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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08화 (108/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8화

이시더 남작이 나를 찾아온 것 은 건국제의 가장 마지막 날이었다.

그의 영지와 수도는 꽤 거리가 있었으니 사태 파악을 한 뒤 열심히 달려와서 시간을 맞춘 것이 틀림없었다.

“아.”

나는 내 앞에 앉은 이시더 남작의 얼굴을 보고 반갑다는 둣이 생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뵌 적이 있는데.”

“그래, 내 누님이 네게 정말 잘 해 주었지.”

그는 대충 대답하고 초조한 눈 빛으로 입간판을 바라보았다.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커다랗게 세워 둔 입간판에는 몇 개의 농 축 시약 가격이 적혀 있었다.

[복통에 좋은 치카리풀 농축 시약 39.9 골드.]

이런 식으로.

물론 맨 위에는 가장 비싼 농축 시약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피부에 좋은 아모리 꽃 농축 시약 30만 골드.]

솔직히 말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종종 입간판을 보던 손님들이 그렇게 피부에 좋은 시약이냐 물을 때가 있었다.

나는 양심상 ‘솔직히 가성비는 좋지않고, 그냥 개인 수집용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시중에 있는 아모리 꽃을 모두 싹쓸이해서 만든 농축 시약은 단 한 병도 팔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저 아모리 꽃 농축 시약 말이다.”

“네”

“네가 페렐르만 상단을 이용해 아모리 꽃을 사들였다던데.”

“네. 색깔이 너무 예쁘지 않나요?”

나는 여전히 연기에 자신이 없는지라, 헛기침을 하며 평범한 보라색의 시약을 들어 보였다.

“수집용이에요.”

물론 이시더 남작은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지 나의 어색한 대사 처리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 는 것 같았다.

아들의 실종 때문에 평소와 다르게 그의 눈은 퀭하니 충혈되어 있었고, 머릿결 역시 푸석푸석했다.

“농축 시약이라 다 모아도 다섯 병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150만 골드? 평소 아모리 꽃의 시세에 비해 말도 안 돼.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 나?”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파는 사람 마음이죠, 그건. 안 팔려도 전 상관없어요.”

이시더 남작이 미간을 한껏 찌 푸리며 뭐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옆에서 팔짱을 끼며 이를 갈고 있던 세이린 경이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뒤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 안 보여? 용건만 말해. 살 거야, 말 거야?”

“세이린 경.”

이시더 남작이 아연한 얼굴로 세이린 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사회성 없는 개차반이 라고 해도, 지금 내게 반말을 한것인가?”

이시더 남작은 세이린 경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지금 세이린 경은 그의 배에 검을 쑤셔 넣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참고 있는 것이었다.

“세이린 경의 말이 맞아요. 빠 르게 결정하세요. 이 농축 시약에 관심이 있으신가 본데……. 아, 그래도 이사벨 마님과의 정 을 생각해서……”

그 말에 이시더 남작의 붉으락푸르락했던 얼굴이 살짝 가라앉았다.

주의를 돌린 나는 야무지게 말 했다.

“다섯 병을 모두 사시면 10골드를 깎아 드릴게요.”

“뭐? 10골드? 150만 골드 중에 10골드?”

“……싫으시면 말고요. 10골드 가지고 일주일을 사는 평민들도 있어요.”

나는 태연하게 말하고 턱을 괴 었다.

지금 이시더 남작의 머릿속을 알 것 같았다.

메일리스 공국에 뿌린 화장품으로 온 메일리스의 귀족들이 난리 가 났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것 이다.

그 불량 화장품을 유통한 사람이 바로 이시더 남작일 테니까.

메일리스 공국은 작지만 부유한 국가였고, 실제로 치료제를 개발 하여 높은 가격에 팔면 백만 골 드 단위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 뻔했다.

젠시 공비도 내게 돈은 얼마든 지 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니까.

원래부터 반란군의 자금을 동원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획이었다.

심지어 나는 치료제에 편히 쓸 수 있게 농축까지 해 놓은 상태 였다.

150만 골드를 지금 투자하면 몇 배의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알겠다.”

이시더 남작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말했다.

“다 사도록 하지.”

“네. 현금으로 주실 거죠?”

“……돈은 보름 뒤에 주마.”

“그건 아니죠.”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둣이 미간 을 찌푸렸다.

“외상은 안 돼요.”

“너 나 몰라? 네가 신세지고 있 는 세르이어스 공작의 외숙부야! 근본 없는 평민 주제에……”

“신세라니.”

세이린 경이 탁자를 광, 치며 끼어들었다.

“세르이어스 공작이 리체에게 신세를 지고 있으면 몰라도.”

그녀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낼 기세로 눈을 번득였다.

나는 그녀의 팔목을 잡아 간신 히 일어서는 걸 막으며 재빨리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근본 없는 평 민이라 귀족들의 신의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러니 무조건 돈은 먼저 주셔야겠어요.”

“……지금 어디 투자할 곳이 있 어서 현금이 마땅치 않은데.”

그때, 뒤에서 어물쩍거리던 디엘이 다가왔다.

“남작님은 귀족이시잖아요.”

디엘은 세이린 경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사근사근 말했다.

“저희 같은 평민과 달리 어음을 발행하실 수 있지 않으세요?”

“아, 그러네.”

나는 맞장구를 쳤다가, 조금 어색한 것 같아 급히 입을 다물었다.

역시 나는 연기에는 소질이 없었다.

무조건 현금으로 거래를 해야 하는 평민과는 달리 귀족은 어음을 쓸 수 있었다.

“마침 수도니까 몇 개 없는 은행도 가까이에 있잖아요.”

디엘은 친절하게 은행이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어음을 쓰시면 150만 골드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요?”

“그럼 되겠네.”

세이린 경이 퉁명스럽게 옆에서 말했다.

“돈 없는데 갖고 싶으면 영지하고 작위라도 걸어야지.”

“자꾸 그따위로 말하면.”

이시더 남작은 부들거리며 세이린 경을 노려보았다.

“페렐르만 자작에게 한 소리 하겠소.”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사를 날린 그는 벌떡 일어나 디엘이 가리킨 은행 쪽으로 성큼성큼 걷 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150만 골드가 선명하게 적힌 어음이 들려 있었다.

나는 은근슬쩍 다른 화제의 말을 건넸다.

“웨데릭 님이 행방불명이시라고요.”

“그래”

“제 조수, 아론 크릴소도 사라졌는데.”

“너는 행방을 몰라?”

“당연하죠. 남작님은 아론이 갈 만한 곳을 혹시 아세요?”

나도 모른다는 소리에, 그는 내 마지막 이용 가치가 떨어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 게 뭐냐.”

그가 툴툴대며 어음을 던지둣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깟 몰락 귀족 출신 따위 신경 쓸 새 없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놈을 무슨……”

이시더 남작과 웨데릭을 단단한 끈이라고 믿고 필사적으로 매달린 아론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않고 150만 골드의 어음을 재빠르게 챙겨서 디엘에게 건넸다.

뒤에는 은행장의 이름과 이시더 남작의 자필 서명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얼른 가지고 가세요.”

디엘이 빠르게 아모리 꽃 농축 시약을 가져다주었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되니까요. 정돈하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

건국제의 마지막 날, 다들 기대 하고 있던 최대 규모의 불꽃놀이가 열리는 밤이었다.

확실히 다른 부스들도 평소보다 빠르게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시더 남작이 에르안에게 돈을 꿔 달라고 할 수도 있었으므로, 오늘은 절대로 에르안이 내 부스에 들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아침에 ‘불꽃놀이 할 때 봐, 리체.’라는 인사만 듣고 나온 터였다.

사람이 많을 텐데, 하고 중얼거리니 내가 어디 있든 자신이 어 떻게든 찾아가겠다는 자신만만한 말이 돌아왔다.

당연히 세르이어스 공작은 1둥 석의 대상자일 텐데, 그는 내게 1등석 티켓을 주지 않았다.

제이드 황태자에게 초대권을 받은 것을 알고 있나 싶었다.

지난번 그와 함께 본 수도의 야경은 확실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함께 불꽃놀이를 봐도 괜찮겠다 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거리에 북적이던 사람들이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내 툴툴거리기만 하던 세이린 경도 입을 떡 벌리고 미끄러지둣 다가오는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 신녀님?”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내 앞 에서 있던 이시더 남작이었다.

20년 전에 하엘던 황자에게 신탁을 내렸다던 티실리아 대신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신전에 들어간 순간에서부터 나 이를 먹지 않는다던 티실리아 대신녀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 었다.

분명 20년 전에도 이런 외양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횐 옷자락 끝에 달린 방울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어린애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기운이 느껴져 거리 전체 에 정적이 흘렀다.

‘아, 건국제에서 대신녀님을 보 게 되다니.’

이번 건국제가 지나면 앞으로 평생 티실리아 대신녀를 못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제 마음대로 나타나고 제 마음대로 잠적하기 때문이었다.

진귀한 구경에 히죽 웃으며 그 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녀가 다가온 곳은 우리의 부스 였다.

“시, 신탁을 내리실 건가 봐.”

옆의 부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국제에 참석한 이들 중 선택 받은 딱 한 사람에게만 내린다는 그 신탁이었다.

‘신탁의 주인공은 프릴리트 후 작 아니었나? 그 일로 계속 시끄 러웠는데.’

나는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프릴리트 후작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위 귀족인 그는 지금쯤 관람 탑 1등석에 있을 것이므로, 이곳 에 있을 리 없었다.

프릴리트 후작이 신탁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분명 회귀 전과 다 른 상황인 사람이 주인공일 것이다.

회귀 전에는 건국제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회귀 후에 참석한, 이 근방의 사람.

그래서 이번엔 에르안이 받을 수도 있지 않나, 하고 지난번에 가볍게 생각한 적도 있었는 데....…

똑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 이 또 있었다.

‘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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