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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는 할 일 다하고 사표씁니다-97화 (97/182)

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7 화

맛있는 음식을 가득 담고 나자 제이드 황태자가 자리를 잡고 앉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 다.

그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고,  빈자리도 많이 남지 않아 나는 기꺼이 그의 옆에 앉았다.

“리체 양, 나중에 내가 보고 싶 어서 황궁에 올 때 꼭 그 목걸이 를 하고 와.”

제이드 황태자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내 눈 한쪽 값보다는 못하지만 말이야.”

내가 대답하려는데,  테이블의 끝에 앉아 있던 에르안이 끼어들었다.

“리체, 내가 준비한 선물 말인 데.”

“아, 네.”

에르안은 아까 선물 중정 시간 에 나서지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민망할 정도로 크고 화려한 선물올 줄 것이라고 내심 생각했는데, 사실 좀 의외 이긴 했다.

“이따 밤에 줄게.”

“뭐…… 네.”

나는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에르안이 나를 여자로 보고 있 다는 걸 알게 된 이후 그를 자연스럽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상황들이 이상하게 어색해졌다.

예를 들어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친다거나 할 때면 묘하게 간질거렸다.

에르안이 제이드 황태자를 바라 보며 또박또박 덧붙였다.

“단둘이 있을 때 말이야.”

“.............”

“우리는 같은 성, 같은 층에서 지내니까 자주 단둘이 있었잖아.”

왜 자꾸 ‘단둘’을 강조하는지 모 를 일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민망해서 에르안을 노려보 려는데, 제이드 황태자가 발랄하 게 말했다.

“아, 그렇다면 아주 오누이 같 은 사이였겠군.”

에르안의 표정이 무참하게 구겨 졌다.

“그러니 리체 양을 아끼는 것도 이해가 돼.”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사이.”

“공작…… 그렇게 정색하면 리 체 양이 섭섭하겠어.”

제이드 황태자는 혀를 차며 꽤

멀리 있는 에르안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백 번 잘해도, 그렇게 한 번 선을 그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게 사람 사이라고. 내 충고를 잘 염 두에 두길 바라.”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님께 조언 같은 걸 듣고 싶지 않습니 다.”

“아냐, 그렇게까지 번거롭지도 않은 걸. 너무 민폐라고 생각하 지 마.”

에르안이 이를 갈며 이마를 짚었다.

“왜 그래?”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에르안을 바라보며 제이드 황태자가 순진하게 질문하자,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황태자님과 함께 있으면 그 냥…… 좀 피가 빨리 돌고 열이 치받아 올라서 그렇습니다.”

“아.”

제이드 황태자가 떨떠름한 얼굴 로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미안해, 공작. 나는 여자를 좋 아해. 아무리 충신이라고 해도 그런 마음은 받아 줄 수가 없어.”

“무슨……”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는 바람에 에르안은 더 이상 그 화제 를 자세히 말하며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나까지 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에르안의 살기를 온몸으로 받아 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제이드 황태자뿐 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가져온 음식을 모두 비우고 다시 일어났다.

아직 아무도 없는 디저트 코너를 기웃거리고 있다가 이젠 성인이라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오랜만에 음주하겠다!’

신나서 갑자기 돌아섰다가, 단단한 가슴에 부딪칠 뻔했다.

“리체, 조심해야지.”

에르안이 넘어질 뻔한 내 팔을 붙들고 다정하게 말했다.

“어? 어……”

“벌써 디저트 먹으면 어떡해. 영양가 있게 먹어야지. 옛날에 내게 했던 말은 다 잊었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검은 눈에 열기가 가득한 것 같아서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다 가 어깨를 둥글게 쓸어내리는 그의 뒤로 천장에서부터 늘어진 마 법 장식들이 반짝거렸다.

“왜? 잘생겨서 눈을 떼기가 힘 들어?”

“아뇨. 천장 장식들이 예뻐서 본 건데요. 특히 저기 매달려 있는 별이 예쁘네요.”

나는 황급히 딴청을 부리며 대답했다.

“반짝거리는 게 신기하기도 하 고……”

“그래? 가질래?”

“네?”

그 순간 내 시야가 확 위로 솟 구치며 눈앞에 별모양 장식이 반 짝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체격 차이가 워낙에 크게 났기 때문에 그는 나를 한쪽 팔로도 번쩍 안아 들 수 있었다.

“가져가.”

“아…… 네.”

나를 안아 든 이유가 천장 장식을 직접 손으로 풀어 가지라는 뜻이었구나 싶었다.

나는 손을 뻗어 반짝거리는 별 모양 장식을 고리에서 빼냈다.

“어때? 좋아?”

나를 안아 든 그가 밑에서 속삭 이듯 말했다.

갑자기 밀착한 몸이 홧홧했다.

디저트 코너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볼 까 봐 부담스러워서 나는 급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위에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또 새로웠다.

벽 하나를 두고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너만 돌면 우리를 볼 수 있을 텐데, 괜한 오해라도 살까 두려 웠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눈치 됐는지 그는 금방 나를 내려놓았다.

“나도 좋아.”

나긋한 어조에 열이 올라 있었다.

“네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들 이라면 뭐든지 내가 갖게 해 줄게.”

나는 아무 말 없이 별모양 장식 만 만지작거렸다.

“나도 네 눈에 예뻐 보이면 좋겠다.”

그럼 기꺼이 줄 텐데.

그런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작정하고 직진하면 나는 자꾸만 가슴이 간질거렸다.

가뜩이나 연기도 못하는데, 아 무래도 마음이 없다며 단호하게 쳐 내는 건 그른 것 같았다.

아예 솔직하게 ‘저는 공작님과 남몰래 밀회를 즐기는 사이가 되 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똑바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였다.

“아, 리체 양. 여기 있었네? 벌써 디저트 먹으려고?”

제이드 황태자가 코너를 돌아 나타났다.

“공작도 함께 있군.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어.”

제이드 황태자는 우리 둘 사이 에 있었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둣 발랄하게 말했다.

“사냥 대회 때의 반란군들 말인데.”

나와 에르안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배후는 죽어도 말 안 하더라고. 일단은 몰래 더 추적하기 위 해 보안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이토록 조용하군요.”

“하지만 알아낸 것들이 몇 개 있어.”

제이드 황태자는 눈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이 반란은 각 영지 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날 예정이 라는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 세르이어스 영지도 산 발적인 반란이 일어난 곳 중 하 나였다.

“두 번째는 이 반란을 꾀한 것 이 아주 오래되었다는 점.”

역시 맞는 말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의 딸이 없어진 사건마저 이시더 남작의 손을 거친 것이라면, 적어도 18년은 더 된 치밀한 계획이었다.

에르안이 한숨을 쉬며 제이드 황태자에게 말했다.

“세르이어스 공작령을 삼키려던 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 까?”

“응? 모르는데.”

“제가 없어졌을 때 가장 이득을 취할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에르안의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조용히 숨을 삼켰다.

나 역시도 혼자서 언뜻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 물중도 없이 배후를 에둘러 말하고 있는 그의 발 언이 조금 위험해 보였다.

“여기까지 해 드렸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십시오.”

에르안은 혀를 차며 덧붙였다.

“저도 오늘부터는 하나만 보고 달려야 할 처지라서. 저는 할 데 까지 다 했고, 제게는 이제 다 남 일입니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져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나도 빠르게 디저트 코너를 벗 어나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그럼 저는 이만……”

일부러 도망치듯 디저트 코너를 벗어났는데도 손에는 반짝이는 예쁜 별장식이 사각거렸다.

두 번째 접시와 샴페인 한 잔까 지 들고 돌아섰더니, 페렐르만 자작 옆의 빈자리가 보였다.

“와서 먹어라.”

페렐르만 자작이 헛기침을 하며 의자를 빼 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거기 앉아 다음 식사를 시작하자, 내 대각선으로 에르안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까보다 홀쩍 가까워진 거리의 그는 우아하게 포크를 들며 식사 를 시작했다.

‘테이블 많은데 굳이……’

역시 나 때문에 왔나 하는 생각 이 들자마자 이상하게 발끝이 간 질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번쩍 들어 올릴 때의 감각 이 여전히 선명했다.

확실히 어릴 때의 귀여운 소년 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 남자였다.

분명 머리로는 난감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의 수려한 얼굴을 보고 싶어 본능적으로 눈이 돌아갔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테이블 꽃병 사이로 에르안과 눈이 마주쳤다.

괜히 술을 한 모금 들이켜는데,  그의 긴 다리가 내 다리에 살짝 닿았다.

대각선으로 앉아 있으니까, 일 부러 닿게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살짝 다리를 피하는데, 그 가 아무렇지도 않게 페렐르만 자작을 향해 말했다.

“웨데릭을 심문하며 알아낸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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