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4화
디엘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리체, 있잖아.”
“어? 어.”
“나도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뭔데?”
“의료 상담이면 아무거나 해도 되는 거지?”
공교롭게도 디엘이 앉은 내 앞 자리는 의료 상담을 하는 손님을 앉히기 위해 마련해 놓은 곳이었다.
“응? 그렇지?”
내가 멀뚱하게 대답하자, 디엘이 초조한 둣 손톱을 잠시 물어 뜯다가 말을 꺼냈다.
“있잖아. 친자 검사 말인데.”
“응”
역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턱을 괴고 디엘의 긴장한 표정을 바라 보았다.
그동안 그렇게 ‘나 친자 검사 혼자 해 보고 있어요.’라는 티를 팍팍 내고 다니더니 뭔가 또 질문이 있는 모양이었다.
“머리카락 검사랑, 마력 검사랑 다 통과하면 마지막 단계가 시약 반응이잖아.”
“응.”
“그리고 네가 마력 검사는 그…… 용의 발톱이 들어간 시약으로 단순화시켰고 말이야.”
“맞아. 대단한 발견이었지.”
“머리카락 검사랑 마력 검사가 다 일치하는데 시약 반응에서 불일치가 뜰 확률은 얼마나 돼?”
“5% 미만? 적어도 가까운 친척일걸.”
나는 책에 적혀 있던 수치를 말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둘 다 일치해?”
디엘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 었다.
“아니, 아직 몰라. 머리카락 검사 결과가 아직 안 나왔거든. 건국제 끝나고 돌아가면 알 수 있 을 것 같아.”
“아, 그렇구나.”
나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었다.
“만일 둘 다 일치한다면 책임질 준비는 해 놓는 게 좋아.”
“..책임이라니 ?”
“결혼 못 할 이유라도 있어? 여자 쪽 의견은 어떤데?”
“리체, 혹시 지금 정말로 내가 사고라도 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디엘이 손을 내저으며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이건 내 친구 일이라서 그런 거야. 내 일 아니야.”
“응, 그래. 친구 일”
나는 디엘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떨리는 것을 바로 포착했으나, 괜히 사생활을 캐고 싶지는 않아 서 그냥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다들 뭐…… 친구 일이라고 하지.”
“진짜 친구 일이라니까!”
발끈하는 모양새가 확실히 무언가 찔리기는 한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성의 없게 대답한 뒤 씩 웃었다.
“근데 아들이야, 딸이야? 나도 친구 일에 개입 좀 해 보자. 친구의 자식에게 선물이라도 해 줘 야지.”
“아, 억울하네. 그건!”
“그건?”
“……그건!”
디엘은 답답하다는둣이 가슴을 퍽퍽쳤으나 더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는 못했다. 그저 시뻘게진 얼굴로 어쩔 줄만 몰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말할까 말까 고민을 하는 표정 이었지만 그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건국제 개막식에 다녀온 세이린 경이 재빠르게 달려온 것이다.
개막식은 황궁에서 열리는 것으로 귀족들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부스에는 나와 디엘뿐이었다.
“리체!”
디엘은 세이린 경을 발견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짐 정리를 한다
며 부스 안쪽으로 사라졌다.
“내가 1둥이지?”
“네?”
“아르가 놈이나 세르이어스의 미친놈보다 내가 빨랐다는 말이야.”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린 경이 내 옆에 의자를 끌어다가 앉으며 팔짱을 꼈다.
“중간에 몰래 빠져나왔거든.”
“네? 그래도 돼요?”
“안 되지.”
그녀는 하품을 하며 어깨를 으 쏙했다.
“하지만 건국제에는 온갖 놈들이 다 오니까 불안해서 말이지.”
“뭐가요?”
“네가 시오니처럼 외모에 약하다면 내가 지켜 줘야 할 필요가 있어. 어떤 떠돌이 놈팡이한테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떠돌이 놈팡이는 아니어도 ‘세르이어스의 미친놈’이 내게 들이대고 있다는 걸 알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저기…… 정말, 아무것이나 여 줘 봐도 되나요?”
외국 억양이 독특한 관광객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네! 그럼요.”
나는 생긋 웃으며 비어 있는 맞 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그렇게 나의 의료 상담 부스는 첫 손님을 맞았고 그 이후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
“젠장.”
한편 에르안은 이를 갈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분홍색 부스에 리체가 있는데 갈 수가 없다니.
은근히 얼굴을 비춰야 할 자리가 많아 도저히 짬이 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부스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고 싶지만 공작으로서의 책임을 다해 야했다.
그래도 세이린이 리체 옆에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리체를 지키고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특히나 좀 곱상하게 생긴 남자 손님이 오면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본다는 기사들의 증언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이린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툭하면 페렐르만 자작저에 가자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게 충분 히 경계할 만한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번 건국제의 하이라 이트는 마지막 밤의 불꽃놀이래요.”
무표정으로 최소한의 말만 하고 있는 에르안의 옆에서 셀리아나가 말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도 굳이 여 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가무잡잡한 피부의 셀리아나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늘씬한 미녀였다.
그녀는 에르안이 이르비아에서 머물 때에 가까이 살았던 이르비아의 방계 왕족이었다.
“글쎄, 여기까지 올 좋은 핑계 는 됐겠지.”
그리고 에르안은 셀리아나가 왜 이렇게 그와 가까이 붙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지켈은 이미 도망갔지만 말이야.”
“과연 최측근 기사가 얼마 동안 이나 주군 옆에서 떨어질 수 있 을지 지켜보겠어요.”
이르비아에서 지캘은 왕족인 줄 모르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셀리아나에게 작업을 걸었다.
이르비아의 자유로운 문화 탓 에, 방계 왕족인 셀리아나도 평 소에는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옷 차림으로 다니곤 했던 것이다.
한때의 불장난을 원했던 그는 실컷 껄떡대다가 그녀의 신분을 알고 난 뒤 기겁하여 사죄하고 얼른 발을 빼려고 했다.
문제는 정작 셀리아나가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점이었다.
지겔은 신분상의 이유를 들어 요리조리 피해 다니다가 에르안을 따라 냉큼 도망치듯 이르비아 를 떠났다.
“무조건 나를 마주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 지켈은 기겁을 하며 도망쳤지만 언제까지나 에르안의 곁을 비울 수는 없 는 일이었다.
딱히 운동에 취미가 없는 셀리아나는 체력적인 한계가 있어 기사인 지켈을 쫓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에르안의 곁에 딱 붙어 있기로 한 것이었다.
정기적으로 지켈의 얼굴이라도 마주할 수 있 도록.
“지난번에 살살이풀에 대해 물어보신 적 있으셨죠?”
그 대가로 셀리아나는 아주 구미가 당기는 제안까지 했다.
“절 도와주시면 이르비아에서 막 수경 재배를 성공한 살살이풀 개량 씨앗을 드릴게요.”
안 그래도 리체는 예전에 살살이풀을 더 갖고 싶다는 내심을 비친 적이 있었다.
[살살이풀 하나만 더 있어도 성분 분리가 좀 더 편할 것 같은데요.]
[이제 안 밝혀내도 되잖아?]
[그건 아니죠. 이건 이제 학문 적 호기심과 제 자존심을 위한 거예요. ]
하지만 리체의 말대로, 살살이 풀의 개량 작업 때문에 도저히 구하기가 힘들었다.
셀리아나는 왕족의 신분을 이용 하여 빠르게 이르비아 의료 연구진에게 하나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살살이풀 씨앗과 지켈을 비교하자면 더 중요한 것은 자명했다.
“필요한 만큼 붙어 있어. 무조건 협조할 테니까.”
게다가 셀리아나가 옆에 붙어 있으면 다른 용도로도 꽤 좋았다.
수군거리면서도 그에게 말을 걸 어오는 귀족 영애들이 한 명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셀리아나는 방 계긴 해도 외국의 왕족인데다가 이국적인 미모가 매력적이었다.
약혼 서신을 보냈다가 이사벨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영애들은 사냥 대회와는 다르게 그의 곁을 맴돌지 않았다.
5년 동안 살았던 이르비아에서 가까이 지낸 사이라는 소문이 조 금씩 부풀려져 갔지만 에르안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시큰둥했다.
어차피 리체가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것보다, 자신도 바빠서 리체 를 보러 가지 못했지만 제이드 역시 여러 사람을 접대하느라 리체에게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이 소소한 위안이었다.
저 멀리에서 제이드는 이복형인 하엘던과 그의 부인인 이스엘라의 옆에서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멍청이는 여전히 위기의식이 하나도 없군.”
에르안은 팔짱을 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셀리아나는 그 말을 듣고도 아 무런 반응이 없었다.
셀리아나 역시 에르안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옆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중이었다.
“대체 신분 차이,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좋다는데.”
“그러니까.”
에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했다.
“왜 애초부터 선을 그어 버렸는 지……”
“그래도 열심히 설득하면 되겠죠?”
“그러기를 바라야지.”
그리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에르안이 셀리아나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를 놀라워 하는 중이었다.
지금껏 에르안은 그 어떤 영애 와도 길게 대화하지 않았다.
승전 연회 때 베티아와 몇 마디 하는 것 같았지만 사냥 대회 때에는 아예 말조차 섞지 않았다.
그런데 저렇게 길게 오래 이야 기하고 있다니.
“일단 길거리에서 먼저 껄떡댄 걸 보면 외모는 마음에 든다는 얘기니까. 그거라도 잘 밀고 나 가 봐야겠어요.”
“나 역시 거기에라도 희망을 걸 고 있는 중이야.”
정작 두 사람은 그냥 자기가 생 각하고 싶은 상대를 떠올리며 각자의 말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