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06화 (106/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6화

불꽃 모양의 그림이 그려진 것 을 보니 초대장인 것 같았다.

“마지막 날, 최대 규모의 불꽃 놀이가 예정된 건 알지?”

“네.”

“그래서 간이 관람탑이 세워졌잖아. 거기 1등석에 리체 양을 초대하고 싶어서.”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제이드 황태자는 눈을 찡긋해 보 이며 말을 이었다.

“엄청난 장관일 거야. 1등석에 서 관람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몇 명 안 돼. 나도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뿐이었어. 그런데 리체 양이 떠오르지 뭐야?”

“아…… 감사합니다.”

“그럼 꼭 와야 해! 난 영업 방 해 그만하고 가 볼게. 어차피 그 때 대화야 실컷 할 수 있을 테니

제이드 황태자는 더 이상 내 대 답도 듣지 않고 떠나 버렸다.

내가 받은 초대장을 보고 디엘 이 옆에서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부럽다, 리체……. 1등석이라니, 진짜 엄청나게 잘 보일 거야.”

“응, 넌 3등석에서나 봐.”

나 역시 불꽃놀이를 관람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초대장이 싫지 않았다.

원래라면 다른 세르이어스 사용인들과 같이 3등석에서 볼 예정 이었지만 단번에 가장 높은 충인 1둥석에서 보게 된 셈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에르안이었다.

‘가뜩이나 제이드 황태자와 내가 얽히는 것을 싫어하는데……’

“그런데 공작님도 1등석에 가시 겠지?”

혹시 몰라 디엘에게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둣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을까? 고위 귀족이시니까.”

그렇다면 어차피 에르안과 같이 보는 셈이었다.

딱히 거절할 만한 이유는 하나 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이 다음 손님을 받아야 했다.

손님들을 한참 받고 난 뒤 잠시 쉬고 있는데, 페렐르만 자작이 들렀다.

“리체, 바쁘지? 먹고 해라.”

그는 입소문이 난 남쪽 영지 부스의 체리 타르트를 사들고 뿌 듯하게 말했다.

“이게 유명하다던데.”

“아, 그거 맛있어요.”

페렐르만 자작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 어렸다.

“먹어 봤어?”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디엘이었다.

“공작님이 이것저것 유명한 건 이미 다 사다 나르고 계셔요.”

나는 부스 뒤쪽을 가리켰다.

에르안이 열심히 사서 쌓아 둔 온갖 먹을거리와 특이한 약초, 장신구 둥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 었다.

아마 지금도 직접 이 부스 저 부스를 뒤지고 다니고 있을 것이다.

페렐르만 자작은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여하튼 정상은 아니야.”

디엘이 뒤에서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체, 공작성에서 편하게 살다가 갑자기 이렇게 바빠지니 힘들지 않나?”

페렐르만 자작은 에르안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둣이 화제를 돌렸다.

“손님이 점점 더 늘 거야. 다들 리체 에스텔의 부스가 용하다며 수군거리던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다들 제 뛰어남을 알게 되는 거잖아요.”

예전 생에서도 했던 일이라 고 되진 않았다. 게다가 내 이름을 걸고 부스를 만든 이유가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실력 으로 유명해지면 좋죠.”

“그래.”

페렐르만 자작은 크홈,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명성이 높아지는 건 짜릿한 일 이지.”

역시 꽤나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젊은 날 황실 의료 연구진에 들 어간 이유가 있었다.

연구진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능력의 인정을 뜻했고, 대단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라도 하면 전국민이 알게 되니까.

그 역시 여기저기서 천재로 불리는 게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도 이제 성년이고 하니 훌륭 한 실력으로 이름 좀 날리고 싶었다.

세르이어스 공작령의 주치의가 아닌, 리체 에스텔의 실력을 당 당히 펼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불특정 다수의 손님을 받으니 예전 생각이 나서 나름 즐거웠다.

하지만 나는 지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직이 냐?”

페렐르만 자작은 짧게 물었고, 나는 그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네. 하지만 곧 오겠죠.”

나는 부스 앞에 세워 둔 입간판을 흘끗 보며 대답했다.

“올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지난 생애에서 세르이어스 공작령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람들의 끝이 정말로 다가오고 있었다.

***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구해 보았지만, 아모리 꽃은 시장에서 씨가 말라 버렸다.

약초 상단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운영하고 있는 페렐르만 상단 때문이었다.

로만은 어렵지 않게 그 아모리 꽃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하인들의 말에 의하면 리체 에스텔이 건국제 부스를 위해 페렐르만 상단을 통하여 아모리 꽃을 모두 구입해 버렸다고 했다.

“그 평민 여자애는 사사건건 걸림돌이 되는군.”

로만은 이를 갈았다.

“그때 확실히 없애 버렸어야 했 는데……”

한스를 이용해서 함정을 팠을 때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훨 씬 더 방해가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후회해 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작님.”

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쉬고 있는데, 하인이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로만은 쭈삣거리며 들어온 하인에게 급하게 물었다.

“알아봤어?”

“네, 지금 막 그 부스에 다녀온 참입니다.”

하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는 로만의 명령에 따라 리체가 부스에서 아모리 꽃을 어떻게 쓰는지 알아보고 온 참이었다.

“그 부스에서는 농축 시약을 팔고 있었는데...”

그런 간이 부스에서 손님을 많 이 받으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 이긴 했다.

로만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모리 꽃 농축액 한 병을 30 만 골드에 팔고 있었습니다.”

“뭐? 30만?”

평소 아모리 꽃의 가격을 생각 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걸 누가 사?”

게다가 아모리 꽃은 수요가 별 로 없는만큼 그렇게 효능이 좋 은 약초도 아니었다.

단 하나, 그가 알고 있는 피부 병을 빼면…….

“미용 목적이라는데, 하나도 안 팔린 것 같습니다. 보니까 비양심적으로 처방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강매할 생각도 없어 보이던데요.”

아모리 꽃이 피부 미용에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 효능을 대체할 수 있는 약초는 많았다.

로만은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책 상을 두드렸다.

얼마 전, 웨데릭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한 정보 길드의 서신이 왔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요구한 그 서신에는 웨데릭의 것이 분명한 열은 갈색 머리카락 한 줌이 들 어 있었다.

음지에서 활동한다는 그 정보 길드는 함께 행방불명된 아론 크릴소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서술 하여 동봉했다.

세르이어스 공작가에 투입하기 위한 가짜 신상 말고, 정확한 연결 고리까지 짚어 내고 있었다.

그 정보 길드와 연락하기 위해 서는 비상식적인 금액이 필요했지만 로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남작령은 그만한 금액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미 반란을 위해 이런저런 준 비를 하느라 영지는 늘 자금난에 허덕였는데, 서쪽의 정보 길드에 게 거의 비상 자금까지 다 털어

낸 상태였다.

“농축 시약이면 시중의 아모리 꽃을 다 털어 간 것도 이해가 되지.”

로만은 천천히 일어섰다.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계획이 중간에 중단되긴 했지만 이제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그나마 웨데릭이 사라지기 전,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메일리스 공국에 밑 작업을 해 놓아서 다행이었다.

“그걸 사 와야겠다.”

로만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자금 사정을 뻔히 아는 하인이 당황스럽다는 둣이 로만을 바라 보았다.

터무니없는 가격을 매겨 놓은 아모리 꽃 농축 시약을 살 수 있 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직접 가야겠지.”

로만은 하인의 불안한 표정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

자금 문제로 돈을 주고 사 오라 며 아랫사람을 시킬 수 있는 상 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귀족이었고 직접 가면 그깟 평민 하나를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출발하면 건국제 후반부에 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만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남작님, 하지만.......”

하인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혹시 모르지. 건국제에 갔다가 티실리아 대신녀님이 나를 지목 해서 신탁을 내려 줄지.”

로만은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그럼 웨데릭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