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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01화 (101/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1 화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가 간절하게 내 옆에 달라붙었다.

“……혹시 내가 너무 부담스러워? 사표를 쓸 정도로 내가 끔찍한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공작님이 끔찍하다니, 그렇지 않아요. 다만…”

어차피 솔직하게 말하고 단호하 게 쳐 내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거짓말을 하기도 싫어서, 나는 결국 당당하게 말했다.

“저, 결혼하려고요.”

내 말에 에르안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가 사표를 볼 때보다 더 충격 을 받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 보았다.

“겨, 결혼? 오늘이 성년인데?”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공작님과 남녀로 얽히기 싫은 거고요.”

“언제부터야.”

에르안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 아졌다.

이제는 그의 온몸이 부 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언제부터……”

나는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하 려다가, 문득 시야에 그의 붉은 입술이 들어와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생각보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어, 어릴 때부터?”

“리체, 우리 둘은 유일한 사이라며. 나를 가장 생각하는 사람은 너라며.”

“그랬죠. 그렇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않나요?”

“그 필요를 왜 너 혼자 정해? 설마… 설마 정말로 황태자를 좋아하는 거야?”

“아, 아니에요!”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키다가 머리가 핑글 돌아 다시 비틀거리고 말았다.

내가 다칠까 재빠르게 내 등을 받친 에르안이 조심스럽게 나를 다시 눕혔다.

“그러면……”

그러고는 자신도 내 옆에 기대어 나란히 누웠다.

그의 새까만 눈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의 몸을 밀쳐 내는 것도 잊었다.

“어떤 놈이야? 응?”

그가 내 두 볼을 감싸 안은 채 로 웃었다.

그러나 눈에는 분노 와 좌절이 선명했다.

그의 새끼손가락이 살짝살짝 내 귓불을 건드려서 어깨가 움찔했다.

“어떤 놈하고 바람이 나서, 날 버리고 가겠다는 거야?”

그는 아까의 패닉에서 벗어났는 지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대신 더 정상이 아닌 얼굴이었다.

다시 여유를 찾은 그의 목소리에 서늘한 살기가 어리기 시작 했다.

“이름만 말해. 괜찮아. 죽이지는 않을게.”

“그, 그게 아니라……”

“사표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응?”

그의 긴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내 귓등을 훌고, 머리카락을 쓰 다듬었다.

가뜩이나 밀착된 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너무하잖아, 리체.”

얼굴이 서로 너무 가까워서, 긴 속눈썹마저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셋, 잠시 떨어질 때에는 세상 애처롭게 굴더니 떠난다고? 그게 말이 돼?”

“그건 저희는 음, 특별한 사이였으니까요.”

“그래. 그 특별한 사이라고 말해 준 건 너잖아.”

왠지 내가 어린 날 말했던 것들 이 이상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네 말에 책임을 져야지…… 리체.”

“책임이라뇨?”

“너를 만나지 못한 5년간 난 약속대로 매일매일 네 생각만 했어.”

붉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했다.

“매일 밤 널 볼 수 닜는 지금은 그럼 어떨 것 같아?”

술김에 의식이 흐릿해도, 그의 눈빛에 소유욕이 일렁거린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의미로 온몸이 긴장되었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네 성년을 기다렸는데.....이제는 날 제발 남자로 봐 달라는 말을 하기위해 내가 얼마나......”

그가 아이같이 칭얼거리며 말꼬 리를 늘일 때마다 이상하게 색기가 감돌았다.

그의 흐릿해진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발목에 힘이 들어갔다.

“사표는 제 권리예요.”

나는 가까스로 단호하게 말했다.

“리체……”

그가 붉은 입술로 속삭이듯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는 침대 시트를 꽉 붙잡았다.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다른 쪽 내 손을 이끌고 손 둥에 입을 맞추었다.

천천히 내리 늘러지는 입술의 감촉이 선명했다.

“으, 흐으..”

“이런 식으로 유혹하지 않으면, 꼭 그렇게 냉정하게 대답하더라.”

그가 앞니로 살짝 내 손가락을 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정신이 더 몽롱해졌다.

“사람 미치게 말이야.”

“이…… 러지 마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딘가 서글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그 남자는 되고, 난 안 되는 게 뭔데?”

“그 남자라뇨?”

“네가 결혼한다는 그 남자.”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 는지 눈치챔 나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에르안은 내가 거짓말을 하면 단박에 알아챘다. 그리고 아무래 도 어설프게 넘어갔다가는 어디선가 엉뚱한 곳에서 칼부림 날 기세였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지, 상대가 있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뭐?”

에르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는 평민이고, 정상적인 결혼

을 하려면 당연히 상대도 평민이 어야 해요.”

나는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공작님께서 이러시는 데, 제가 어떻게 사표를 안 써요? 이 상태에서 제가 정상적인 결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상에.”

그가 멍한 눈으로 내 머리카락 을 쓸었다.

“설마 내가….. 그 정도도 생각 안 하고 네게 나를 남자로 봐 달라고 졸랐을까 봐?”

“저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든 의식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순서가 달랐군.”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교제 신청보다 프러포즈부터 했어야 할 줄이야. 완전히 잘못 짚었어.”

“저는…… 숨겨진 여자로 살기는 싫어요.”

“수, 숨겨진 여자?”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경악마저 섞여 있었다.

“리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생각이 짧아서 서로 오해 할 여지를..”

나는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듣 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

이사벨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책상 앞에는 여기저기서 몰려온 혼담 서신이 쌓여 있었다.

하절기 사냥 대회 1등이라는 명예를 거머쥐고 나서 이제 아주 먼 영지에서까지 연락이 왔다.

물론 그녀는 딱히 아들의 혼사에 관여할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내 말을 듣지도 않을거고……. 딱히 얻고 싶은 며느릿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성의 없이 서신을 들추어보면서 사실은 다른 생각 중이었다.

리체의 성년 생일 파티에 몰두 하느라 우선순위를 뒤로 미뤄 놓았지만 잊지 않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하나뿐인 조카의 실종이었다.

그녀는 로만이나 웨데릭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은근슬쩍 돈을 요구하거나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꼴을 보면 한심했다.

하나뿐인 혈육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

그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하지만 자주 찾아와 안부를 묻고 자신을 돌봐 주었으며 어린 에르안을 챙겨 주었다는 심리적 빚이 있었다.

멀리해야겠다는 육감이 번득일 때면, 그래도 혈연인데 정말로 자신이 세간의 평가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인지 자기혐오가 들곤 했다.

‘그래도 조카인데 좀 도와줘야 하나.’

로만이 서쪽 영지를 미친 둣이 헤매다가, 건국제 때문에 잠시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는 소문 은 들었다.

건국제에 참가하는 상인들의 목록을 허가해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근데 다 큰 놈이 대체 어디 가 있는 건데? 리체의 조수도 없어졌다고 하니 더 신경 쓰이는군.’

리체의 조수, 아론 크릴소가 사라졌을 때 리체 대신 디엘이 대답했다.

“사실 리체가 조수를 엄청 굴렸거든요. 도망간 걸 거예요. 약초 손질을 워낙에 하루 종일 시켜 놔서……”

이사벨 역시 그 조수가 온실 혹 은 방에 틀어박혀서 약초만 돌본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지라 처음 에는 가볍게 넘겼다.

슬슬 로만에게 안부라도 물어야하나 생각할 때에, 기사단과 함께 새벽 훈련을 마치고 온 에르 안이 나타났다.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벨의 앞에 앉던 그의 시선 이 책상 가득한 서신들에게 닿았다.

그가 그중 하나를 집어 들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마……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

“제 혼사는 제가 정합니다.”

이사벨이 기가 막힌다는 둣이 혀를 찼다.

“결혼을 할 생각이 있기는 해?”

“네.”

에르안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습니다.”

“정말? 혹시 상대가 있……”

“상대방의 동의를 얻으면 바로 말씀드릴테니 괜히 잉크 아깝게 이런 쓰레기 서신들에 답장하지 마십시오.”

“어찜. 그 불쌍한 상대의 동의를 받기 전이구나.”

이사벨이 그럼 그렇다는 둣 시큰둥하게 턱을 괴었다.

“취임식에서 만났니? 아니면 연회? 사냥 대회? 워낙에 귀족 영애들과 접점이 많았으니……”

어차피 제대로 된 애가 들어오기는 글렀다는 어조로 이사벨은 별 관심 없이 말했다.

“그런데 설마 이게 ‘드릴 말씀’ 은 아니겠지?”

“예, 사실 웨데릭 때문에 왔습니다.”

‘형’이라는 호칭이 없었기에 이사벨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체의 생일도 지났고 하니 이제 피를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사벨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에르안이 자초지종을 무덤덤하게 설명하자, 이사벨의 입술이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다.

모든 정황을 듣고 난 이사벨이 검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에르안 일리아드 세르이어스.”

그녀가 우아하게 찻잔을 잡았다.

“너는 왜 세르이어스 공작가가 제국을 지배하지 못했는지 알고 있니?”

실제로 세르이어스 공작령은 상당히 넓었고 부유했다.

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개국공신이었던 그들이 왜 공작이라는 지위에 만족하며 몇백 년을 이어왔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네 아버지, 케일런이 내게 이 렇게 말해 주었단다.”

에르안은 고요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세르이어스는 천성이 냉혹하여, 성군이 되어 포용력 있게 온 제국을 이끌 만한 인성이 되지 않는다고.”

이사벨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딸각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놓았다.

“이제 그들은 어미의 친정 식구들이 아니라 세르이어스의 적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결론이었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포용력 없게 처리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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