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8 화
페렐르만 자작은 아주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르안을 바라보았다.
사냥 대회 때부터, 페렐르만 자작은 에르안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둣했다.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게 큰 것 같다는 것이 페렐르만 자작의 의견이 었다.
“따님이 반란군의 계략에 얽혀 있는 것 같더군요.”
“……당연하겠죠.”
페렐르만 자작이 콧김을 내뿜으 며 대꾸했다.
“세르이어스 영지를 쉽게 차지 하기 위해, 나를 혼란시킬 작정으로 내 가족을 다 그렇게 만들 어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순식간에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 서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글쎄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죠”
에르안이 선명한 적의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 따님의 사정으로 인해 세르이어스 영지가 미끼가 되었을지.
선후 관계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 다.”
그는 페렐르만 자작의 부탁으로 이사벨 마님께 그 딸의 행방을 물었으나 전혀 아는 것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어머님께 여쭈어보았지만, 역 시 시오니 님께서 따님을 세르이어스 공작령으로 보냈다는 사안 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니 까요.”
“지금 내 딸을 탓하는 겁니까?”
“탓한다기보다는 그냥 유감인거죠.”
페렐르만 자작의 분노에 어린 시선을 맞받아치며 에르안이 대꾸했다.
“그래서 리체가 위험해졌으니까.”
“제가 뭘 위험해져요? 이렇게 멀쩡한데.”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내가 끼어 들었으나 소용없었다.
“그 가짜 부모한테 속아 넘어갔으면 어쩔 뻔했어.”
그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이를 꽉 물었다.
그런 에르안을 보면서 페렐르만 자작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리체를 공작성에 데려온 사람 이 접니다. 공작님께서 저보다 더 리체를 위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말은 바로 합시다. 리체의 발 로 직접 왔으니까.”
“그래도 이 아이의 가치를 바로 알아채서 비실거리는 공작님께 붙여 준 사람도 접니다.”
“그냥 똑똑한 조수 들어오니 마음 놓고 딸 찾으러 떠난 거 아닙니까?”
에르안은 팔짱을 끼고 약 올리 듯이 대꾸했다.
“그래도 제가 얘의 대부입니다!”
페렐르만 자작이 결국 테이블을 치며 화를 냈다.
“달랑 계약서 한 장으로 묶인 공작가가 페렐르만 가문보다 리체와 더 가까운 사이일 것 같습 니까?”
에르안은 그 말에 아주 짜증이 난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이르비아에서 조금만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어도…… 이딴 성가신 일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원망스럽다는 둣이 저 멀 리 있는 제이드 황태자를 한번 노려보았다.
“성가신 일이라뇨? 지금, 내가 리체의 대부가 된 것이 성가신 일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
“아…… 이렇게 개차반으로 컸을 수가.”
페렐르만 자작이 이마를 짚자, 에르안이 차갑게 말했다.
“딱히 자작님이 신경 쓰실 바는 아닙니다. 내가 자작님께 잘 보일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나저나 그렇게 화를 내시면 어떡 합니까? 이렇게 좋은 날에.”
“허?”
에르안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는 둣이 나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리체, 미안. 내가 말이 너무 과했지.”
나는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음…… 사과는 자작님께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야. 난 페렐르만 자 작에게는 딱히 실언하지 않았어. 그런데……”
날카로웠던 어조와는 완전히 다른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가 내 눈치를 살폈다.
“네 성년에 우리가 너무 험한 꼴을 보였다, 그렇지?”
그러고는 페렐르만 자작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자작도 얼른 사과하세요, 리체에게.”
페렐르만 자작이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저, 저…… 저 미친……”
아무래도 둘의 관계는 절대로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았다.
‘뭐, 무슨 상관이 있겠어. 어차 피난 몇 달안에사표 쓸건데”
이번 식사로 인해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나는 그의 유혹에 무심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계속 서로를 향한 시선이 의식되는데……. 젠시 공비 말대로, 요망한 나쁜 남자에게 걸리면 도망이 답이었다.
나는 애써 무심하게 상황을 넘 기며 에르안의 시선을 피했다.
“뭐, 좀 이상한 놈으로 크긴 했어도.”
정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간 바비큐 파티에서 페렐르만 자작은 포도주를 삼키며 말했다.
“옛날에 보기만 해도 한숨 나오 던 시절보다는 낫다.”
에르안은 저 멀리서 기사들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제 부모를 이상하게 닮은 데다 가 어릴 땐 아무도 신경을 안 써 주고 클 때는 혼자 5년을 내버려 두었으니 버르장머리 없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제가 신경 써 주었는데요.”
“그러니 너한테만 저 난리지.”
페렐르만 자작은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저승에 가서 케일런을 볼 면목은 있겠어. 딱 보니 욕도 많이 먹어서 장수할 것 같아.”
“주치의로서 그러면 됐죠.”
나는 성년이 되어서 드디어 마실 수 있게 된 술을 홀짝였다.
지난 생에서는 싸구려 와인만 마시다가, 이렇게 달짝지근한 고급 샴페인을 먹으니 끝도 없이 들어갔다.
“자작님.”
“왜?”
“그래도 환절기가 되면 마지막으로 사후 검사 한번 해 봐야 하는 것 아시죠?”
“그래. 아마 멀쩡할 것 같지만 그래도 찬바람이 불 때도 괜찮은지 확인은 해 봐야지.”
“그거…… 자작님께서 해 주시 면 안 될까요?”
페렐르만 자작이 의아하다는 둣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일로 그에게 부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렵지는 않아. 어차피 다시 처음부터 딸을 찾기 시작하기엔 나도 조금 숨을 골라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동안 네가 너무 잘해 주어서 그렇지, 원래 내 일
이었고.”
“네,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유가 뭐야?”
“그 즈음에 저도 좀 쉴까 해서요.”
“휴가라도 갈 모양이구나. 그동 안 너무 고생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지.”
사실은 휴가가 아니라 사직이었 지만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 다.
흔쾌히 대답해 준 페렐르만 자 작 덕분에 내 계획은 착착 잘 진행될 것 같았다.
나는 샴페인을 한 모금 더 마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작님은…… 괜찮으세요?”
“글쎄. 아직도 멍하고 무기력하 긴 해. 모든 게 손에 안 잡혀.”
페렐르만 자작은 쓸쓸한 표정으 로 눈을 내리깔았다.
“한 달간 매일같이 시오니의 무 덤에 갔는데 그러면서 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고.”
“저 빌어먹게 못된 공작이 똑같 이 복수하라고 해서 그걸로 또 버티고. 서쪽으로 가는 걸 본 적 있다고 하니 계속 서쪽 지방에서 헤매던데, 그 모습을 보니 또 풀 리는 마음이 있다는 게 웃기지. 아직 멀었지만.”
“이시더 남작님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신가 봐요?”
“내가 겪어 봐서 알아. 내장이 타들어 가는 고통일 거다.”
나는 샴페인을 한 잔 더 받아서 단번에 마셔 버렸다.
어쨌든 딸 이야기를 하는 페렐르만 자작을 보는 것은 언제나 슬픈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18년을 헤매게 하고 싶은데.”
“그걸로 부족하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술기운이 점차 올라와서 그 런지 감정이 격해지는 것 같았 다.
“자작님은 따님 얼굴도 못 보셨 잖아요. 더한 일을 겪어야 해요.”
“더한 일?”
“네, 아주 비참하게 바닥까지 끌어내야 해요. 솔직히……”
나는 페렐르만 자작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 한숨을 쉬었다.
“시오니 님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건……”
페렐르만 자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아닐 거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시오니의 시체를 직접 부검한 게 나야.”
나는 갑자기 엄숙해져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시체를 부검하는 그의 심정이 어됐을까 상상하 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 다.
시오니 님의 방에서 보았던 그 따뜻한 초상화를 떠올리니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사인은 마력의 역류였어.”
“아.”
마력이 역류하는 경우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마력의 돌이라는 희귀 아이템을 쓸 경우였고, 또 하나는 출산을 하며 위급 상황에 대 처하지 못해 태아와 마력이 과도 하게 섞일 경우였다.
“이시더 남작은 마력의 돌을 쓸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이나 재력이 없다.”
“그러네요.”
내가 알기로 마력의 돌은 황궁의 아주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 었다.
하지만 황족이라고 모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출하려면 황제나 황태자의 직인이 필요했다.
이시더 남작이 그렇게 대단한 아이템을 손에 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오니 님은 어느 농가에서 급히 출산을 했고 그래서 아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후자라고 판단하는 것이 여러 모로 가능성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