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5 화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주치의 로 지내며 이사벨 마님과 에르안 을 보살피는 건 이제 난이도가 쉬운 일이었다.
둘 다 내게 넘칠 정도로 잘해 주었고,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건 강한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연구실에 서 실컷 연구를 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새로운 것을 스스로 알아낸다는 것은 짜릿할 정도로 즐거운 일이 었으니까.
하지만 회귀 전 삶처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고 진료해 주는 것도 오랜만에 하니 재미있었다.
“음, 소화 기관이 좀 약한 편이 시군요.”
내 부스는 굉장한 호황을 누렸다. 딱히 어디가 아파서 의원을 갈 정도는 아닌데 자신의 몸 상 태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기웃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천재 의사가 맞나 봐. 엄청 용해.’ 같은 말 들을 퍼트리며 온갖 손님들을 더 불러왔다.
“육류를 드실 때에는 조금 더 천천히 드시는 계 좋겠어요.”
“맞아요! 고기를 먹을 때마다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았어요.”
“아니면 좀 무거운 식사를 하실 때에는 이 베르키풀로 만든 시약을 한 방울씩 드시든가요. 훨씬 좋아지실 거예요.”
나는 진료는 무료로 봐 주었으나 간단한 처방은 모두 돈을 받 았다.
특이한 것은, 내가 처방하는 모 든 약들은 농축 시약이라는 점이 었다.
아주 작은 유리병에 담긴 농축 시약은 한 방울씩만 먹어도 효과가 있는 대신 상당히 비쌌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가 하는 간단한 조언만 듣고 시약은 사가 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돈이 부족하여 하고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별달리 개의치 않았다.
“자, 다음 손님.”
건국제도 이제 거의 중반부에 들어서고 있었다.
에르안은 계속 바빠서 얼굴을 비추지 못하다가, 이제는 종종 들르곤 했다.
하지만 남자 손님이 을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은 세이린 경이면 충분했다.
게다가 에르안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손님들이 확실히 기가 죽 어서 우물거리는 바람에, 나는 그를 억지로 쫓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연히 처음에는 반발했으 나 내가 “맛있는 것이 여기저기 정말 많을 텐데…….”라고 중얼거 리며 한숨을 쉬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 이후 에르안은 오만 부스를 다 찾아다니며 각 지방의 맛있는 것들은 모두 가져오고 있는 중이었다.
하인을 시켜도 되는데, 그는 꼭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취향에 맞 게 살 거라며 직접 움직였다.
가뜩이나 바쁜 데다가 온갖 부 스들까지 다 뒤지고 돌아다니니 에르안의 얼굴을 볼 시간은 절대 적으로 짧아졌다.
다음 손님이 여성인 것을 얼핏 본 세이린 경은 화장실에 간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여기 그렇게 용한 의사가 있다 고 해서 찾아왔는데.”
반짝이는 금발을 길게 늘어트린 여성이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햇빛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저 녁 무렵인데도 그녀는 챙이 넓은 모자를 깊게 늘러 쓰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아야만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남의 눈을 피해 몰래 온 거라, 빠르게 부탁해.”
일단 그녀가 귀족이라는 건 확실했다.
안 그렇다면 이렇게 자 연스럽게 반말을 쓸 리가 없었다.
“세르이어스 공작을 낫게 한 명 의라지.”
“네, 그게 저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딱히 네게 좋은 감정은 없지만……”
나는 넓은 모자의 챙 밑에서 냉랭한 붉은 눈을 확인했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내게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분자분한 어조에 교양이 넘치면서도 묘하게 거부감이 드는 사 람이 었다.
“실력은 꽤 있다고 들어서.”
“그건 맞습니다.”
그녀가 손을 내게 내밀었다.
의사에게 증상을 보이는 것이 익숙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진찰해.”
거만한 명령조였다.
세이린 경이 옆에 있었다면 분 명히 툴툴대며 뭐라고 했겠지만 일단 나는 별말 하지 않고 그녀 의 손을 잡았다.
“내 고민이 뭔지 알겠어?”
“네, 임신이 어려우시군요.”
목소리를 낮춰 즉시 대답했더니, 과연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 게 굳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입 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해?”
아무리 거만하다고 해도 신체적인 문제 앞에서는 모두 다 간절해지는 법이었다.
“벌써 20년 가까이 아이가 생기지 않아.”
“…문제가 너무 복합적이어서 단순한 처방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초 몇 개로 해결될 일이 아니 었다.
“물론 남편분께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손님의 마력이 날뛰 는 것도 사실이니 좀 더 세밀하 고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지금 당장 뭘 해 줄 수는 없다는 얘기야?”
그녀의 목소리에 다급함과 짜증이 묻어났다.
“내가 고작 어렵다는 소리 들으 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나는 인내심 있게 차분히 대답 했다.
“간이 부스라서 당장 해결해 드 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무언가 를 원하신다면 마력 진정 효과가 있는 에프히풀 농축 시약이 그나마……”
“줘.”
농축 시약은 가격이 꽤 비싼데도, 그녀는 얼마인지 묻지도 않 은 채 내 말을 끊어 버렸다.
“여기에 몇 가지 처리만 하면 좀 더 효과가 좋아질 것 같으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이었지만 투철한 직업 정신을 가진 나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물론 이런 간이 처방으로 쉽게 해결될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조금 가능성을 높인다 뿐이 지 임신이 잘 되지는 않을 것이 뻔했다.
몇 가지 약초 가루를 더 넣고 있는데,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누군가가 급히 다가왔다.
“리체 양!”
밝고 명랑한 목소리의 제이드 황태자였다.
“진작 오고 싶었는데 길을 좀 헤맸지 뭐야. 분명히 에르안이 저쪽으로 가면 된다고 했는 데……”
제이드가 손짓으로 가리킨 곳은 아예 정반대 방향이었다.
“아무래도 방향 감각이 없나 보군. 뭐, 그런 건 선천적인 거니까. 남들 몰래 나침반이라도 선 물해야겠어.”
“이미…… 남들 몰래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뒤에서 시약을 정리하고 있던 디엘이 한숨을 쉬어 보였다.
나 역시 디엘과 비슷한 마음으로, 에르안이 방향치라서 잘못된 방향을 가르쳐 준 건 아니라는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세르이어스의 주인을 위해 그 정도의 명예는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럼 이만.”
제이드 황태자가 등장하니 갑자기 내 앞의 손님이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쓰며 벌떡 일어났다.
나는 막 만들어진 시약을 그녀에게 재빨리 쥐여 주었다.
“돈은 내셔야죠.”
그녀는 고개를 더 푹 숙이고 반 지 하나를 건네주며 황급히 뒤를 돌았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
“세상에, 이스엘라? 형수님 아니세요?”
그러나 그녀가 급하게 떠나기도 전, 제이드 황태자가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붙잡았다.
“여기는 무슨 일이시죠?”
“벼, 별거 아니에요.”
“리체의 실력을 보고 싶으셨구나.”
제이드 황태자는 해맑게 말했다.
“어때, 도옴이 좀 되던가요? 진짜 명의인데.”
“황태자님, 황자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이스엘라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 하며 낮게 속삭였다.
제이드 황태자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알겠다는 둣이 끄덕였다.
“하긴, 형님께서는 서운해하실 수도 있겠군요. 자신의 부인이 황실 의료 연구진을 못 믿고 리 체 양에게 온 거라고 생각할 수 도 있으니까.”
“못 믿는 게 아니라…… 그냥 호기심으로……”
“호기심으로 이 긴 줄을 몰래 서서 기다리셨다는 거예요? 아, 비밀은 지켜 드릴게요. 당연히.”
이미 그 비밀은 적어도 내게 모두 폭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스엘라는 입술을 달싹이며 제이드 황태자를 노려보았지만 별 다른 대꾸는 하지 못했다.
나는 사정을 알 것 같아 디엘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쑥했다.
이 이스엘라라는 이름의 여성은 하엘던 황자의 비임이 틀림없었다. 제이드 황태자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하엘던 황자뿐이 었으니까.
그러니 하엘던 황자와의 내기에 서 이긴 내게 좋은 감정이 없을 수밖에.
하지만 황실 의료진보다 내가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건 암암리 에 소문이 다 났을 것이다. 그래서 불임 때문에 고민이었던 그녀 가 남들 눈을 피해 여기까지 왔 겠지.
챙이 넓은 모자와 거만한 말투 등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하엘던 황자가 페렐 르만 자작과 비슷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냥 그런 삶의 방식이 좋은가 보다 했는데 나름 자식이 간절한 모양이었다.
“혹시 알아요? 리체 덕분에 조카라도 보게 되면 형님도 리체에게 마음을 풀게 될지? 이스엘라 가 화해의 메신저가 되는 거죠.”
마음을 풀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이스엘라는 한숨을 푹 쉬고 대충 예를 표한 뒤 사람들 속으 로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녀 역시 화해의 메신저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했다.
아니, 표정을 몰래 보아하니 더 이상 제이드 황태자와 말을 섞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제이드 황태자는 어깨를 으쑥하 며 푸른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낯을 좀 가리시나 보네.”
나는 디엘과 서로 눈짓을 하며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황태자님, 방문은 정말 감사드 리는데… 기다리고 계신 손님 들이 너무 많아서……”
“감사하겠지. 리체 양은 날 좋아하니까.”
제이드 황태자는 이해한다는 둣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차마 황태 자에게 뭐라고 하지는 못한 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 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부스를 연다고 했어? 볼 것도 즐길 것도 많은 건국제에서 일만 하고 있네, 리체 양.”
“이게 즐거운 걸요.”
게다가 아직 이시더 남작은 만 나지도 못했다.
나는 ‘농축 시약으로 처방해 드 립니다.’라는 나무 간판을 힐끗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예상보다 늦어지긴 하지만, 분명히 나를 찾아올 것이다.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럼 용건만 말할게.”
제이드 황태자는 내 손에 재빨리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이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