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5 화
사냥 대회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성년이 다가왔다.
이사벨 마님의 수십 가지 기획안 중 나는 대다수를 거절하며, 부디 단출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 다.
페렐르만 자작이 오면 무조건 환절기 때 에르안의 상태를 마지 막으로 확인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페렐르만 자작이 자신이 맡겠다고만 대답해 준다면, 칸시아를 만난 뒤 바로 사표를 쓸 예 정이었다.
‘자신이 없다.’
나는 새벽 훈련을 마치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에르안의 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 었다.
‘저 미모로 작정하고 꼬시는 데 오래 버털 수 있을 리가.’
사표를 곱게 품고 있는 주제에 너무 화려한 생일 파티를 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나와 친분이 있는 사 람들 중 오겠다고 적극적인 의사 표명을 한 사람들만 불러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페렐르만 자작, 펠릭스 어르신, 세이린 경은 당연히 다 같이 시간 맞춰서 오겠다고 답신이 왔다.
내가 초대장을 보내기도 전에 ‘리체 양, 성년 생일 파티에 나를 초대할 거지?’라며 몇 번이고 편 지를 보낸 제이드 황태자에게도 결국 초대장을 보냈다.
에르안이 중간에 그 초대장을 가로채기 위해 디엘을 협박하는 모습을 목격해서, 내가 직접 초대장을 발송해야만 했다.
제이드 황태자는 본인뿐만이 아 니라 내 생일 파티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좀 데리고 온다고 했는데, 대체 그 ‘사람들’이 누구 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봤자 케인즈 경이겠지, 뭐.’
그리고 또 한 명, 내가 보육원에서 지냈을 때 가장 잘 보살펴 준 엘번 선생님께도 초대장을 보냈다.
엘번 선생님은 강가에서 바구니에 담긴 채 흘러가고 있던 나를 구 출하여 보육원으로 데려온 장본 인이었다.
그리고 열세 살, 보육원을 나와 야 할 때 페렐르만 자작에게 보 내는 추천서를 써 주기도 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은 취임식 때 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리체.”
이사벨 마님은 온종일 내 손을 붙들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데뷔탕트를 열어 주고 싶었는데……. 정말 빌어먹을 내 새끼 때문에……”
“데뷔탕트라뇨”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 귀족 영애도 오지 않아서 망신만 당했을 거예요.”
“세르이어스의 초대장을 무시할 수 있는 간 큰 집안은 없어.”
베티아나 나탈리가 내 생일 파 티에 온다고 생각하니 아주 끔찍했다.
그 와중에 약속된 저녁 식사 시 간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황궁의 마차였다.
“리체 양!”
반짝이는 은발을 휘날리며 제이드 황태자가 크게 손을 혼들었다.
“생일 축하해.”
“감사합니다.”
제이드 황태자는 내게 커다란 튤립 꽃다발을 안기며 씩 웃었다.
“오늘도 예쁘네.”
“오늘도 열심히 꾸였거든요.”
이사벨 마님이 직접 고른 드레스와 머리 장식을 한 나는 누가 봐도 이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제이드 황태자의 뒤로, 예상했 둣이 케인즈 경의 모습이 보였다.
“리체 양, 성년 축하드립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드려 요.”
내가 생긋 웃으며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하는데, 케인즈 경의 뒤 에 머뭇거리며 천천히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내 또래의 여자 같았는데, 보닛을 워낙에 깊게 늘러 써서 얼굴 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쪽은……”
내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여자를 바라보자, 제이드 황태자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
“보안을 유지해 주기를 바랄 게.”
“네?”
“내 누님, 젠시 메일리스 공비야.”
나는 깜짝 놀라 그녀에게 재빨 리 예를 갖췄다.
그녀는 내가 예를 표하는데도 고개를 숙일 뿐 아무런 말도 하 지 않았다.
메일리스라면 간간히 들어 본 공국의 이름이었다.
제이드 황태자의 동복 누나인 젠시 황녀가 공비로 간 곳이기도 했다.
동쪽 끝에 있어서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라 고 들었다.
회귀 전 이맘때 즈음 에 그 공국이 시끄러웠던 기억이 났다.
나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짐작이 갔다.
“누님이 여기 온 것은 아무도 몰라. 비밀리에 진행한 일이야.”
“아……”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온 것은…… 아무래도 리체 양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제이드 황태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도와드릴 수 있다면 최대한 도와드려 야죠.”
당연히 질병이 있으면 의사는 치료해야 했다.
그런데 그 외에도 내게는 얻을 것이 있었다.
나는 사표를 쓰고 난 뒤의 구체적인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옛날처럼 세르이어스 영지 구석에서 의원을 열 수도 없고, 황실 의료 연구진에도 갈 생각도 없었다.
케인즈 경이 입대를 얘기했지만, 굳이 전쟁터의 그 아수라장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페렐르만 자작저에서 머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왠지 에르안이 어떻게 해서든 나를 끌어내려고 올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세이린 경과 대치하다가 둘 중 하나는 죽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생판 남의 영지에 가서 의원을 여는 수밖에 없는데, 타지에 아무런 연고 없이 터를 잡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일리스 공국이라면 괜찮지. 바다 근처에서 한번 살아 보고 싶기도 했고.’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젠시 공비의 비호도 받을 수 있고 메일리스 공국 주민들의 신뢰도 얻을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사표 쓰고 갈 곳’ 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들어오세요.”
나는 친절하게 말했다.
“제 방으로 오시면 진료를 봐 드릴게요.”
***
내 예상대로 젠시 공비는 피부병이었다.
보닛을 깊게 눌러쓴 점, 예법에 맞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점 등에 서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회귀 전에도 메일리스 공국에 피부병이 돌고 있다더라, 하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워낙에 먼 곳이라 크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이 정체불명의 피부병이 돈 지 열흘 정도 되었다.”
젠시 공비는 빨갛게 딱지가 앉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귀족들 상태가 다 이렇게 되어 버린지라 사교계가 아예 멈췄어.”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심스럽게 피부를 살피는데, 내가 본 그 어떤 피부병과도 상태가 달랐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알겠지만 메일리스 공국의 그 어떤 의사도 치료법을 개발해 내지 못했단다.”
제이드 황태자와 케인즈 경은 젠시 공비의 뒤에 앉아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 다.
“일단 저도 처음 보는 병이지 만…… 몇 가지 짚이는 점이 있 어요.”
대다수의 귀족에게 발병했다니,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지만, 세르이어스를 떠날 마음을 먹었다면 돈이야 많으면 많을 수록 좋았다.
“왜 귀족들에게 발병했을까요? 평민들에게는 발병하지 않았나요?”
“그게……”
젠시 공비가 머뭇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우리끼리 추론하고 있는 이유가 있단다.”
“이유요? 무슨 이유요?”
“며칠 전, 피부가 고와진다면서 아주 비싼 크림이 귀족가에 돌기 시작했거든.”
“아……”
“밀수된 크림이라며 알음알음……. 실제로 피부가 윤이 나게 변한 사람들이 많아서 다들 혹했단다.”
“혹시 그 크림 갖고 오셨나요?”
젠시 공비는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평범한 하안 크림이 담겨 있었 다.
“감사합니다. 이건 제가 성분 분석을 해 봐야 할 것 같고요.”
나는 일단 지금 상황에 맞는 진정제를 재빠르게 조제하며 덧붙 였다.
“일단은 지금 제가 조제해 드리는 약을 드시면 외관상으로는 가라앉으실 거예요.”
“정말?”
“하지만 평생 이 약을 먹을 수 는 없으니까, 근본적인 치료제는 성분 분석 후에 처방해 드릴게요”
과연 내가 빠르게 만든 진정제를 먹은 젠시 공비의 피부는 슬 슬 가라앉기 시작했다.
“세상에…… 너 정말 대단하구나.”
“임시 처방이라 효과가 일주일 이상 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이게 어디니!”
반란에는 돈이 필요하다. 몰래 군사를 키우고 세력을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
회귀 전, 내가 알기로 메일리스 공국에는 이 피부병이 전국민에게 돌았다.
그리고 며칠 후 치료 제가 아주 비싸게 팔렸다.
그 치료제를 만든 사람이 바로 이시더 남작의 성에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시더 남작의 영지가 몹시 부유해졌다고.
‘지금 생각하니 이시더 남작 본인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왜 지금 귀족들 선에서 멈추었는지도 설명이 가능했다.
웨데릭의 실종으로 인해 지금 이시더 남작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