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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99화 (99/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9 화

“그래도 이 일에 아주 질이 나 쁘게 연관되어 있는 건 사실이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공작님의 말에 따르면 웨데릭이 반란군과 내 딸이 연관 되어 있다고 했으니……. 생각보다 일이 복잡할 수도 있겠어.”

페렐르만 자작은 참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장 로만에게 달려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고 싶지만 제대 로 대답하지 않겠지.”

“당연히 발뺌하겠죠. 그러니까 둘 중 하나여야 해요.”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 갔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들이 밀든가, 아니면 멘탈을 탈탈 털 어서 바닥까지 끌어 내린 다음 추궁하든가. 그래서 말인데요.”

“응?”

“제가 페렐르만 상단의 일에 조 금만 끼어도 될까요? 당분간만요.”

“왜지?”

“아마 이시더 남작님은 아론 크릴소의 실종 때문에 저를 단서로 노리고 있을 것 같은데……”

순간 페렐르만 자작의 눈이 불 타올랐다.

그가 분노하기 전에 내가 재빨 리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이 기회에 옴팡 뒤집어쓰게 하 려고요. 지금도 지옥에 있겠지만,  불구덩이에 한 번 더 집어넣는 심정으로.”

“그런 거라면 당연히 적극적으 로 도와야지.”

페렐르만 자작이 외알 안경을 올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 리체.”

“네.”

“그때 웨데릭을 사냥 대회에서 함정에 빠트린 것도 그렇고”

나는 페렐르만 자작의 느릿한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너, 아주 오랫동안 그 부자를 의심해 온 것 같구나.”

살짝 딴청을 피우며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나중에, 나중에 다 말씀드릴게요.”

“나중에 언제?”

“이번에…… 이시더 남작님 일만 도와주시면.”

“그건 당연한 거라니까. 하지만 리체, 이 일이 끝나면 꼭 자초지 종을 설명해 주길 바란다.”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며 페렐르 만 자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어쨌든 우리의 일에 얽혀서 위험에 처하는 게 싫어서 그래.”

“……네.”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둣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심산이냐?”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고 협조 해 주겠다는 어조였다.

나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지금 대륙 내에 유통되고 있는 아모리 꽃을 모두 다 구할 수 있 을까요?”

“본디 유통량이 많은 약초는 아 니라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독점을 하겠다는 말인가?”

“네, 최대한 빨리요.”

페렐르만 상단이 나선다면 그 수상한 크림의 치료제로 쓰이는 아모리 꽃을 독점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페렐르만 자작이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는 샴페인을 한 잔 더 마시며 한숨을 쉬었다.

“일주일 뒤에 있을 건국제에 참석해야겠어요.”

회귀 전, 나는 건국제 같은 커 다란 축제에는 발걸음조차 하지 못했다.

어릴 때에는 보육원에서 자라느 라 수도까지 갈 엄두를 못 냈고,  의원의 보조로 있을 때에는 바빠 서 못 갔다.

성년 후에는 내 의원을 개업하 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건국제에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국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건 아니 다.

의원만 자리를 잡으면 꼭 해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제 이름으로 된 부스도 하나 신청하고요.”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될 줄은 몰 랐지만 말이다.

이시더 남작은 그날, 직접 나를 찾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황태자님.”

젠시는 제이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동복의 오누이 사이인 그들은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았다.

“리체 양을 좋아하시는 것 같군요.”

제이드의 귀가 붉어졌다.

“그냥, 음……”

그의 시선은 아르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리체에게 강아지처럼 계속 향해 있었다.

“리체 양이 저를 좋아하기도 하고……”

“네?”

젠시가 고개를 가웃거리며 반문 했다. 딱히 그런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지만 오늘 하루 본 것으 로 반박하기엔 너무 시간이 짧았 다.

“맨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이 너무 강렬한가 봅니다.”

“맨 처음이요?”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대고,  제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어요.”

“오호.”

젠시는 재미있다는 둣이 부채를 부치며 눈을 반짝였다.

영애들과 제대로 얽힐 새도 없 이 전쟁터로 끌려간 남동생이었 다.

“그 이후 많은 티타임을 가졌지만, 리체 양같이 시선이 가는 여자는 없었습니다.”

“과연 똑 부러지기는 하더군요.”

“예…… 제가 머리를 쓰는 걸 정말 싫어해서 그런지 더 멋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 약혼녀도 없으시잖아요.”

젠시가 부드럽게 말했다.

“측실부터 들이시면 상당히 일이 복잡해질 겁니다.”

“흠.”

“하엘던 황자님과 저희 오누이 사이가 아직도 어색한 건 아시지요?”

“저는 뭐, 그렇게 어색하다고 생각은 안 하는데……”

제이드는 어떻게 보면 황가의 늦둥이 였다.

황제가 평민출신 측실에게서 본 하엘던과 나이 차이가 스무 살 가까이 났다.

그동안 하엘던 이 다음 황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던 차에 제이드가 태어난 것이다.

늦계 본 적통의 황태자는 온갖 사랑을 다 받고 컸다.

이미 나이가 많이 든 황제와 황후는 사랑스럽게 생긴 제이드를 오냐오냐하며 무작정 밝게 키웠다.

소위 말해서 제이드에게는 세상이 너무 쉽고 따뜻했다.

하엘던과는 달리 학문에 대한 흥미는 없었지만 순진하고 명랑 했으며 검술에 있어서는 천재적 인 역량을 보였다.

“정식으로 귀족 출신 약혼녀부터 들이는 것이 순서입니다, 황태자님.”

젠시는 제이드의 어깨를 다독여 주며 말했다.

제이드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순식간에 하엘던에게서 멀어지던 귀족가의 관심을 체감했다.

처음부터 황위와 멀었으면 모를 까, 잡힐 둣 잡힐 듯하던 황위가 순식간에 멀어졌으니 박탈감이 심할 것이다.

천성이 따뜻한 그녀는 그 당시에 상당한 동정심을 느꼈다.

물론 하엘던은 언제나 황실 의료 연구진올 이끄는 것이 더 적성에 맞는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지만.

“리체 양이 아무리 좋아도, 조 금 더 넓게 보셔야 해요. 아시겠 죠?”

“예, 저도 그래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뭐…… 그래도 너무 좋다면 어 쩔 수 없고요. 사람 마음이 막는 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니니.”

제이드는 풀이 죽어 눈을 내리 깔았다.

젠시는 저 멀리 똘망똘망한 인상의 리체를 몰래 바라보았다.

메일리스 공국의 사교계에서 남녀 간의 문제만큼은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채던 그녀였다.

그러니 리체를 둘러싼 이 묘한 상황이 명백하게 보였다.

‘세르이어스 공작과 황태자라. 평민이 감당하기에는 좀 어렵지. 보아하니 본인이 그런 관심을 즐기는 것 같지도 않고.’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쉴 새 없이 닿는 것은 제3자로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도망가고 싶을 만하네.’

젠시는 리체를 위한 좋은 자리 를 꼭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황실 연회에 비견될 만큼 화려 한 저녁 식사와 흥겨운 바비큐 야외 파티까지, 꿈만 같은 생일 파티였다.

초대한 사람들 중 오지 않은 사람은 딱 한 명, 보육원의 엘던 선생님이었다.

직접 만든 쿠키 한 상자와 함 께, 오늘 보육원에서 큰 후원 행사가 열려 참가하지 못한다는 서신이 왔다.

[리체, 맨 처음 너를 보았을 때,  강물에 떠내려 오면서도 방긋 웃고 있었지.

초록색 리본이 달린 바구니에 담겨 초록색 눈을 반짝이는 너는 마치 선물 같았단다.

과연 영특하게 자라서 훌륭하게 독립까지 하더니, 멋진 인재가 되어 성년까지 맞았구나.

진심으로 축하한다. 비록 사정이 있어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오늘 정말 행복한 하루를 보내길 바란다.

-엘던 선생님]

내가 좋아하는 말린 체리와 아몬드가 가득 들어있는 쿠키는 바삭하고 달콤했다.

그 외에도, 방에는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건넨 수많은 선물들이 쌓여있었다.

오늘 밤만은 연구실에 들르지 않고 이 행복한 기분으로 잠이 들 셈이었다.

지난 성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시끌벅적하고 따뜻한 밤이었다.

기분이 좋아서 술도 잔뜩 들어 갔다.

샴페인에 잔뜩 취한 나는 발간 볼을 감싸며 흐린 정신을 붙들었다.

이제 웨데릭과 이시더 남작에게 영지를 벳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를 이렇게 아껴 주는 사람들 은 모두 다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만 해도 새롭게 살아온 보람이 있었다.

물론 딱 한 명이 좀 실망스럽긴 했다.

‘아무리 내가 유능하다고 해도 그렇지, 심지어 예쁘고 귀엽기까 지 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 런 식으로 붙잡으려고 하다니.’

며칠 전부터 대놓고 유혹하는 에르안의 태도가 불순했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책상에 앉아 종이를 꺼냈 다.

환절기의 사후 검사는 페렐르만 자작에게 맡기고, 나는 칸시아만 만나면 공작성을 뜰 것이다.

메일리스 공국에 가든, 칸시아를 통해 단서를 잡아 부모님을 찾아 떠나든.

‘마음속에 사표를 항상 품고 살아야 해.’

나는 술김에 사표를 쓰기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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