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09화 (10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9화

내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는데, 이시더 남작이 더 빨랐다.

“대신녀님!”

그는 티실리아 대신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절절하게 외쳤다.

“제게 신탁을 내려 주시려고 오신 겁니까?”

티실리아 대신녀의 황금색 눈은 그를 바라보지조차 않았지만, 이시더 남작은 흥분하여 소리쳤다.

“아들, 제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실 건가요? 예?”

티실리아 대신녀가 그를 스쳐 지나가자, 이시더 남작은 그녀의 옷자락을 잡기 위해 팔을 휘저었다.

“제게, 제게 부디 신탁을……”

놀랍게도 그가 옷깃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그녀의 옷깃은 마치 생물체처럼 그의 손을 요리조리 피해 갔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아득한 황금색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알고 있군요.”

어린애 같은 작은 입술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홀러 나왔다.

“내 신탁의 대상자를.”

나는 천천히 일어나 본능적으로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었다.

대신녀의 신탁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국에 소문이 다 퍼진다.

괜히 하엘던 황자가 지난 신탁의 주인공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아마 내일이면 ‘건국제에서 부 스를 운영하던 평민 리체 에스텔 이 신탁을 받았다더라.’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내 앞에 선 그녀의 자그마한 몸 이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그녀가 속 삭였다.

“지난 신탁은 미안하게 됐어요.”

아무리 영리한 나였지만, 너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라서 하나 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묻 기도 전에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신탁은 신의 뜻이고 내 의지가 아니라서.”

그녀의 말소리는 나 외에 아무 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칸시아가 곧 모든 전말을 알려 줄 거예요. 당신은 모든 진실을 알게 돼요. 이것이 그대를 위한 신탁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칸시아의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문득 그녀는 내가 회귀한 것까지 다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신탁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지난 신탁이라면 하엘던 황자에 게 내렸던 신탁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대의 이타적인 선택이 잃어버렸던 것을 찾아 줄 거예요.”

내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다시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왔던 것처럼 아주 고요 하게, 그러면서도 온갖 시선을 받으며 뒤를 돌아 떠나기 시작했다.

“리체, 신탁의 내용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디엘이 멍한 표정의 나를 보며 재빨리 당부했다.

“신이 아껴서 내린 신탁을 발설하면 괘씸죄로 저주를 받는다고 해. 들어 본 적 있지?”

“......알아 ”

당연히 하엘던 황자도 절대 주변 사람들에게 신탁의 내용을 말 하지 않았다.

나는 꿈을 꾸는 것처럼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 그런데 리체…… 네가 신탁의 주인공이라니……”

새삼 놀라운 듯 디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

부스 근처 모든 사람들의 시선 이 내게 쏠려 있었다.

“신탁을 받는 장면을 이렇게 가 까이서 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세이린 경조차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이제 전국에 리체,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될 거다.”

감히 내게 신탁의 내용은 묻지 못하고, 주변에서 신탁을 받은 기분이 어떠냐는 둥 이런저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나는 그 모든 질문에 대충 대답 하면서, 티실리아 대신녀가 말한 아리송한 말들을 되짚어 보았다.

남들 앞에서는 담담한 체 차분히 서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걸 직접 컨트롤 중이라고 여겼는데, 내가 모르는 것들이 있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이시더 남작까지 바닥으로 끌어 내려 좌절하게 하고 나면 내가 회귀 후에 세운 목표가 모두 다 이루어진 셈이었다.

더 이상 알아야 할 것도 없고 해내야 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알아야 할 진실이 남아 있던가?

게다가 내가 찾게 되는 잃어버 린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허투루 여기며 넘겨 버릴 수도 없고, 앞으로 답이 나 오지 않는 문제를 계속 생각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질문과 감상이 쏟아지고, 나를 구경하러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더 정신없어졌다.

나를 포함해서 내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다 놀라고 당황했기 때문에 나는 불꽃놀이를 보러 관람탑 가는 것에도 조금 늦었다.

***

“리체 양!”

생각보다 1둥석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나는 상당히 당황했다.

이번 불꽃놀이를 위해 세워졌다는 간이 관람탑은 피라미드형 구조로, 층이 높으면 높을수록 좁고 사람의 수가 적었다.

그래서 1등석의 난간에 서면 바로 밑의 층인 2등석이 보이고, 2 둥석 밑으로 3등석이 보였다.

페렐르만 자작은 지위로 치면 2 등석에는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불꽃놀이를 보러 가느냐는 나의질문에 그는 하늘에서 돈을 터트리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며 일축했다.

1등석에는 사람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어서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는 3등석보다 상대적으로 공간이 넓어 보였다.

게다가 얼마나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는지 여기저기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서서 아래아래충의 3등석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제이드 황태자가 다가왔다.

“생각보다 늦었네. 곧 시작인데.

(1~2페이지 빠짐)

있었다.

과연 지난번에 내 부스에 찾아 온 이스엘라가 맞았다.

둘 다 나이가 꽤 되어 보이는데 자식이 없다는 것이 새삼 생각났다.

“나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때도 대신녀가 다가와 하엘던 형님께 속삭였대.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하엘던 형님의 표정이 무참히 구겨졌다고 해. 좋은 말은 아니었나 봐.”

제이드 황태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다, 시간이 흘러도 자식을 못 보게 된다는 말을 들은 것 아니냐며 추측하곤 했어.”

그러기엔 아직 이스엘라 황자비의 얼굴에서 희망과 간절함이 번득이던데…

어쨌든 내가 황족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라서 나는 그냥 어설프게 고개만 끄덕였다.

“리체 양은 좋은 말을 들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오늘 기분이 좋을 것 아냐.”

“좋은 말이었어요.”

나는 지나가는 하인이 들고 있던 핑거 푸드를 하나 집어 먹으며 밝게 말했다.

사실 계속해서 신탁을 생각하느 라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일단 지금은 의식적으로라도 잊어버려 야 할 것 같았다.

“그걸 떠나서 기분도 좋고요.”

잘 챙겨 놓은 이시더 남작의 어음을 생각하니 다시 히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나저나 많지 않은 1등석 사람들을 모두 훌었는데도 에르안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속으로 생각하는데 제이드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다행이야. 물론 나를 봐서 기분이 좋은 거겠지? 나도 오늘 리체 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

에르안마저 없으니 1등석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고위 귀족들과 황족들 사이에서 나는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황제 폐하께서 병환으로 못 오셔서 개회사는 내가 해야 할 것 같아. 여기 있어, 다시 올게.”

황제는 노환으로 인해 몇 년 전 부터 이런 커다란 행사에 잘 나오지 못했다.

제이드 황태자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빠르게 중앙으로 이동했다.

사상 최대의 규모가 될 불꽃 놀이에 대한 축사와 함께 시작을 선언할 예정이었다.

나는 아는 척할 사람도 없이 혼 자 남아 샴페인을 홀짝였다.

‘에르안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든 생각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1둥석에 온 순간부터 그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내가 더 이상 챙겨 줄 것도, 지켜 줄 이유도 없는데.

이따가 불꽃놀이에서 만나자는 말을 계속 상기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겠지?’

나는 괜히 혼자서 난간에 기대 어 아래의 3등석을 바라보았다.

디엘의 분홍색 머리라도 발견하 면 약을 올릴 겸 손이라도 흔들어 줄 셈이었다.

3등석만 해도 사람들이 꽤 많았고, 바로 아래층도 아니라서 훌어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제이드 황태자의 개회사를 한쪽 귀로 홀리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선명한 분홍색 머리가 보였다.

디엘인 줄 알고 한쪽 손을 들어 올리던 내 눈이 커졌다.

디엘이 아니라 긴 분홍색 머리를 틀어올린 가무잡잡한 여자였다.

놀라운 건,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에르안의 존재였다.

‘에르안이 3등석에 왜……? 그것도 여자랑?’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으나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세르이어스 공작성에는 저런 분홍색 머리는 디엘밖에 없었다.

나는 에르안이 다른 여자와 저렇게 단둘이서 오랫동안 붙어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내가 뚫어져라 그들을 바라보는 내내 그들은 여기저기 쏘다니며 계속 서로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내가 3등석에 있다고 생각하나 봐.’

제이드 황태자에게 1등석 초대권을 받은 줄 모르고, 다른 세르이어스 공작령의 사람들과 함께 3둥석에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난간에 더 붙어 손을 흔들려던 참이었다.

“저기……”

여기서 나를 알은체할 사람은 없을 텐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걸었다.

“리체 아가씨?”

“어머.”

나는 뒤를 돌았다가 반가움에 활짝 웃었다.

“이제 몸은 괜찮으신가 봐요.”

내 앞에 선 청년은 지난 사냥 대회에서 내가 치료해 준 에시언 레이지였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나을 거 라고 얘기한 그대로, 그의 컨디션은 아주 좋아 보였다.

“여기에 무슨 일이십니까?”

반가워서 싱글거리며 웃는 나와 대조적으로, 그의 얼굴은 당혹스럽다는 둣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 황태자님이 초대해 주셨어요.”

평민 주제에 여기에 왜 왔냐는 뜻인가 싶어 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에시언 경은 여기에 무슨 일 로……”

“저는 프릴리트 후작 영식의 호위 기사로 왔습니다.”

그는 딱딱하게 대답하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딱히 대화를 이어 갈 의지가 있 는 것도 아닌 듯해서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잠시 침묵을 버티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할 말씀이라도?”

에시언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한 번 쉬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여기를 떠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가씨.”

“네?”

그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다른 곳으로 가세요.”

내 표정 역시 싹 굳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