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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02화 (102/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2화

몇 년 전 그녀를 독살하려고 했던 배후가, 리체를 해하려고 했던 뒤 세력이, 아들의 몸을 약하 게 한 범인이 그녀의 혈육이었다니.

“하지만 로만은 이런 일을 벌일만한 배경도, 배포도, 능력도 안 되는 놈인데...”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페렐르만 자작의 딸과 연관된 무슨 일이 있나 보지요. 자세한 건 빌어 먹을 제 사촌 형님도 모르는 모양이던데.”

에르안은 냉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그 딸과 뭐,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거기까지 파헤 칠 필요는 못 느꼈습니다.”

그는 몹시 일관적인 사람이라 리체가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 본인도 관심이 없었다.

“왜 관계가 없어.”

이사벨은 충동적으로, 약혼을 언급한 서신들을 흘끗 보며 말했다.

“시오니와 나는 너희를 약혼시키려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는데.”

“그것도 같이 갖다 버리시면 되겠네요.”

“그래도 그 딸이 돌아오면 나는 다른 귀족 영애들보다는……”

이사벨은 에르안의 못마땅하다 는 표정을 바라보며 결국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물론 에르안의 짜중 난다는 표 정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마음을 고백했으니 가능한 타인의 도움은 모두 동원해 볼까 고민 중이었다.

리체와 이사벨의 사이가 좋으니 그 사실을 이용해 볼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사벨이 그녀를 아낀다는 것과 별개로, 평민을 하나뿐인 아들의 짝으로 생각할지는 미지수였다.

에르안과 이사벨은 모자 사이이 긴 하지만 어릴 때부터 유대감이 별로 없었으며 돌아와서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벨이 어느 선까지 리체를 아끼는지 에르안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로라하는 귀족들의 혼담 서신을 보면서도 질리는 느낌이었는데, 페렐르만 자작의 딸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일이 잘될 때까지는 숨겨야겠다는 마 음이 확고해졌다.

아직 리체의 마음을 얻지 못했 는데 이사벨이 방해를 할지도 모 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자신이 리체를 아끼는 모습을 꽤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사벨은 어쩐지 자신의 결혼 상대로 리체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하긴 그녀 역시 자신을 살려 줬 다는 이유만으로 리체를 끔찍하게 여겼으니 에르안이 리체를 같은 마음으로 아낀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사벨이 어찌나 리체를 집착하 듯 아꼈는지, 공작성의 사람들 모두 리체에게만 다정한 에르안을 보면서도 ‘마님을 닮았나 봐’ 라고 생각하며 넘길 지경이었다.

다들 에르안과 이사벨을 다 같이 묶어서 ‘유능한 리체를 집착적으로 아끼는 좀 이상한 사람 들’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신분 차이도 신분 차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싸늘하고 리체에게만 순한 양 같은 모습이 이사벨과 함께 엮여서 남녀 간의 감정이라는 의심조차 받지 못했던 것이다.

에르안의 잔뜩 굳은 표정을 보고 있다가, 이사벨은 혀를 끌끌 찬 뒤 화제를 돌렸다.

“로만은 어쩔 작정이냐.”

“페렐르만 자작에게도 갚을 빚이 있어 보여서, 당분간 괴로움에 몸부림치도록 놔두려고 합니다. 아마 리체가 도와주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아, 리체……”

이사벨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 애가 대부의 일에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야. 본인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요.”

“너는 페렐르만 자작의 딸에게 관심이 없어도, 나는 시오니의 딸에게 무심할 수 없다. 심문할 때 내가 직접 참여하겠어.”

“그러시든가요. 어쨌든 저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르안은 다시 한번 책상에 쌓여 있는 서신들을 못마땅하게 바 라본 뒤 덧붙였다.

“건국제 관련해서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더군요.”

“그럼 네 방에 가는 거냐?”

‘‘아뇨.”

그가 일어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주방에 잠시 들를까 합니다.”

주방의 사용인들이 순식간에 비상에 걸릴 것을 예감하며, 이사벨은 이유도 묻지 않은 채 가 보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을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이를 갈았다.

죽은 남편과 똑같이 닮은 아들의 단단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확신에 차서 생각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그녀의 아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두는 것이었다.

“시오니……”

그러나 그녀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라베리 섬의 시오니는 제국의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무뚝뚝한 세이린마저도 친하게 지낼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최소한의 사교 활동만 하던 이사벨마저도 영리하고 귀여운 그녀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사벨 역시 시오니의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 오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얼마 전, 에르안에게서 시오니가 딸을 세르이어스 공작령으로 보냈다는 말을 들었다.

리체가 무슨 일기장의 암호를 풀었다고 했는데 그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녀를 믿고 딸을 보냈 으나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를림없었다.

그런데 웨데릭과 로만마저도 그 딸과 연관되어 있다면…….

“내가 저승에서 네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이사벨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 에 얼굴을 묻었다.

***

무슨 일이 있었더라.

나는 어지럽게 핑핑 도는 머리 를 붙잡고 한동안 침대에서 일어 나지 못했다.

“비싼 술이라고 숙취가 없지는 않네……”

너무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서 덮어놓고 홀짝였던 것이 문제였다.

머리는 너무 아픈데 어젯밤의 일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내 방에 들어와서 에르안과 뭐 라고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기도 한데…….

“리체, 들어가도 돼?”

에르안의 생각을 한 줄은 어떻게 귀신같이 알았는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 제가 지금 막 일어나서 손님을 맞을 채비가 안 되어 있는데……”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괜찮아. 그럴 것 같아서 왔어.”

친절한 대답이 문 밖에서 이어졌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너무나 멀끔한 차림새의 에르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힘들어? 속이 많이 아프지? 어제 많이 마시더라.”

“예…… 어휴.”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힘겹게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다시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면 성을 갈겠어요.”

“앞으로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것 같으면, 내가 이 발언을 기억했다가 꼭 말해 줄게.”

“필요 없어요. 제가 기억 못 할 리는 없으니까요.”

“성은 꼭 세르이어스로 갈길 바라.”

양녀는 절대 안 된다며 길길이 될 때는 언제고 정말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침대 안에서 부스스한 몰골로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그가 내 손에 따뜻한 머그컵을 쥐여 주었다.

“숙취에 좋은 릴리아 꿀을 탄 꿀차야.”

“감사합니다.”

달큼한 향기가 나는 꿀차를 받아 들고 몇 모금 마시니 속이 드디어 풀리는 느낌이었다.

뒷맛에 과일 향이 배어 있는 것이 일품이었다.

“와, 맛있네요. 주방장님 솜씨인가요? 꿀차도 이렇게 잘 타 주시는지 몰랐어요.”

“아니.”

에르안은 내 머리맡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탔어.”

나는 한 모금 더 마시다가 천천 히 고개를 들었다.

“네?”

“내가 직접 탔어. 열두 번의 시도 끝에 가장 적합한 배율을 알아냈고.”

“그, 그냥 정량대로 하시면 될 텐데……”

“주방장과 상의했어. 평상시 네 가 좋아하는 디저트 맛을 고려해서 적절한 향을 가미했거든.”

“……공작님, 혹시 이르비아에서 익힌 취미 중에 꿀차 타기도 있으셨어요?”

“아니.”

에르안이 내 눈을 뻔히 바라보 며 말했다.

“내 취미는 네게 잘해 주는 것 인데.”

“공작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그제야 어제의 기억이 간헐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눈이 급하게 책상으로 향했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흐릿하게 몇 가지 장면들이 떠올랐다.

‘맞아, 반지! 나 반지 받았었지!’

연인들이나 주고받는 그 부담스 러운 선물!

“특기는 리체 말 잘 듣기.”

“제가 이런 식으로 말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좋아하는 여자한테만 하라고 했잖아. 나 그 말 지키는 거야.”

컵을 쥔 내 손을 다시 한번 감 싸며 그가 온순하게 웃었다.

“장점은 리체 취향의 외모.”

“단점은 리체에게 집적대는 놈 에게 살인 충동을 느끼는 것.”

나는 손에 느껴지는 체온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자기소개.”

이쯤 되니 정말 ‘이상하게 컸다’ 라는 페렐르만 자작의 평가가 정확한 듯했다.

“이 정도면 남편감으로 어떤 것 같아?”

성년 다음 날 아침부터 이게 무 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후보에라도 올려 줘.”

그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접어 보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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