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2화
희미한 달빛만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숨결은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다.
얽힌 손가락에서는 열기가 올랐 고, 그의 눈에 간절함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욕망이 넘실거렸다.
볼에 남은 핏자국은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더 어지러울 정도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너를 사랑해, 리체 에스텔.”
에르안의 간절한 속삭임에 내 솜털이 삐죽 섰다.
그의 새까만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한번 힘주어 반복했다.
“사랑해.”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우리는 서 로의 숨결만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그럴 것 같아.”
문득 심장이 쥐어짜는 것처럼 죄어 들었다.
“이러면…… 이러면, 제가 정신을 못 차리는데……”
내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둣, 에르안이 다급하게 말 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계속 제정신 아니게 해 줄게. 늘 네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게.”
“.............”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의 욕망에 휩싸인 것처 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 실 나도 그에게 끌리는 것을 부 정할 수 없던 참이었다.
“그런데 저는 평민인데 대체 어떻게 뒷감당을 하시려고……”
하지만 머리 한 켠에는 현실적인 고민이 남아 있었다.
“평화로운 방법부터 폭력적인 방법까지 아주 다양하지.”
에르안은 그까짓 것쯤은 당연히 생각해 놨다는 둣 냉큼 대답했다.
폭력적인 방법을 택했다가는 또 반역이라는 단어가 나올 것 같아서 나는 빠르게 선택했다.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부탁 드려요.”
“제일 쉬운 건 네가 어느 귀족 가의 양녀로 들어가면 될 일이야.”
에르안 정도면 아무 가신 가문 이나 골라잡아서 억지로 나를 양녀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었다.
나는 그제야 그가 이사벨 마님 이 나를 양녀로 들이고 싶다 했 을 때 펄펄 뛰며 반대했던 이유 룰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르비아에서 을 때부터 이 모든 계획을 세워 놓 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페렐르만 자작의 협조가 있어야겠지. 설마 방해야 하겠어?”
“어, 그냥 호적일 뿐이니까……”
순간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어 짧게 망설였는데 눈치 챘는지 에르안이 빠르게 속삭 였다.
“싫으면 바로 취소하면 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냐.”
어차피 ‘에스텔’이라는 성에 그다 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문 서상으로 아무 귀족 성이나 붙이고 싶다 하면 평민인 나로서는 잃을 건 없었다.
내가 알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자 그가 씩 웃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연인인 거야. 그렇지?”
“네.”
“결혼을 전제로 한 연인.”
“뭐…… 네.”
“아……”
호를 그리는 붉은 입술이 예뻤다.
얼마나 몸이 아프든, 얼마나 다쳤든 그는 그냥 나와 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국에 있는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가뜩이나 남자의 외모에 약한데 끔찍하게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있으 니 이성이 흐릿해졌다.
새삼 갇힌 곳에 둘이 너무 가까 이 붙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 졌다.
서로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는데, 그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시끌벅적했던 건국제도, 난장판 이 된 불꽃놀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두 눈이 가만히 마주치는 동안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마주하고 있는 살결 하나하나가 의식되면 서,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키스하고 싶은데 움직일 수가 없어.”
그가 작게 속삭였다.
“나 정말 오랫동안 참았어. 그러니 괜찮다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네가 해 줘.”
나는 그의 눈을 한 번, 목울대 를 한 번 바라본 뒤 심호흡을 했다.
몸을 뒤덮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배어 나오는 특유의 향기와 맞닿은 체온, 부드럽게 깍지를 껴 오 는 손 때문에 정신이 혼몽해졌다.
밖으로 튀어나을 것 같은 심장을 어쩌지 못한 채로 나는 홀린 둣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부드러운 감각에 번개가 치는 것처럼 온몸이 죄어 들었다.
살짝 마주치기만 한 것뿐인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둘의 몸이 벳벳하게 굳었다.
이제는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그 의 숨결이 거칠어질 때였다.
“리체! 리체!”
나는 화들짝 놀라 재빨리 마주댔던 입술을 떼었다.
밖에서 애타게 나를 찾고 있는 디엘의 목소리였다.
“공작님! 어디 계세요?”
한껏 크게 소리치는 지켈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분명 이쯤 계실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구조 요청을 해야 할 때였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 면 언제까지 갇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기 있어요!”
나는 허탈한 에르안의 눈빛을 애써 모른 척하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 공작님이랑 저랑 같이 갇혀 있어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파편들이 하나하나 걷히기 시작하면서 외부의 소음이 점차 선명해졌다.
“기다리세요! 곧 구해 드릴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간신히 서로의 얼굴만 확인할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지켈이 얼굴을 불쑥 내밀고 물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저는 괜찮고요, 공작님은 지금 응급 처치를 해 놓은 상태예요.”
나는 친절하게 대답했지만, 에르안은 아무 말 없이 지켈을 쏘아보았다.
‘타이밍 한번…….’이 라며 작게 중얼거리는 것도 못 들은 체했다.
하지만 살얼음 같은 눈빛을 지켈마저도 눈치챈 듯했다.
“그래도 부상이 만만치 않아서 움직이기는 어려우세요.”
그에게 안겨 있다시피 하던 내 가 애써 일어나며 말하자, 지켈이 에르안의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와, 그것 참 다행……. 아닙니 다, 말이 헛 나왔습니다.”
기사단 사람들이 열심히 우리 위에 쌓여 있는 파편들을 치우는 동안, 디엘도 와서 들여다보았다.
“제이드 황태자님은 다행히 멀쩡하셔.”
에르안이 더 좌절스럽다는 둣 신음 소리를 홀렸다.
“이런 사고가 나서 너무 놀라셨어. 책임자셨던 프릴리트 후작님도 사색이 되셨고.”
사고라니, 이런 식으로 몰아갈 모양이었다.
우연히 일어난 사고라면 에시언 이 내게 경고를 할 리가 없었다.
프릴리트 후작은 에시언이 내게 말을 건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제이드 황태자에게 진실을 말한다면 에시언이 상당히 곤란 해질 것이다.
그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답답함 에 한숨을 쉬었다.
내 한숨의 의미를 알아천 에르 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해. 지금은 너도 나도 휴식이 필요 해.”
“휴식이요?”
“응, 다쳤잖아.”
“저는 안 다쳤는데요.”
“아냐, 심적으로 많이 놀랐을거야. 얼른 공작성에 돌아가서 오랫동안 안정을 취해야 해.”
복잡한 황실의 일에 이제 더 이 상 끼지 말고, 공작령에서 둘만 잘 먹고 잘 살며 꽁냥거리자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었다.
어쨌든 에르안의 부상이 심각하 고, 나 역시 죽을 뻔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일단 공작령으 로 돌아가자는 그의 말은 받아들 일 가치가 있었다.
나는 에르안의 주치의지, 제이드 황태자의 측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내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에르안의 눈이 흐뭇한 둣 가늘어졌다.
“돌아가요. 애초에 건국제에 온 목적도 달성했으니까요.”
이제 세르이어스 공작령에서 가 만히 기다리면 만신창이가 된 이시더 남작이 저절로 기어 들어을 테니까 말이다.
어음도 손에 들어왔겠다, 무사히 빠져 나가면 당장 젠시 공비에게 보낼 것들이 있었다.
10. 친자 검사
지켈의 팔짱을 꼭 끼고 있는 셀리아나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삼켜야 했다.
셀리아나가 에르안의 옆에 붙어 있던 이유를 듣고난 뒤 질투 아닌 질투를 선명하게 표현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에르안은 그 모든 것이 황홀하다며 공작령에 돌아가는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정말로 황태자님께서는 괜찮아?”
제이드 황태자의 안부는 에르안 몰래 물어야 했다.
에르안은 부상이 심각하여 마차 를 혼자 썼기 때문에 나와 함께 탈 수 없었다.
디엘 역시 눈치껏 소곤거리며 대답했다.
“아주 멀쩡하셔. 근데 그게 또 네 덕이라고 사방팔방 다 떠들고 계셔.”
내가 반란군이라면 정말 리체 에스텔이 짜증날 것 같았다.
“네가 미리 밀쳐 내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황태자님의 운동 신경 이 뛰어나셔도 그 자리에서 떨어 져 죽었을거라고.”
“그건 사실이지만 몹시 부담스럽네.”
“넌 다른 걸 부담스러워 해야 할 것 같은데.”
디엘은 다른 마차에서도 자신을 계속해서 쏘아보는 에르안의 눈 빛을 애써 못 본 체하며 말했다.
“공작님께서 너를 더 열렬하게 바라보고 계셔.”
“ 응”
나는 딱히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대답했다.
“나를 좋아하셔서 그래.”
“그건 알고 있었어.”
“여자로 말이야.”
순간 디엘이 숨을 들이켰다.
“……신분 격차는 어쩌고. 혹 시……”
“당연히 난 숨겨진 여자로 살지 는 않을 거야. 그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신다네.”
디엘의 얼굴에 경악이 물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쐐기를 박았다.
“연인 사이가 되자고 하시길래 동의했어.”
“세상에.”
디엘은 이마를 짚었다.
“……나, 이 마차에서 내릴 때 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제 공식적인 연인이 되었으니 내가 너 랑 같이 있는 꼴을 못 보실 텐데”
“괜찮을 것 같아.”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요즘은 황태자님을 더 싫어하시는 것 같으니까. 없애고 싶은 남자 최우선 순위는 네가 아닐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