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1화
정신이 들었을 때 맨 처음으로 느껴진 것은 나를 감고 있는 단단한 팔이었다.
시야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아도 나를 꽉 끌어안은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안긴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관람탑이 무너지며 생긴 공간 안에 갇혀 있는 듯했다.
머리 위에 잔뜩 쌓인 파편 사이로 달빛이 들어왔다.
눈을 크게 깜빡여서 어둠에 적 응한 뒤, 나는 희미하게 보이는 에르안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공작님, 공작님 !”
“정신이 들어?”
그가 가늘게 눈을 뜨며 속삭였다.
“다친 데는 없어?”
“저야 멀쩡하죠!”
그제야 단단히 나를 얽어매고 있던 팔에 힘이 풀어졌다.
나는 황급히 속치마를 뜯어 그의 머리에 난 상처를 확인한 뒤 급하게 지혈했다.
우리가 갇혀 있는 공간은 생각보다 좁았다.
그래도 내가 그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할 정도는 되었다.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지만 이 난장판을 보았을 때 이만큼 다친 것만 해도 정말 다행이었다.
워낙에 운동 신경이 뛰어나서 그렇지, 만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 정도 부상으로 끝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구해 달라고 소리 지르기 전에 응급 처치만 좀 할게요.”
“소리는 아까 질러 봤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우리 위로 켜켜이 쌓인 대리석 과 나무판을 보니 구조가 쉽지는 않을 듯했다.
에르안 역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할 정도로 다쳐 있었다.
“마취제가 없어서 좀 아프실 텐데, 참으셔야 해요.”
에르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급하게 마력을 담아 그의 어긋난 뼈를 맞추기 시작했다.
우드득 소리가 날정도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물리적인 부상 상태에서 정제되 지 않은 마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굉장히 힘들 텐데도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신음소리는 내셔도 되는데……”
“네가 참으랬잖아.”
분명히 어마어마하게 아플 텐데 신음 한 번 내지 않는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둥 뒤쪽은 머리보다 더 처참해 서 옷이 피로 흥건했다.
아무리 내가 응급 처치를 잘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제대로 몸을 건사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너무 걱정 마.”
그 와중에도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르이어스 기사단이 무조건 찾으러 을 테니까. 이럴 때를 대비해서 내가 훈련을 얼마나 열심히 시켰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마력의 흐름을 살피며 물었다.
“분명히 3등석에 계셨는데....”
“나 봤어?”
좁은 공간이 불편하여 나는 다 시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러고는 잡은 손으로 천천히 섬세하게 가다듬어진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너랑 황태자랑 같이 있는 걸 발견하자마자 뛰어 왔지.”
“네?”
“혹시라도 그 화상이 정신 나간 소리 할까 봐.”
제이드 황태자가 했던 말이 이 제야 떠올랐다.
딴생각을 하느라 제대로 대답조 차 하지 않았지만 에르안의 기준에서는 정신 나간 소리가 맞았다.
내가 자신을 남자로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나…. 대체 어째 서 그런 착각을 한지 모를 일이 었다.
제이드 황태자의 말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이는 찰나를 놓치지 않 은 에르안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했군, 정신 나간 소리.”
“……네, 확실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님은 괜찮으시겠죠? 제가 밀쳤으니까……”
“그 따위로 멍청하면 뒈져도 상관없어.”
에르안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사냥 대회에서 습격을 받아도 아무 생각 없이 전멸시켜 버리고 끝낼 생각을 하던 상멍청이야. 내가 배후를 알아야 된다며 족칠 인간들을 던져 주었는데도 성과가 없다니. 제국의 미래가 암담 하군.”
“그런 소리는 제 앞에서만 하세요.”
“사실이잖아. 난 이제 몰라. 그 머릿속 꽃밭인 놈 대신 하엘던 황자가 황위에 오르든 말든.”
“공작님!”
증거가 없어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제이드 황태자에게 안 좋은 일 이 생기면 황위는 하엘던 황자에게 간다.
에르안과 웨데릭의 관계와 똑같 았던 것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었고, 마냥 발 랄한 제이드 황태자 역시 그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의심이 가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아까 프릴리트 후작과 하엘던 황자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눈치챈 바였다.
지난 생과 다르게 갑자기 프릴리트 후작이 이런 거대한 행사를 기획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사냥 대회에서 제이드 황태자가 에르안의 조언을 받아 자객 두 명을 잡아 가두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반역을 본격적으로 일으키기 전에 빠르게 뒤가 밟힐까 새로운 일을 벌인 것이 뻔했다.
‘프릴리트 후작도 한패였던 거 야……’
프릴리트 후작과 하엘던 황자가 제이드 황태자와는 아주 먼 거리 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상기하 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만일 에시언이 미리 경고해 주 지 않았더라면, 나는 제이드 황태자 옆에 있다가 무너지는 바닥에서 추락하거나 폭발하는 조각상에 깔려 개죽음을 당했을 것이 뻔했다.
“이제 반역 같은 건 그냥 잊어 버리자. 내 영지는 내가 거뜬히 지킬 수 있어. 내가 공작 위에 오른 이상 앞으로 네 가짜 부모 소동같은 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에르안의 눈이 나를 보며 유혹 하듯 가늘어졌다.
“너만 무사하면 돼. 그렇지? 그러니까 황태자 같은 인간은 영원히 신경 쓰지 말고.”
“흠”
“혹시 황태자가 마음에 들어? 어디가 마음에 들어? 내가 바뀔 게. 그 인간처럼 머릿속을 비우라고 하면 비우고.”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지면서 인위적인 어리광이 섞이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서로의 얼굴만 간신히 보이는 와중에 아직도 밖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그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내 눈과 마주쳤다.
“그러니까 단둘이 불꽃놀이 같 은 건 보지 마.”
나는 요염한 기운을 담기 시작한 그의 눈을 피하다가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뭐, 공작님도 다른 여자랑 단 둘이 계시던데요.”
“응?”
“3등석에서요.”
에르안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아, 셀리아나 말하는구나.”
그의 얼굴에 퍼지는 진심 어린 미소에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제이드 황태자의 말처럼 셀리아 나가 그의 오랜 정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그냥 그가 흐 뭇하다는 어조로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거슬렸다.
“왜? 기분 나빠?”
“.............”
“짜증 나고 답답하고 그래?”
그가 턱을 치켜들며 내 얼굴 가까이 그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하얀 치맛단이 둘러진 얼굴 은 또 그 나름대로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세를 전혀 바꿀 수 없는 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주 잡은 손의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슬슬 쓰다듬기 시작했다.
“다 부숴 버리고 싶고, 그 상대를 죽여 버리고 싶고 말이야.”
“잠시만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구나. 그럼 이번 말은 취 소하자. 어쨌든 내가 다른 이성 과 함께 있는 게 기분 나쁘고 신 경 쓰인다면……”
이제 그의 속눈썹을 셀 수 있을 정도로 서로의 눈이 가까워졌다.
나는 홀린 둣 그의 길게 늘어진 눈꼬리를 바라보았다.
“너도 날 좋아하는 것 아닐까?”
그의 숨결이 콧잔등에 느껴졌다.
작정하고 유혹하는 듯한 느린 속삭임에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제이드 황태자의 ‘리체 양도 날 좋아하고 어쩌고’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디엘의 말대로 싫은 것은 확실히 싫은 것이었다.
에르안이 이러는 건 싫지 않았다.
그저 이러면 안 된다고 계속 생각해 왔을 뿐이었다.
‘아니, 싫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 라 어쩌면 나도……’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말을 이었다.
“리체.”
“네.”
“이 안쪽, 오른편 주머니에 상자 하나가 있어. 꺼내 봐. 내가 지금 팔다리를 움직이기가 어려 워서.”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품속을 뒤졌고, 셀리아나가 그에게 건넨 작은 상자를 찾아냈다.
멈칫거리며 상자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그가 싱긋 웃었다.
“선물이야.”
“네?”
“내가 셀리아나와 붙어 다니는 대가로 얻은 선물. 네게 주고 싶었어. 셀리아나도 어렵게 구했대. 그것도 왕족이라 가능한 거였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자 싹이 나기 시작한 씨앗이 솜에 엉겨붙어 있었다.
“살살이풀 개량 씨앗이래”
“어머”
“이제 전용 용기도 필요없어. 이르비아 연구진에게서 힘겹게 빼온 거야”
“이걸....어떻게...”
“갖고싶어 했잖아. 끝까지 연구해서 알아내고 싶다며”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주고 싶어. 앞으로도, 조금이라도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말만 해.”
“굳이…… 이렇게까지……”
“당연히 목숨도 바칠 수 있고.”
평소 같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 거나 할 텐데, 부상이 심해서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네가 나를 지켜 줬 둣이, 이제는 내가 계속 지켜 주면 안 될까?”
에르안은 허락을 구한다는 둣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 까지 하고 나를 꼭 안은 채 몸을 날렸기 때문에 나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황태자와 단둘이 1등석에 서 있 는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구하겠다고 달려온 진정성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것도 그의 유혹의 일환이라면 단단히 성공한 셈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구하지 않으셔도 괜찮았어요. 적당히 저만 다치고 끝날 수도 있었다고요. 페렐르만 자작님이 어떻게든 고쳐 주실 정도로 잘 몸을 피했 을 거고……. 공작님은 세르이어스의 주인이세요. 저를 위해 이런 위험을 무릅쓰실 필요는 없다 고요.”
“네가 다치다니,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다시 시간을 돌려도 내 선택은 똑같으니까. 세르 이어스의 주인이니 뭐니, 너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아.”
춥지도 않은데 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남녀 관계에 무지하다는 이유로 계속 미뤄 왔지만, 이제 내 마음 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확신에 찬 말에 이상하게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북 받쳐 올라왔다.
조금 이상하게 컸지만, 이제는 어릴 때의 그 귀여움을 찾아볼 수 없는 남자가 되었지만 나 역 시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약속한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분명히 그는 내 표정을 보고 나 의 대답을 눈치챈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 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때? 이제는 내가 남자로 조 금은 좋은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