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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100화 (100/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100화

분명 모두 기함하겠지만 이제 굳이 세르이어스 공작성은 내가 필요 없다.

애초에 내가 여기 온 목적은 거의 다 이루었다.

‘나를 위해 살 거야. 가족을 찾든, 가족을 만들든.’

이사벨 마님 같이 소중한 사람 들은 가끔씩 보러 오면 된다.

‘에르안은……’

생각이 에르안에게까지 미치자 복잡한 심경에 한숨이 나왔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리체? 아직 안 자는 것 맞지?”

나는 화들짝 놀라 거의 다 쓴 사표를 책상 서랍 속에 쑤셔 넣 고 벌떡 일어섰다.

자기 생각을 하는 줄은 어떻게 알고, 에르안이 온 것이다.

“네, 네. 들어오세요.”

깜짝 놀라서 문을 여니, 에르안 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 다.

“어디 아프세요? 아까 저녁 식사를 잘 못하신다 싶었어요.”

“아냐.”

에르안은 문을 닫으며 다소 딱 딱하게 말했다.

“그건 그냥…… 긴장해서 그런 거야.”

“왜요? 제 성년인데.”

“네 성년이니까 긴장하지.”

나는 그에게 테이블 맞은편 의 자를 권하다가 살짝 비틀거렸다.

“리체?”

“괘, 괜찮아요. 제가 과음을 해 서……”

너무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주량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 다.

그가 급히 나를 안다시피 하며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혔다.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순식간에 몸이 긴장되고 온몸에 더운 피가 돌았다.

단단한 근육이 나를 받쳐 주니 이상하게 긴장감이 돌며 옛날 무기고에서 잠복을 하면서 그의 품 에 안겨 있던 생각이 났다.

‘미쳤나 봐, 리체 에스텔.’

하지만 그는 나를 제대로 앉히고 나서 깔끔하게 멀어졌다.

얼굴이 좀 굳어 있는 게, 그동 안 해 왔던 몹쓸 유혹을 할 생각 은 아닌 것 같았다.

나 역시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한 게 괜히 엄숙해져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늘도 잠이 잘 안 오실까요?”

“글쎄. 어제도 못 자긴 했지.”

“밤이라…… 차는 좀 그렇고,  약한 수면제라도 처방해 드릴까요?”

“아냐. 어제는 떨려서 잠이 안온 거야.”

그다지 긴장할 일도 떨릴 일도 없는데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젊은데 신경 쇠약인가 진 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리체.”

“네.”

“할 말이 있어.”

창문 밖으로 달이 넘어가고 있 었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각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술기 운이 다시 돌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 네가 성년이니까 아무런 죄책감 없이……”

나는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가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성년 선물이야.”

“가, 감사합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자를 받아서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 고 너무 놀라서 상자를 떨어트릴 뻔했다.

상자 안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

“그때 나눠 꼈던 일회용 반지와 사이즈가 같아. 아마 맞을 거야.”

“음…… 공작님.”

나는 난감한 어조로 그를 불러 놓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성년에 반지를 주는 것은 보통 약혼 관계에서나 하는 관습이었다. 아니면 평소에 연인끼리 주고받는 선물이라거나.

“이건 좀 과한데요.”

“왜?”

“우리 사이에 반지는 좀……”

“우리 사이가 뭔데?”

내가 대답하지 않고 눈동자만 굴리자, 그가 턱을 괴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도, 너도 이제 성년을 넘긴 젊은 남녀잖아.”

나는 온몸이 뚫릴 것 같은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왜 이 러는지?”

“공작님.”

“나 이제 정말로 표현할 거야.”

“뭘요?”

“내 마음.”

“너는 내 모든 행동과 존재의 이유거든.”

작은 스킨십 하나 없었지만 낮 은 목소리에 왠지 마음이 떨렸다.

“내가 다 맞추고, 훨씬 더 노력 할게. 그러니까 도망가지만 말아 줘.”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의 얼굴 에 조급함과 간절함이 드러났다.

“강요하지는 않아. 하지만 일단 내게 남자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만 좀 준다면……”

나는 남자나 연인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에르 안에게 벽을 세우지도 않았다.

이번 생애서 내게 필요한 것은 안정된 가족이었다.

내 남편이에요, 내 자식이에요,  내 부모예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어느 날 내가 사형 선고를 받고 외롭게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 울어 줄 수 있는 ‘내 혈육’들.

물론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다 내 능력의 대가이지 존재 그 자체의 유 대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에르안을 남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뭐, 자꾸만 깊은 생각 없이 저를 유혹하시는 거야 그냥 옛정을 생각해서 넘어갈 수 있지만 반지 까지는……”

“깊은 생각이 없다니.”

내 말을 자르고,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난 네 말이라면 다 들어. 네가 그랬잖아. 그런 건 좋아하는 여자한테만 하는 거라고.”

“어…… 음.”

“나 너한테밖에 안 그래.”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이라도 날 어린애가 아니라 남자로 느끼라고 그런 건데,  효과 없었어?”

“있는 것 같던데.”

“어, 없었어요.”

“리체.”

그는 천천히 일어나 내 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내 볼을 감싸고 자신의 눈을 마주하게 했다.

“너 거짓말 정말 못해.”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뛰었다.

하필 술을 너무 오랜만에, 많이 마셨다.

시야가 어질어질한 와중에 그의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거야, 그냥 공작님이 너무 잘생기시고 세상 다정하게 구시 니까 그런 거죠.”

나는 결국 부루퉁하게 짜증을 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면 계속 남자로 봐 줄 거야?”

에르안이 찬찬히 속삭였다.

“제가 지금 술이 좀 취해서 연구실에는 못 갈 것 같고……. 갖고 있는 수면제를 좀 드릴게요.”

나는 심호흡을 하며 수면제를 놓아둔 서랍을 열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에르안의 눈빛이 변한 것은 그때였다.

“……리체.”

수면제를 찾으려고 서랍 속을 뒤지던 나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여유로웠던 에르안이 평정심을 잃고 황급히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왔다.

어느새 어딘가 애틋해 보이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아까 쓰다가 황급히 집어넣은 사표를 집어든 그가 심각한 표정 으로 책상을 짚었다.

“이게 뭐야?”

나는 절대로 들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의 낮고 싸늘한 목소 리였다.

“네? 음……”

잠시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 다.

너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그의 무너져 버린 표정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게다가 술기운이 계속해서 올라와 머리가 점점 더 멍해졌다.

“말 그대로 사표예요, 공작님.”

어차피 거절할 것, 괜히 숨길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사표?”

그가 씹어뱉둣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만둔다고?”

나는 그의 위압감에 기죽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이제 공작님도 건강해지셨고…… 공작님의 지위를 위협하 는 사람들도 딱히 없는 것 같은 데. 꼭 제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유가 뭐야?”

에르안이 사표를 든 손에 힘을 주며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나는 나의 사표가 무참하게 구겨져 아무렇게나 그의 주머니에 쑤셔 박아지는 것올 바라만 보 고 있어야 했다.

“돈? 월급이 더 필요해? 아니면 휴가를 더 줄까? 굳이 다른 곳을 갈 이유가 뭐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둣의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얼핏 고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순간 시야가 빙글 돌았다.

역시 샴페인을 너무 많이 마신듯했다.

바닥이 눈앞에 다가오려는 찰나, 에르안이 내 몸을 받아 들었 다.

“죄, 죄송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이러다 넘어지겠어.”

그는 내 몸을 안아서 그대로 침대에 눕혀 주었다.

침대에 눕고 나니 몸이 축 늘어 져서, 그동안 정신력으로 서 있 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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