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3화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최 대한 뒤로 젖혔다.
“공작님, 제국법상 평민과 귀족은 결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 건 문제도 안 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아.”
“저는 불법은 싫어요.”
“잘 알아. 그래서 네 성년까지 고백조차 기다렸잖아.”
한마디 한마디 하며 도망가려고 할 때마다 다정한 애정으로 가로 막히는 기분이었다.
“네가 다른 귀족가의 형식상 양 녀가 되는 것에서부터 독립 공국을 선언하는 것까지…… 길이야 많지.”
어느새 그가 마음에 든다고 대답하면 결혼식부터 올릴 분위기 가 되었다.
나의 난감한 표정을 응시하던 에르안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더 얼굴을 가까이 했다.
“한 달.”
에르안은 눈을 접어 보이며 웃었다.
“한 달만 내게 시간을 줘. 그동 안은 귀족으로서가 아닌 남자로 행동할 테니까.”
“음.......”
“한 달 후에도 내가 남자로 안 보이면 그땐 더 부담 안 줄게.”
내가 미심쩍다는 얼굴을 해 보 이며 물었다.
“한 달 후부터는 그럼 사표 써도 돼요?”
“그럼 네가 예전에 약속했던, 세상에서 유일한 사이가 아니게 되는 거잖아.”
“네?”
“넌 거짓말 안 한다며……”
어린애처럼 시무룩한 목소리였지만 눈빛은 거의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짐승 수준이었다.
“하지만 건강해지셨는데. 그때랑 상황이 달라요.”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순식 간에 에르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난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어차피 나는 공작성에서 칸시아 를 기다려야 했고, 건국제에도 참여해야 했다.
“다른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 게 아니라면 안 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결혼도 할 수 있다는 데 딱히 거절할 만한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설렘의 정체를 더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봤자 한 달이라는 생각에 나는 최대한 가볍게 여기기로 했다.
일단 내게는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아, 그리고…… 건국제 관련 서류 언제까지 제출하실 예정이세요?”
“오늘 시작하려고. 왜?”
“제가 부스 하나 신청하고 싶어서요. 서식 맞춰서 오늘 오후까지 드릴게요.”
“건국제에 참여하게?”
“네.”
나는 향긋한 꿀차를 마저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렐르만 자작에게 거짓말을 해서 허송세월을 보내게 한 당사자, 한스를 이용해서 나를 없애려는 계획을 세운 배후.
결국 뒤처리는 세르이어스 공작 가의 주인인 에르안에게 맡기겠지만,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이시더 남작에 대한 마지막 복수였다.
에르안의 말대로, 죽이는 건 쉬웠다. 그에게 부탁만 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에게 더 큰 좌절 을 주고 싶었다.
“알았어. 예산은 마음껏 써도 돼. 알지?”
“어차피 페렐르만 상단에서 지원……
“아냐, 리체. 꼭 공작가에서도 그만큼 돈을 써 줘.”
에르안을 계속 내버려 두면, 방 에서 나가지 않고 건국제 서류까지 같이 작성할 기세였다.
결국 나는 씻어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그를 내쫓을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에 분명히 내가 충동적으로 사표를 쓴 것 같기도 한데, 에르안이 나가고 나서 찾아보니 전혀 흔적이 없었다.
“꿈인가……. 분명 뭔가 쓴 거 같은데.”
그리고 테이블 위에 곱게 놓인 반지 상자를 보며 또 한 번 놀랐다.
다이아몬드 반지라니, 성년 생 일 선물로 정말 말도 안 되는 걸 받아 버렸다.
나는 재빨리 상자를 닫고 서랍 속에 넣었다.
6년 전, 내가 이곳에 을 때 다 짐했던 산뜻하고 쿨한 이별은 이미 그른 듯했다.
9. 건국제
제국에서 가장 커다란 축제인 건국제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외국의 관광객들도 이때에 맞추어 수도에 놀러 와 며칠씩 머물 정도로 구경거리가 많았다.
가장 인기 있는 구경거리는 각 영지에서 직접 신청하여 운영하는 부스 행렬이었다.
각종 특산품은 물론 그 지역의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영지의 이름을 달고 부스를 운영하여 관광 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부스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면 운영될수록 영지의 살림에도 도움이 되고 명성도 을라가므로 부스 신청과 허가는 각 영주들이 직접 관할했다.
나 역시 ‘세르이어스 공작령’ 소속으로 꽤 좋은 곳에 부스를 세웠다.
〈천재 의사 리체 에스텔의 의료 상담소〉라는 간판도 예쁘게 달아 두고 간판에는 반짝거리는 별장식도 붙였다.
에르안이 나를 안아서 들어 올려 줄 때에 직접 손에 넣은 그 장식이었다.
“네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들 이라면 뭐든지 내가 갖게 해 줄게.”
반짝거리는 것이 여전히 봐도 눈에 띄는 장식이었다.
“나도 네 눈에 예뻐 보이면 좋겠다.”
에르안을 보고 갖고 싶다고 생 각하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취임식이든 연회든 사냥 대회든, 귀족 영애들이 대놓고 탐을 낼 정도로 그는 근사했다.
그런데 반짝거리는 장식만큼이나 멋진 사람이 세상 다정하게 굴며 자신을 갖게 해 주겠다고 말하면…….
내 이어지는 생각을 가로막은 사람은 디엘이었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무조건 문닫자.”
디엘은 내 부스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약초 상자들을 보며 벌 써부터 걱정된다는 둣이 말했다.
“나 불꽃놀이는 보고 싶단 말이야.”
“불꽃놀이?”
“이번에 폭죽을 최대 규모로 수입해 왔대.”
부스 행렬에 도착하자마자, 디엘은 여기저기 쏘다니더니 얼마 되지 않아 잔뜩 정보를 물어 왔다.
“저기 두 시 방향에 저 창고 보여? 저기 쌓여 있는 게 다 폭죽 이래.”
“그래?”
“엄청난 장관일 거야. 그 구경 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여기서도 보이지 않겠어?”
“무슨 소리야. 세르이어스 소속 사람들은 모두 간이 관람탑 3둥석에 갈 수 있다는데.”
“뭐…… 알았어.”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광장에서 보 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모든 사용인에게 3등석을 허용한 것 자체가 세르이어스의 이름값을 보여 주는 일례였다.
“별건 아닐 것 같지만.”
그렇게 대단한 장관이었다면 회귀 전에도 불꽃놀이가 엄청났다고 소문이 났을 것이다.
의원에 찾아온 손님들 중 한두 명은 분명히 허풍을 떨 만도 한 데 그런 기억은 없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불꽃놀이가 있었다는 말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회귀 후에 새롭게 생긴 행사인가?’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디엘이 신나서 말을 이었다.
“이번 건국제에는 20년 만에 티실리아 대신녀님도 오신대.”
그건 회귀 전에도 있었던 일이었다.
“이번에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글쎄, 우리랑 상관있는 사람은 아닐 것 같아.”
“그건 그렇지. 20년 전에도 하엘던 황자님이셨으니까 말이야.”
신전의 사람들은 모두 다 은둔하고 있어서 쉽게 볼 수 없었다.
다만 가끔씩 비정기적으로 건국제에 나타나곤 했는데, 선택된 한 사람에게 신탁을 내려 준다고 들었다.
신탁은 그 사람의 미래를 말해 주는 신성한 말씀이라는데 누가 받게 될지는 원칙적으로 아무도 몰랐다.
내 기억으로 이번 신탁은 프릴리트 후작에게 내려질 예정이었다.
사냥 대회 때 그 가문 휘하의 기사를 치료했던 적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신탁의 내용조차도 당사자에 게만 알려 주기 때문에 진짜로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건국제에 대신녀님이 20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만 해도 충분한 가십거리는 되었다.
“어쨌든 그런 것보다는 내 부스가 더 중요해.”
나는 회귀 전 삶에서는 막 의원을 연 참이라 정신이 없어 건국제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부스를 열어서, 의원에 갈 정도로 아프지 않은 사람도 가볍게 의료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질병은 뭐든 예방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물론 내 명성이 올라가고 나의 실력이 만천하에 인정받는 것도 좋았다.
의사로서의 내 자존감은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그럴듯하게 꾸민 부스가 완성되고, 나는 확인차 디엘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유통되는 아모리 꽃, 다 싹쓸이해 온 거 맞지?”
“응, 몇 번이나 확인했어.”
디엘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서신도 확실히 보냈고?”
“응, 보냈어.”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디엘이 묘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이시더 남작 때문에 페렐르만 자작님이 따님과 생이별하신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번에 호 되게 당했으면 좋겠다.”
“호되게 당할 거야. 그 딸과 반란군의 관계를 무조건 알아낼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속정이 너무 깊었다. 대부라는 이유만으 로 페렐르만 자작과 그 딸의 사 정을 밝히는 것까지 돕기로 하다니.
하지만 내게 잘해 준 페렐르만 집안의 사람들을 떠올리면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주고 싶었다.
“이렇게 이타적으로 살다 보면 복이 오겠지.”
나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 앉았다.
디엘은 대각선 부스에서 파는 화려한 색깔의 수제 사탕을 사서 내게 나누어주며 내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았다.
아직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지 않아 손님이 올 리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사탕을 먹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디엘, 있잖아.”
“응, 왜?”
“내 친구 얘긴데……”
디엘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남자가 내 친구한테 자기 를 남자로 봐 달라고 했대. 그동안 내 친구는 의식적으로라도 그런 사이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말이야.”
“왜? 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있었는데, 사라졌대.”
“그럼 뭐가 문제야?”
“갑자기 남자로 봐 달라고 하니까 막 어색하면서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고……. 여하튼 그런 상태래. 자기 마음을 들여 다보고 싶어서 승낙은 했는데.
내 친구는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
“답은 나온 것 같은데.”
디엘은 사탕을 와그작, 씹으며 별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친구도 그 남자를 이미 좀 좋아하나 보다.”
“……응? 대체 왜?”
“싫으면 애초에 남자로 봐 달라고 했을 때 질색을 했겠지. 예를 들어 내가 너보고 나를 남자로 봐 달라고 하면 어떨것 같아?”
“그건 진짜 진지하게 상상하기 조차 싫을 정도로 끔찍해.”
“거봐. 생각보다 사람은 이성에 대해서는 단순하다니까. 싫은 건 딱 명확하지? 명확하지 않다는 건 마음이 어느 정도 있는데 억 지로 외면하고 있다는 얘기야.”
뭐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입술만 달 싹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