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는 할 일 다 하고 사표 씁니다 94화
[시오니의 아주 결정적인 문제는 남자를 볼 때 외모에 지나치게 약했다는 거야. ]
세이린 경이 그 얘기를 할 때부 터 나는 시오니 님의 취향을 이 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지게 생긴 남자가 작정하고 유혹하는데 넘어가지 않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어린 날 키울 때만 해도, 이렇 게 아예 생각하지도 못한 외모의 남자가 되어 수컷 냄새 풍기면서 다가올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래도 절대로 그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
제 정신도 아닌 상태로 종신 계 약에 얽매일 수는 없었다.
그래 서 나는 필사적으로 꿈속의 내 아이들을 떠올렸다.
“공작님.”
나는 혼몽해진 정신을 가다듬으 며 그에게서 손가락을 뗐다.
그 리고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 같 은 피크닉 테이블에서 억지로 일어섰다.
“아, 아무리 그러셔도 전 공작 님이 남자로 안 보여요.”
“리체.”
에르안이 천천히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너 거짓말 못하는데.”
“어쨌든요.”
나는 그대로 일어나 에르안을 뒤로 두고 재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감았던 손가락이 홧홧한 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나 도 모르게 두근두근 뛰고 있는 심장을 최선을 다해 가라앉히면서.
뒤통수에 그의 시선이 꽂히는 것 같아서 따가웠고, 빠르게 멀 어지는 내 걸음걸이가 나조차도 어색한 것 같았다.
‘칸시아만 만나고 나서 사표 써 야겠다.’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붉은 입술의 잔상을 없애려 애쓰며 나는 결론을 내렸다.
환절기 때까지는 무슨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 그때까진 지켜 보는 게 내 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생각을 바꿨다.
‘페렐르만 자작님께서 오시면 환절기 때 상태만 한번 봐 달라 고 부탁한 뒤 그만두자.’
안 그러면 내가 본 미래고 뭐고, 여우 같은 미남에게 홀려 토끼 같은 자식을 포기하게 될지도 몰랐다.
***
리체가 도망간 뒤, 에르안은 천천히 일어나 지하 감옥으로 향했 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의 가장 어두운 지하는 쨍쨍한 여름날에도 불구하고 싸늘했다.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듣자마자 웨데릭이 절규했다.
“고모님, 고모님을 불러 줘.”
에르안은 싸늘한 얼굴로 만신창이가 된 웨데릭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귀족이며 공작의 혈연이 라고, 호아킨은 그의 신체를 자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인간의 존엄성을 꽤 많이 상실한 모습이었다.
“너 말고 이, 고모님……
“어머니는 나와 좀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형?”
에르안은 표정의 변화 없이 철창 밖에 있는 의자에 천천히 앉 았다.
“다, 다 말했잖아…… 응? 다 말했는데 왜……”
“세 치 혀가 형이 심어 놓은 심 복들만도 못하군.”
“아버지는 어디 계셔? 너, 아버 지마저도 죽인 건 아니지? 그런 패륜적인 행위를 하려는 건 아니 지? 착한 에르안이잖아. 응?”
“형의 입에서 패륜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굉장히 재미있는데.”
과거의 멀끔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웨데릭이 엉금엉금 기어 철창을 잡았다.
“에르안, 옛정을 생각해 봐…….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넌 그 빌어먹을 주치의한테 속아 넘어 간 거라고.”
그 말에 에르안은 바닥에 굴러 다니던 주먹만 한 돌을 하나 집어 무심하게 던졌다. 대충 던진 돌은 정확히 철창을 통과하여 웨데릭의 배를 거세게 쳤다.
신음과 함께 무너진 웨데릭을 보며 에르안이 서늘하게 말했다.
“학습 능력 없이 아가리 놀리는 건 감옥에서 굴러도 여전하지”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리체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에르안은 새삼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어리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바쁜 어머니의 무관심, 매일같이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 단 하나도 없던 친구..............
그 사이에서 웨데릭은 그에게 그나마 기다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함부로 대해도 그 말을 듣지 않으면 그나마도 기다릴 사람이 없었다.
이건 아니라는 걸 막연히 알아도, 결핍된 것이 너무 많은 어린 그에게 웨데릭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리체를 만나고 나서 그 는 전혀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함께 있으면서 자기 자신이 좋아지는 기분을 처음 경험했다.
웨데릭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녀는 그를 정말로 위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 었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외롭고 고립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건 같았지만,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다.
그는 순식간에 웨데릭에게서 벗 어났다.
아니, 모든 외로움과 결핍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리체가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어떤 것도 상관 없었다.
“그래서 그 과자의 성분은 뭐야?”
에르안이 바닥을 구르는 웨데릭 을 보며 물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웨데릭이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널 어릴 때부터 아프게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미 말했잖아.”
“리체가 궁금해해. 못 밝혀내고 있거든.”
“나라고 뭐 알겠어? 위에서 시키니까 한 거지.”
“위가 누군데?”
웨데릭을 심문하면 딱 여기서 끊기곤 했다.
에르안은 다시 돌 하나를 주워들며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했지만, 웨데릭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몰라. 점조직이야.”
“믿으라고?”
“……정말이야. 적어도 난 몰라. 아버지는 알 수도 있겠지만..........”
“형”
에르안이 천천히 일어나 철창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철창 안으로 손을 뻗어 웨데릭의 턱을 치켜들었다.
“물론 너구리같이 신중하고 거미같이 음침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 하지만 딱히 아무런 배경도 없고, 능력도 없고, 겁만 많은 우리 외숙부께서 오래전부터 반란 군에 얽혔다……”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웨데릭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좀 이상하지 않아? 누가 한낱 남작가를 그 옛날부터 이 큰 판에 껴 줘?”
“몰라! 진짜 모른다고!”
웨데릭의 눈이 공포에 질려 번들거렸다.
“아무것도 몰라?”
에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치아 하나가 우지끈하며 혼들리 는 소리가 났다.
웨데릭이 훌쩍거리며 쇳소리를 냈다.
“그냥…… 그냥 얼핏 듣기로........”
“그래.”
에르안이 잔인하게 눈을 휘어 보이며 웃었다.
“얼핏 듣기로는, 뭐?”
그의 스산한 웃음이 소름끼쳐서, 웨데릭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얼거렸다.
“페렐르만 자작의 딸…… 그 딸이 연관되어 있다고……”
“무슨 소리야?”
에르안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낳자마자 행방불명된 딸이 뭐?”
“진짜 몰라. 아버지는 내게도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고. 나도 그냥 어디서 엿들은 거야.”
에르안이 잡고 있던 웨데릭의 턱을 내팽개치듯 놓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애초에 리체에게 해를 입힌 놈들이니, 반란군의 뿌리까지 찾고 싶어 시작한 심문이었는데 예상 외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스러웠다.
‘페렐르만 자작의 딸?’
에르안은 웨데릭의 흐느끼는 소 리를 등 뒤로 한 채 다시 지하 감옥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관심 가져 본 적도 없는 그 딸이야 알 바 아니었지만, 뭔가 이상하게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
한편, 이시더 남작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냥 대회에 두고 온 웨데릭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냥 대회가 열렸던 숲을 샅샅이 뒤져도 조금의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애도 아니고, 성년을 훌쩍 넘긴 건장한 청년이 한순간에 행방불명된다는 것을 그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부인을 잃고 애지중지 키워온 외아들이었다.
남작 영지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을 주고 싶어 안달복달했던, 그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사 람이었다.
겁도 많고 소심한 그가 이 거대 한 판에 끼게 된 유일한 이유이 기도 했다.
그런데 호위 기사까 지 한 번에 사라질 줄이야.
“아론 님이 신호를 보내셨습니다. 분명 삐꾸기 소리를 내셨거든요.”
막사를 지키고 있던 하인의 증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이후 사라지셨습니다.”
아론 역시도 행방이 묘연했다.
세르이어스 공작성에서 에르안 에게 물은 적이 있었으나 그는 그런 하찮은 사람까지 자신이 알아야 하냐며 오히려 냉담하게 신 경질을 냈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사냥 대 회에 참석했던 모든 귀족들에게 파발을 보냈다.
웨데릭이 사라졌는데, 혹시 목 격자가 있는지 간절히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쓸 만한 대답은 당연히 거의 오 지 않았다.
그때 하필이면 제이드 암살 미수 사건으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잠을 자지 못해 두 눈에 핏발이 설 무렵, 그에게 서신 한 통이 왔다.
페렐르만 자작저에서 온, 아르가의 편지였다.
[서쪽으로 계속 달려가는 걸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서쪽이라면 너무 밑도 끝도 없 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이미 눈이 뒤집힌 이시 더 남작은 그 정도 정보도 소중 했다.
그는 뒤에서 반란군을 도와서 하고 있던 모든 일을 관두고 서쪽으로 직접 떠났다.
반란 자금을 대기 위해 남작 영지와 가까운 메일리스 공국에 하고 있던 뒤 작업도 도중에 관두 었다.
웨데릭이 사라지면 이 모 든 일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한 영지는 엉망이 되었지만 그런 것이 중요 한 게 아니었다.
물론 한 달을 꼬박 뒤져도 웨데릭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일을 벌이느라 얼마 남지 않은 남작 영지의 가용 금액을 모두 털어 서쪽 정보 길드에 의뢰해 봤지만 허탕이었다.
그 사이 그의 가슴은 타들어 가 고, 얼굴은 시커멓게 변했다.
서쪽 땅을 모두 뒤지고 다시 영 지로 돌아왔을 때, 그는 거의 반 쯤 폐인이 되어 있었다.
거칠해진 얼굴로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웨데릭에 대한 단서가 없다면…… 함께 행방불명된 아론이라도 찾아내야 해.’
그리고 아론은 리체 에스텔의 조수로 들어갔다.
‘리체 에스텔……’
결국 또 그 여자애였다.