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6 화
에르안에게 그의 처리를 슬쩍 물은 적이 있었는데, 일단 페렐르만 자작이 당한 만큼은 미치게 해야 하지 않겠냐며 싸늘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어쨌든 남이 만들 수 있는 치료 제라면 나도 만들 수 있다는 얘 기였다.
회귀 전에 얼핏 아모리 꽃이 주 재료라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았다.
아마 크림의 성분 분석만 끝 나면 치료제야 쉽게 처방할 수 있을 것이다.
“치료제는 성분 분석만 끝나면 만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이드 황태자님을 통해 보내 드리도록 할게요. 그래도 진정제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는 치료제 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정말?”
“아마도요.”
“역시…… 제이드가 칭찬한 보람이 있구나.”
젠시 공비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부탁한다. 만일 네가 치료제를 만들어 준다면 이 은혜 정말로 잊지 않으마.”
제이드 황태자가 싱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누님, 리체 양은 절대로 자신의 공적을 잊지 않습니다. 말로 때우시면 안 될걸요?”
“말로 때우다니!”
젠시 공비는 제이드 황태자를 한번 노려보고 내게 더 절절매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네 치료제에 엄청난 값 을 쳐줄 것이다. 메일리스 공국에 그 약이 필요한 사람들이 얼 마나 많은데.”
“네, 감사합니다.”
“부족하다는 표정 같은데, 혹시 더 바라는 것이 있니?”
제이드 황태자와는 달리, 젠시 공비는 눈치가 매우 빠르다는 건 확실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제이드 황태자와 케인즈 경에게 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저…… 나중에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나가면……”
젠시 공비의 눈이 커졌다.
“제가 메일리스 공국에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걸 말이라고!”
젠시 공비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속삭였다.
“우리가 꽃길이라도 깔면서 모셔야 할 판인데! 그런데 대체…… 왜?”
그녀는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표 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이유로 연고도 없는 메일 리스 공국에?”
한낱 사용인의 성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토록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어 준다는 공작성을 왜 나가느 냐는 표정이었다.
“음…… 그게.”
내가 난감한 얼굴로 눈을 내리 깔며 망설이자, 젠시 공비의 눈이 빛났다.
“혹시 남자 문제?”
“네?”
“보통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뒷면에는 항상 치정 문제가 걸리기 마련이거든.”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젠시 공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제국에서도, 공국에서도 난 언 제나 사교계의 여왕벌이었단다.”
그녀는 이미 피부병에 대한 근 심을 잊고 흥미롭다는 둣 활짝 웃어 보였다.
“이런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지.”
“어................음.........”
“똑똑한 애라서 상황 판단도 빠른가 보구나.”
아까의 주눅 들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에 기세등등한 자신감만이 남았다.
“나쁜 남자에게 걸리거나 복잡 한 상황에 닥치면 그냥 도망이 답이야.”
“그, 그렇죠?”
“언제든지 와도 된단다. 새로운 시작을 외국에서 하면 좋지. 일 자리야 내가 우리 공국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직접 주선하도록 할 게.”
젠시 공비의 시원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일리스 공국이라면 제국과 멀 지도 않고, 친한 사람들을 종종 만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외국이니 에르안이 이래라 저래라 하며 끌고 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사표 쓰고 가기에 딱 좋은 곳이 었다.
갈 곳마저 정해졌으니 이제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정체불명 의 크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반란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지. 언제까지나 이사벨 마님께서 던져 주는 보석 같은 걸로 연명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이런 짓을 벌였을 텐데 내가 치료제를 먼저 만들면 분명 자금난이 생길 것이다.
‘이시더 남작은 소심하긴 해도 신중한 사람이니까 저렇게 괴로워하는 채로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는 안 돼.’
이시더 남작이라면 분명 아론 크릴소의 행방불명에도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론 크릴소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나였다.
그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라도 내게 접근할 것 이 뻔했다.
‘내 안위를 위해서 더 밟아야 해. 페렐르만 자작님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나는 젠시 공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제를 잔뜩 처방해 드릴 테니, 일단 이걸로 사태를 가라앉히시면 될 거예요. 하지만 본질 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꼭 주지시켜 주셔야 해요.”
“그래, 그러마. 어차피 치료제를 준다며.”
“구하기 까다로운 약초도 대량 으로 필요하고 해서, 건국제 이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치료제의 존재 자체는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왜?”
“아직 제가 만들어 낸 것도 아 니고 하니까요.”
“아,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구나.”
젠시 공비는 천천히 고개를 끄 덕였다.
“하지만 진정제만 하더라도 당장 사교 생활이 급한 우리에게는 엄청난 성과란다. 너무 부담 갖 지 말고, 천천히 만들어 줘.”
아무리 참석을 하지 않아도 가주들은 건국제에 필요한 행정적 절차를 처리해야 했다.
즉, 이시더 남작은 어쨌든 지금 영지에 돌아와 있을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무 너트릴 작정이었다.
페렐르만 자작의 복수도 할 겸, 혹시라도 나를 해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할 겸.
***
어차피 소박하게 하자는 내 부탁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줄 알았다.
전혀 조출하지 않은 저녁 식사였다.
식당에는 초대받은 손님과 기사 단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며 식당 가득히 여러 가지 장식이 반짝거렸다.
뷔페식으로 풍족하게 차려진 식 당에서, 사람들은 돌아다니며 마음껏 원하는 음식을 가져다가 테 이블에 자유롭게 앉는 분위기였다.
“리체, 성년 정말 축하한다. 이 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
이사벨 마님은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 생일 선물로, 보통 성년 때 어머니가 딸에게 준 다는 보랏빛 브로치를 주었다.
“비록 원하던 관계는 될 수 없 었지만……”
이 대목에서 에르안을 힘껏 노 려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에르안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빛을 무시했다.
나는 민망함에 웃으며 대답했 다.
“별것도 아닌 제 성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축하를 해 주셔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별게 아니라니, 그런 심한 말씀을.”
호아킨 단장님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두가 다 리체 양에게 커다란 도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긴, 그건 맞는 말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손님들은 내게 성년을 축하한다며 선물올 하나씩 건넸다.
“리체 양, 성년을 정말 축하해.”
제이드 황태자는 내게 엄청난 크기의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 를 선물했다.
무슨 기나긴 이름이 붙은 유명한 보석이라고 했다.
“이 목걸이를 보면서 호수같이 반짝이고 하늘처럼 영롱한 내 눈동자를 떠올리겠지. 내게 받은 것이라고 너무 아끼지 말고 종종 하고 다녀.”
“네에…… 감사합니다.”
손에 들고 있기에도 묵직한 것이 오래 목에 걸고 다니면 디스크가 올 것 같았다.
세이린 경은 작고 가벼우면서도 보석이 박혀 예쁜 단검을 가지고 왔다.
“사용법은 사냥 대회 때 가르쳐 줬지?”
그녀는 경쾌하게 디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찌르면 돼.”
디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네 선물을 고민하는 한 달간 매우 즐거웠단다.”
힘겹게 지팡이를 짚으면서도 찾아와 주신 펠릭스 어르신의 선물은 뜻밖에도 직접 수를 놓은 손 수건이었다.
노안이 오셔서 직접 바느질을 하시기 힘드셨을 거라 생각하니 받아 들자마자 가슴이 찡했다.
“노인이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인 선물을 받으면 좋은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지. 어차피 비싸고 좋은 건 다 받을 테니 너를 생각하 는 마음을 전달해 주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부모님을 찾는다고 했지. 그런 좋은 일이 네게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나는 내 이름이 새겨진 고급 실크 손수건을 매일 몸에 지니겠다고 약속했다.
그 외에도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들이 이어졌다.
디엘은 맨날 남의 건강만 챙기니, 내 건강도 챙기라는 말과 함 께 영양제를 주었다.
호아킨 단장님은 호신용 마법 아이템올, 케인즈 경은 마력석으로 만든 수술 도구 세트를 준비 해 오셨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페렐르만 자작이 코웃음을 쳤다.
“역시 다 내 선물만 못하군.”
한마디로 모두를 적으로 만든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번엔 오다 주운 게 아냐. 구 하느라 꽤 힘들었어.”
그가 내민 것을 보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건!”
“초판이다.”
케인즈 경을 제외하고 다들 ‘저 낡아빠진 책은 뭐지?’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너덜거리는 책을 받아 들었다.
“오스모 벨쿠스의 「질병의 기원」초판이요?”
오스모 벨쿠스는 제국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최초의 의학자였다.
그리고 그가 쓴 책의 초 판이니 적어도 1500년은 된 책 이었다.
나는 감격에 겨워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 보존 상태가 제일 좋은 걸로 구하느라 아주 힘들었지.”
“세상에…… 세상에, 감사합니 다……”
페렐르만 자작은 뿌듯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케인즈 경을 제외한 모두가 ‘왜 저런 쓰레기를 받고 좋아하지?’ 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결국 영혼이 서로 통하는 건 의사밖에 없지.”
그리고 선명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케인즈 경을 향해 중얼거렸 다.
“수술 도구 세트 같은 건 예전에 내가 선물해 줬기도 하고 말 이야.”
아마도 이제 그의 새로운 라이벌은 같은 의사 신분인 케인즈 경인 듯했다.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많은 것 이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누군 가에게 뭘 받을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 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나를 생각 하며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을 잔뜩 받으니 내심 기랬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지난 생보 다 훨씬 더 잘 살고 있다는 듯한 확신이 들었다.
모두에게 넘칠 정도로 감사 인사를 하고 나서야 내가 정말 다시 성년이 되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