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10화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경고를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었다.
[르월리치 영애가 아니라, 리체 양이 저를 맡아 준 것은 제 인생에 가장 운이 좋은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은혜를 갚을 일이 생기면 잊지 말고 갚으시든가요. ]
에시언은 기사였고, 은혜를 베 푼 내게 쓸데없는 소리를 할 리 없었다.
내가 이유를 물으려는데 저 멀리서 그가 모시는 프릴리트 후작이 소리쳤다.
“에시언 경!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거야?”
에시언은 내 눈을 잠시 바라보더니 한 번 더 눈짓하고 뒤를 돌았다.
“아, 리체 아가씨가 계셔서요…….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가 대답하는 동시에 제이드 황태자의 개회사가 끝났다.
“그리하여 누구나 기대했던 이번 건국제의 불꽃놀이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광장의 사람들까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커다란 폭죽 소리와 함께 화려한 불꽃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밤하늘에 가득한 불꽃은 확실히 엄청난 절경이었다.
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에시언의 경고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개회 사를 마친 제이드 황태자가 다가왔다.
“리체 양, 어때? 나 개회사 잘 하지 않았어? 멋있었지?”
“……네, 뭐.”
차마 양심상 제대로 안 들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고 대충 대답한 뒤 에시언의 말대로 이 자리를 뜰 핑계를 억지로 쥐어짜기 시작 했다.
“그런데 공작님이 안 보이시네요. 만나기로 했는데....”
“3등석에 있던데.”
그가 천진하게 대답했다.
“아마 셀리아나 때문에 1등석에 오지 못한 걸 거야. 외국인은 1 등석에 오지 못하거든.”
“세, 셀리아나요? 혹시 분홍색 머리카락에 피부가 좀 가무잡잡한……”
지금 그럴 때가 아닌데, 내 목 소리가 잠시 떨렸다.
“응. 건국제 내내 붙어 있던 걸봐서 보통 사이가 아닌가 봐. 이르비아 왕족 방계인데, 공작이 이르비아에서 지낼 때 가까이 살아서 친하대.”
완전히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에르안은 이르비아 에서 5년을 살았다.
가까운 이웃 정도는 있을 법했다.
“난 공작이 그렇게 오랫동안 여자랑 붙어있는 건 또 처음 봤네. 남쪽에 정인을 두고 오는 바람에 다른 귀족 영애들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었나 봐.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에르안이 내게 얼마나 지극 정성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무슨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표정이 살짝 굳어지기 시작한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분홍색 머리 싫어하면서……’
본능적인 불쾌감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제이드 황태자는 눈치채지 못하 고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뭐, 공작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워낙에 충신이니까 무조건 축하해 주려고. 여자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순정파였나 봐. 먼 곳의 정인을 잊지 못하고 있던 거지.”
나는 다시 한번 밑을 내려다보 았다.
정말로 에르안과 셀리아나라는 여자가 단둘이 함께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여자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리체 양은 같은 성에 살면서 몰랐어?”
“예…… 이름도 처음 듣네요.”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한참 아래에 있는 에르안에 게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하긴, 주치의한테 그런 사생활 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지. 물론 나는 케인즈 경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다 하곤 하지만 말이야.”
그 와중에도 내 머리 위에서는 아름다운 불꽃들이 터지고 있었지만 나는 계속 아래만 곁눈질했다.
에르안 역시 불꽃에는 관심이 없는 둣 하늘을 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셀리아나는 에르안에게 무언가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에르안은 멀리서 봐도 몹 시 좋아하는 내색을 감추지 못하 며 그것을 받았다.
내가 별것 아닌 셔츠를 선물해 주었을 때 지었던 표정처럼 순수하게 기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 으며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케인즈 경은 내가 리체 양에게 어떤 마음인지 다 알지.”
물론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르안과 셀리아나도 속을 시끄 럽게 하긴 했지만, 일단 에시언의 경고가 급했다.
그가 목숨을 살려 준 내게 거짓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한껏 망설이던 표정을 보면 분명히 굉장히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그 경고를 받아들여 피하긴 피해야 할 텐데…….
“내 위치가 위치다 보니까, 리체 양은 내게 마음을 표현하기가 어려울 거야. 이해해. 하지만 난 다 알고 있어.”
제이드 황태자의 말을 한 귀로 홀리며, 나는 재빠르게 에시언이 어디 있는지 눈으로 훌었다.
그와 함께 있는 프릴리트 후작 영식은 하엘던 황자와 저 멀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멀리서?’
나보고는 다른 곳으로 가라면서, 그는 1등석에 계속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피해야 하는건…….’
불꽃놀이 자체가 회귀 전과 다른 상황이라서 아는 바가 없었다.
“마침, 프릴리트 후작이 불꽃놀이와 관람탑을 기획했기에 오늘이 날이다 싶었지. 정말로 로맨틱한 밤이잖아.”
“네?”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그동안 아주 신중하게 망설였지만, 젠시 누님이 그러더군.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제이드 황태자는 목을 가다듬으 며 얼굴을 붉힌 채로 말을 이었다.
“리체 양도 내가 남자로서 좋겠지만, 사실은 나도 리체 양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전하, 피하세요!”
나는 제이드 황태자를 거세게 밀었다.
우리가 서 있던 바닥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로 거대한 금이 갈라지고, 나는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마른침을 삼켰다.
운동신경이 별로 좋지도 않은 내가 최대한 안 다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였다.
‘분명히 더 큰 충격이 올 텐데…….’
아니나 다를까, 광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크계 흔들렸다.
볼 때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커다란 대리석 조형물들이 파열음과 함께 깨지며 내 머리 위로 쓰러지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목적은 아니니까 조용히 구석에서 살아남기만 하면 돼. 머리를 최대한 보호하고 타박상 정도로 마무리해야 페렐르만 자작님이 어떻게든 잘 살려 줄..’
“리체!”
산발적으로 울리는 사람들의 비명 사이로, 갑자기 여기 있을 리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대하고 친숙한 체구가 나를 감싸 안고 그대로 굴렀다.
그리고 그의 둥 위로 대리석 파편들이 쏟아졌다.
***
에르안은 3둥석에서 열심히 리체를 찾고 있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사람들은 모두 3둥석에 출입 가능했으니 리체는 아마 디엘 같은 놈과 이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3등석에 있 을 지켈을 찾느라 셀리아나가 옆 에 따라붙었다.
“어디,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고요.”
셀리아나는 툴툴거리며 옆에서 종알거렸다.
어쨌든 에르안의 옆에 있으면 셀리아나는 지켈을 몇 번 볼 수 있었다.
지켈이 언제까지고 에르안의 옆 을 비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군.”
에르안 역시 셀리아나가 옆에 있든 말든 자신의 볼일만 생각하 는 중이었다.
“왜 못 찾겠지?”
“누구를요?”
“리체.”
“3등석이 얼마나 넓은데 벌써 찾아요? 당연히 좀 걸리지.”
“아냐.”
에르안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렇게 못 찾을 리 없어. 어디서든 난 리체를 한눈에 알아 본단 말이야.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그의 말을 홀려듣고 있던 셀리아나 역시 다른 목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목표 대상을 찾 고 활짝 웃었다.
“역시! 전 찾았어요. 귀여운 지켈, 저기 숨어 있다니.”
건국제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셀리아나는 이제 더 이상 에르안의 곁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자, 약속했던 살살이풀 개량 씨앗이에요. 이제 전용 용기도 필요 없어졌어요.”
인상을 확 구긴 채 주변을 두리 번거리고 있던 에르안은 반색을 하며 셀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셀리아나가 들고 있는 상자를 보는 것이었다.
“덕분에 지켈하고 몇 마디 잘 했어요.”
상자를 냉큼 받아 챙기는 에르 안의 얼굴이 어느새 싱글벙글해졌다.
리체가 원하는 것을 구해다 줄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그녀는 지나가듯 말한 것이 다 지만, 에르안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갖다 바칠 생각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공작님의 인성을 믿지 못해서.”
아쉽다는 에르안의 중얼거림에 셀리아나는 즉시 대답했다.
아마 지켈이 옆에 있었다면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변죽을 울려 주었을 것이다.
확실히 에르안은 목적을 달성하 자마자 셀리아나가 따라올 수 있든 말든 전력으로 달려서라도 리체를 찾아 나서겠다는 얼굴을 하 고 있었다.
“그럼 전 지캘과 예쁜 불꽃을 보러 가겠어요. 불꽃이 터질 때 지켈의 심장도 터지기를 바라면 서요.”
“터진 심장은 리체라도 어떻게 못해. 장례식을 준비해야겠군.”
“공작님도 행운을 빌어요. 저거 봐요.”
셀리아나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렇게 불꽃이 예쁜 걸요. 남 녀가 분위기 잡기에 딱 좋은 로맨틱한 밤이에요. 전 이제 마지막 쐐기를 박으러 갑니다.”
무심결에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에르안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맨 위층에서 리체와 제이드가 나란히 서 있었다.
“……리체가 왜 저기?”
“네?”
셀리아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위 를 올려다보았다.
“저렇게 위인데, 뭐가 보여요?”
에르안은 더 이상 셀리아나에게 대답해 주지 않고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황태자가 언제 저딴 수작을……’
아무리 거리가 멀다고 해도 그 는 리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1등석에 있었으니 지금 껏 3등석에서 못 찾았던 것이다.
셀리아나가 방금 했던 ‘남녀가 분위기 잡기에 딱 좋은 로맨틱한 밤’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 역시 리체와 함께 불꽃을 보 고 싶었기에 아침부터 단단히 약속을 해 놓았는데…….
이런 날 밤, 제이드와 리체가 둘만의 추억을 만드는 것은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계단을 서너 개씩 뛰어 넘으면 서 그는 이를 갈았다.
억지로 리체를 내려오게 할 수 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둘 사이 에 끼어서 분위기를 절대로 잡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잠시만요. 여기는 아무나 들어오실 수……”
1등석 출입문을 지키고 있던 기 사 하나가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이내 그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확인한 뒤 바로 비켜섰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몰라 뵈었 습니다.”
그가 냉랭한 얼굴로 뛰어 들어 갔을 때였다.
“전하, 피하세요!”
리체가 제이드를 거세게 민 뒤 위태롭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바닥이 쩍, 하고 갈라졌다.
거대한 파열음이 들리고 리체와 제이드가 있던 자리 위로 온갖 대리석 조형물들이 무너지기 시 작했다.
“리체!”
에르안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날 듯이 달려가 그녀를 끌 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