떻게 가 만히 있나.”

페렐르만 자작은 팔짱을 끼고 냉담하게 말했다.

“귀찮고 짜증나지만 내가 워낙 에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이니 어 쩔 수 없지. 사명감 있는 천재의 숙명이야.”

“뭐, 저도 그런 사람이라 이해는 해요.”

인류애와 사명감으로 세르이어 스 공작성에 제 발로 들어온 나는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 이었다.

“공작님은 제게 맡기시고 편안히 봉사하시다 오세요. 저도 이제 주치의라고요.”

그래서 에르안은 내가 전담해서 돌보게 된 것이었다.

사색이 되어 달려온 이사벨 마님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라 는 말에 빠르게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

나를 구하려다 이렇게 다쳤다는 말을 할 때에는 이상하게 뜨끔했으나, 그녀는 ‘리체 아니었으면 뛰어들 수 있는 체력조차 없었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알고 보니 에르안의 아버지였던 전 세르이어스 공작님도 이런 규 모의 부상은 심심치 않게 겪었다고 했다.

“제가 어떻게 해서든 완벽하게 회복시킬게요……”

“그건 믿지.”

나는 차마 이사벨 마님께 에르 안과 교제하게 되었다는 말을 먼저 꺼낼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평민 주제에 공 작 부인 자리를 노리냐며 싸늘하 게 변할까 봐 두려웠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그런 반대에 굽힐 생각은 없었지만, 이 사벨 마님의 태도가 바뀌는 걸 직접 체감하면 너무 슬플 것 같 았다.

에르안은 자신이 다 낫고 나서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일단 그의 회복이 가장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붙어서 이런저런 치료를 하는 데 에 집중했다.

“많이 불편하시죠? 약도 너무 많이 드셔야 하고……”

“단언하건대 내 생애 가장 행복 한 나날들이야.”

에르안은 침대에 모로 누워서 자신의 몸에 이런저런 연고를 바 르는 나를 빤히 바라보곤 했다.

“너랑 하루 종일 이렇게 내 방 에 있고 말이야. 꿈꿔 왔던 날들 이라고.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워.”

분명히 온몸이 아플 텐데 그의 표정만큼은 환희로 빛나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가면서도 어제가 그리운 그 느낌 알아?”

“모르겠어요.”

“다 낫고 나면 이제 이렇게 하 루 종일은 붙어 있을 수 없잖아. 나도 공작으로서의 일을 해야 하 고 너도 네 일이 있고 하니까. 기껏해야 20시간 정도밖에 못 붙어 있겠지.”

“20시간이 기껏이라고요?”

“함께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 은데.”

에르안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몰랐는데, 내가 연인에게는 좀 집착하는 타입인가 봐. 언뜻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께 좀 집착했다고 들었는데.”

그걸 여태껏 몰랐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내가 그의 몸 여기저기를 살필 동안, 그는 내 머리카락을 매만 지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의 애처로운 눈빛만 봐도 무엇을 뜻하는지 뻔히 아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과도한 스킨십은 안 돼요. 흥 분하시면 혈액 흐름에 문제가 생겨요.”

입술을 한 번 마주 댔다가 급히 땐 이후, 본격적으로 치료하는 동안 나는 신체적 접촉을 최소화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실제로 너무 혈류가 빨라지면 회복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디엘이 그러는데, 안전에 유의하지 못한 프릴리트 후작에게 근신령이 내려졌다고 해 요. 황태자님도 전혀 안 다치시 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 나 봐요.”

단순한 안전사고로 처리되고, 반란군과는 얽지 않은 것이었다.

“리체, 그 얼빠진 황태자 얘기는 하지 마.”

에르안이 노골적으로 짜중을 내 며 말했다.

“다른 의미로 흥분해서 혈액 흐름에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까.”

“뭐…… 네.”

“내가 직접 지키는 세르이어스 공작령은 누가 무슨 지랄을 하든 안전할 거고, 우리는 그냥 여기 서 행복하면 돼. 여러 모로 정신나간 황족들은 다 잊고 우리는 이제 우리만 생각하면 되는 거 야.”

나의 인류애가 불안한 듯이 그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애처롭게 말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 거지.”

“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럽 게 물었다.

“공작님, 제가 신탁 받은 건 아시죠?”

“응”

“내용 안 물어보세요? 다들 난 리인데 왜 공작님은 제게 그 얘기를 안 하세요?”

실제로 공작성에 돌아오자마자 나와 전혀 안면이 없는 하녀들조차도 신탁 이야기를 하며 호들갑을 떨곤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번 해 신탁을 받은 사람을 구경하겠다며 외부인들도 기웃거리곤 했다.

하지만 에르안은 내게 신탁을 언급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탁의 내용은 남들에게 말하면 안 되잖아.”

그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난 대신녀가 뭐라고 말하든 내가 생각한 미래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무의미해.”

“제 미래인데요?”

“네 미래가 내 미래지.”

그 어떤 고통스러운 치료를 해 도 한 번도 일그러지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만일 그 신탁의 내용이…… 네 가 황태자 놈과 잘 된다거나 하는 내용이라면 그 멍청이를 살려둘 자신이 없는데.”

“그런 내용은 아니었으니 반역은 절대 안 돼요. 특히 세르이어스에서.”

돌고 돌아 회귀 전과 또 똑같은 결과가 반복될까 봐 나는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나는 흡족해하는 에르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딴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에르안의 말대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 걸까?

이제 이시더 남작이 처참하게 망가져 오는 것만 기다리면, 환절기가 되어도 에르안의 몸에 이 상이 없는 것만 확인하면 내 할 일은 끝난다.

원래부터 한낱 평민인 내게 황 가와 얽힌 반란군 자체를 막을 원대한 계획은 없었다.

그냥 내 삶의 터전이었던 세르이어스 공작령 정도만 지키려던 것이 내 초심이었다.

‘어차피 제이드 황태자가 알아 서 다 평정할 테고……’

물론 칸시아가 찾아오면 가족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는 기대가 남아 있긴 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일단 내 본분은 에르안을 완벽히 치료하는 것이었다.

나는 억지로 잡념을 지웠다.

‘정말 신탁이 맞는다면 물 흐르 는 대로 진행되겠지.’

기분이 좋아서 골골대고 있는 고양이처럼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르안을 보며, 나는 그의 말마따나 그냥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리체.”

“네.”

“친부모를 찾고 싶어? 내가 이르비아로 떠나고 난 뒤, 어머니께 그걸 부탁했다고 들었어.”

“찾고 싶죠. 쉽지 않아서 문제지만.”

실제로 공작령 전체와 그 근방에 내려진 내 친부모를 찾는다는 칙령은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딸이 있다며 오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고 한스 이후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하늘이 도와야 하 는 것이라, 내가 이뤄 줄 수는 없겠지만…. 만일 친부모님을 찾는다면 나 역시 정말 잘할게.”

“공작님이요? 왜요?”

“어떤 사람이든, 정말 잘 보이고 싶거든. 너와 함께할 자격이 있는 진짜 좋은 사람으로 말이야.”

그가 온순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눈을 깜빡였다.

문득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절대 에르안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떠 올랐다.

특히나 페렐르만 자작은 ‘이상하게 컸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곤 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 사기꾼 같은 나쁜 사람이면 어떡해요. 마님께서는 그걸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래도 널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 준 사람들이잖아. 원하는 거라면 다 해 줄 수 있어. 네 마음 이 편할 때까지 내가 뭐든지 다”

말만이라도 고마워서, 나는 씁 쓸하게 웃었다.

실제로 나를 버리고 간 몹쓸 사 람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보고 내 생각을 알아 첸 에르안이 내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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