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7화
에르안의 돈과 권력으로, 나는 그 복작복작한 수도에서도 가장 쾌적한 고급 여관에 머무르고 있 었다.
하루종일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목에 좋은 허브티를 마시며 한가로운 밤 시간을 보내는 중이 었다.
“들어가도 돼?”
의학서를 읽고 있는데 매일 밤 그랬듯이 에르안이 들어왔다.
건국제 기간 내내 나는 그의 상 태를 봐 주고 가벼운 대화 몇 마 디를 한 뒤 돌려보내곤 했다.
물론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볼 때 에는 속이 좀 울렁거렸지만, 티 를 내지 않고 평소처럼 지내려고 애썼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세요?”
내가 일어서며 말하자, 에르안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네? 증상이 어떠신데요?”
“요 며칠 널 자주 안 봐서 잔상이 아른거려.”
덩치가 산만한 성인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입매를 시무룩하게 늘어트린 모습이 이상하게 귀여워 보였다.
그가 칭얼대는 목소리를 인위적 으로 낼 때마다 아예 사라진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의 얼굴이 문득 문득 보였다.
“아무래도 정신 착란인 것 같은데 큰일이에요.”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받아쳤다.
에르안이 한숨을 과장되게 쉬어 보였다.
“좀 받아 줘. 한 달까지는 받아 주기로 했잖아.”
“음…… 그렇죠. 받아드릴게요.”
약속은 약속이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갈래?”
“네?”
“수도에서 일만 하고 있잖아. 바람이라도 쐬는 게 어때? 날도 좋은데.”
대화를 받아 주는 것에서 갑자 기 데이트를 받아 주는 것으로 교묘하게 목적어가 바뀌었다.
처음부터 계산된 듯한 요망함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접힌 눈을 훌린 둣 보았다.
보아하니 몸에 잘 맞는 옷, 상 쾌한 체향, 자연스럽게 손질한 머리카락까지 작정하고 온 게 틀림 없었다.
“야식으로 코코넛 쿠키와 페스 츄리까지 준비했어.”
“홈……”
“시원한 밤바람 맞으며, 예쁜 풍경 보면서 한 입 한 입 먹으면 정말 맛있을걸.”
“예쁜 풍경이요?”
“수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에 가려고. 사람들이 거의 잘 몰라. 보고 싶지 않아?”
에르안은 너무나 완벽한 데이트를 제안하고 있었고, 나는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을 떼어 놓고 보면 그가 남자로서 나쁠 이유도 없었다.
껍데기로만 보면 만점이 아닌 가!
“네 친구도 그 남자를 이미 좀 좋아하나 보다. ”
이럴 때마다 디엘이 했던 말이 떠오르곤 했다.
지금까지는 이성적인 나의 성격 상 아예 생각도 해 보지 않았지만 신분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데 굳이 밀어낼 필요는 없었다.
“네, 가요.”
내가 선선히 말하자 그가 씩 웃 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와……”
나는 살짝 놀라서 숨을 삼켰다.
에르안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 온 곳은 인적이 드문 한 언덕이 었다.
화려한 수도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각종 현란한 불을 밝히고 있는 야시장, 달빛이 일렁이는 강가, 그 주변에서 아이들이 날리는 반 짝이는 풍둥까지 너무 아름다웠다.
과연 에르안이 자신 있게 안내 할 만한 명소였다.
“내가 부스에 있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아서.”
그는 내가 앉을 곳에 피크닉용 천을 깔아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서 네게 줄 것들 보러 돌 아다니고…… 남는 시간엔 전망 좋은 곳을 찾아 다녔어.”
내가 조심스럽게 앉자, 에르안은 바구니에 들어 있던 간식거리를 재빨리 내 앞에 놓아 주었다.
“어쨌든 수도에 왔는데 한 번은 데이트를 신청하고 싶어서. 최선 을 다해야 할 것 아냐.”
“다 맛있겠어요.”
“다 맛있을걸. 돌아온 뒤 리체 에스텔 입맛을 얼마나 열심히 연 구했는데.”
그는 내 옆에 앉아서 쿠키를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대꾸하려다 말고 버터 향 이 가득한 쿠키의 맛이 마음에 들어 일단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는 돼야 리체 에스텔의 남자 후보 정도는 되지.”
“.............”
“괜히 부스를 들쑤시고 다닐 줄 만 아는 멍청한 황태자하고는 비 교도 안 되고 말이야.”
여기서 제이드 황태자가 내게 1 등석 초대권을 줬다는 소리는 굳 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데 이트를 망칠 수는 없다는 내 소박한 배려였다.
어쨌든 눈앞에는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고, 입 안에는 달달한 행복이 감돌았다.
“그래서…… 여전히 네 눈에는 내가 어린 시절의 그 골골대는 도련님이야?”
“확실히 이제 전혀 골골대지는 않으시죠……”
“있잖아, 난.”
그는 내 입가의 쿠키 부스러기를 쓸어 주며 속삭였다.
“네가 아픈 나 대신 뱀에 물렸던 날, 내 빌어먹을 지병이 정말 끔찍하게 싫더라고.”
멀리서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혹시 알고 있어? 그 엉망으로 끝난 나들이가 우리 첫 데이트였던 거.”
그 나이에 데이트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려다가, 그가 나에게 바짝 다가와 눈을 맞추는 바람에 나는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 매일같이 보지만 볼 때마 다 새삼 늘 감탄이 나오는 얼굴 이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못하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에르안이 내 입술을 긴 손가락으로 살짝 훌었다.
“하지만 두 번째 데이트는 다르지……. 너를 품에 안고 달려와, 훨씬 더 아름답고 고즈넉한 곳에 서 마음껏 좋은 추억을 선물해 줄 거야.”
검은 눈동자에는 야릇하면서도 고혹한 분위기가 맴돌았고, 목소 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깊은 밤 저 멀리 반짝이는 배경이 점차 흐릿해졌다.
내 눈도 덩 달아 흐릿해졌다.
결국 내 입술을 살살 문지르기 시작한 그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너와 내 첫 만남은 병약한 어린애를 위한 일방적인 보살펌이 었더라도 다시 만날 땐 다를 거 라고, 그 남쪽 땅에서 생각했어.”
거의 작정하고 색기를 퍼붓는다 는 걸 알면서도 홀라당 넘어갈 것같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
그러면서도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과 단단히 서서 긴장한 기색이 엿보이는 팔 근육을 보니 귀엽다 는 생각도 들었다.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와 중에 정말 매일같이.”
“음, 하지만 저는 지금처럼
만약 내가 에르안이랑 연애를 하고, 온갖 장애물들을 극복한 뒤 결혼까지 한다고 치면 나는 이사벨 마님처럼 공작 부인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의사로 살고 싶지 영지 관 리 둥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년 하고 싶은 대로 다 하 고 살면 돼. 그 모습이 가장 너 답고 멋있는걸.”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는지 에르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봐. 계속해서 네 옆에 붙어 있고 싶지만, 네가 하고 싶 은 진료 마음껏 하라고 고통스러 워하면서 너랑 일과 중에는 떨어 져 있잖아.”
논리적으로 막혀 버리니 반박을 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나는 지난 생애부터 남자 와 연애에 대해서 깊은 고찰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잘생겼으면 좋겠다는 일차 원적인 생각만 해 왔다.
얼굴만 보았다던 시오니 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에르안은 합격하고도 남았다.
“천천히 생각해. 나는 평생이라도 기다릴 수 있어.”
“평생이요?”
“당연하지.”
그는 잠시 열은 숨을 몰아쉬더 니 천천히 멀어졌다.
그러고는 내 머리카락을 집어 그 끝을 입술에 갖다 댔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그의 입 술에 가장 가까이 있던 것은 내 입술이었다.
빠르게 퍼져 나가는 내 상상에 나는 한숨을 삼켰고, 그는 아는 지 모르는지 오연하게 웃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너와 난 유일한 사이라고 했잖아.”
웨데릭에게서 벗어나게 하기 위 해서 어린 날 내가 마구 지껄였 던 말들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그때의 약속대로 나를 계속 1 순위로 생각해 줘.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의 검은 눈이 계속해서 나를 뚫어질 둣 바라보았다.
“알잖아.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눈빛은 육식 동물 같은데 말투 는 칭얼대는 것처럼 애가 닮아 있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그의 입술 이 닿아 있는 머리카락을 잡아 됐다.
“……생각해 볼게요. 아직 시간 은 있잖아요. 일단은 지금 다른 것도 신경 써야 해서.”
“네가 없었다면 세르이어스는 어떻게 됐을까.”
“웨데릭 님이 지금 공작님 자리 에 계시겠죠. 곧 반란이 일어나면 세르이어스도 빠르게 반란군 명단에 이름을 올릴 거고요.”
나는 쿠키를 하나 집어 먹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영지 구석에서 의원 열고 있던 저는 개고생하다가 제이드 황태자님 손에 죽지 않았겠어요?”
“그렇게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뭐 굳이 그 말에 반발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나란히 앉아서 수도 곳곳을 내려 다보았다.
저곳은 황궁, 저곳은 사냥터, 저 곳은 의상 거리……. 건국제 초 기에 귀족들과 시간을 오래 보내 서 그런지 에르안은 이미 수도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20년 만에 티실리아 대신녀가 신탁을 내린다고 해서 빈 여관이 없다던데.”
사람이 꽉꽉 들어찬 여관 거리 를 가리키며 에르안이 말했다.
“혹시나 자기가 주인공이 될지 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건국제에 참가한 사람들 중 아 무나 지목하여 미래를 말해 준다는 것이 일반인에게도 구미가 당 기는 일이긴 했다.
그 대상은 지난번처럼 황자일 수도 있었지만, 길가의 거지일 수도 있었다.
“공작님도 신탁을 받고 싶으세요?”
지난 생에는 에르안이 건국제에 참가하지 않았었다.
만일 신탁의 대상이 달라진다 면, 그건 회귀 전과 다른 상황이 변수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에르안은 이번 건국제에 새롭게 참가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프릴리트 후작이 아닌 에르안이 신탁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
대답은 빨랐다.
“무슨 말을 듣더라도, 어차피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하나뿐이야. 그 외의 미래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그 미래가 아무래도 나인 것 같 았다.
“더 못난 놈이 좋다고 하면 그 콩깍지 벗겨질 때까지 기다릴 거고, 더 잘난 놈이 좋다고 하면 내가 더 잘나질 거니까.”
그는 섬뜩하게 중얼거린 다음 다시 천진하게 표정을 바꾸어 내 게 손을 내밀었다.
“리체, 고삐를 너무 세게 잡아 서 손이 아파.”
“정말요? 그럼 비상약을……”
“아니, 네가 손을 잡아 주면 나 을 것 같아.”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뻔 히 다 알 수밖에 없는 수작이라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결국 피식 웃어 버렸다.
그의 커다란 손을 맞잡으며 나 는 다시 아름다운 수도 전경에 시선을 옮겼다.
달이 질 때까지 우리는 가만가 만 어린 시절을 함께 회상하기도 하고, 반란군이니 웨데릭이니 하 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캄캄한 밤, 아무도 없는 고즈넉 한 늦여름 밤이었다.
확실히 예전의 공작령 뒷동산에 놀러 갔던 어설픈 피크닉보다 몇 배는 더 좋은 데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